공자와 붓다 그리고 노자, 이들은 모두 어지러운 세상을 건너갈 희망의 좌표로서 ‘하나(一)’를 들고 있다. 서로 다른 세상의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라면, 이들이 내세우는 ‘하나’의 의미 역시 별개의 그 무엇이 아님은 분명하다. 세상은 처음부터 분별이나 차별이 있지도 않았다.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 그리고 만들어진 그것에 매달려 있는 상태가 삶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서라도 그것을 내려놓을 수 있다면 천명이 열리는 환희를 맛볼 수 있고, 해탈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으며, 무위자연의 세상을 온몸으로 맞이하게 될 것이다.
--- p.7
어떤 학인이 조주(趙州)스님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도(道)입니까?’
‘저 담 너머에 있다.’
‘그런 길을 묻지 않고 대도(大道)를 물었습니다.’
‘큰 길은 장안(長安)으로 뚫려 있지.’ (「碧巖錄」)
조주스님은 편견을 버리고 온전한 눈으로 본다면, 보이는 것마다 천지만물 그 자체로서의 도이자 법칙이라고 질책하고 있다. 하지만 선입견에 매달려 있는 제자는, ‘도는 무엇이다’라고 해야 도를 정의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내가 어디선가 들은 내용과 비슷한 이야기라야 답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사실을 이해하기 전까지, 우리가 만나는 세상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받아들이는 대상은 진정한 그 자체의 허상, 즉 우리의 생각에 의해 분리되고 나누어진 대로 이해되는 대상일 뿐이다. 달리 말하자면 여지까지 알고 있는 지식이나 관점으로는 세상을 온전하게 볼 수 없다.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선입견에 매달리지 않을 수 있는 참된 용기다. 1부「 몸과 마음」부분
--- p.35-36
낮과 밤이 흘러가서
인생은 어느덧 종착지에 다다르니
유한한 존재의 여정은 끝나가네.
마치 강물이 흘러가 버리듯. (「那先比丘經」)
‘나’를 앞세우게 되면 당연하게 ‘나 아닌 것’이 따라오게 된다. 그러나 그 ‘나’가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 아닌 것’ 역시 존재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내 생각’ 또한 상상으로 만든 허구의 세계일 뿐이다. 다시 말해 그 ‘나’가 스스로 만든 환상의 실체라면,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각 또한 이미지의 세계에 지나지 않는다. 2부「행복한 삶」부분
--- p.74-75
어떤 행자가 물었다.
‘나고 죽는 일에 대해 한 말씀 해주십시오.’
‘그대는 언제 나고 죽었더냐?’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스님께서 말씀해주십시오.’
‘모르겠거든 한번 죽어봐라.’ (「傳燈錄」 神山僧密)
세상의 모든 존재는 그 어떤 경우에라도, 근본적인 가치는 합리화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논리와는 별개로 자신의 본질에 의해 존재한다. 불교가 우리에게 일깨워주고자 하는 내용 또한 지식과 논리로 무장한 만큼 사물의 핵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다.‘나’도 그렇지만 삼라만상 역시 서로 맺고 걸리는 상의적 관계 속에서 나타났다 사라지는 존재일 뿐이다. 고정된 실체 즉 일정하게 지속하는 존재라는 잘못된 생각에서 벗어나게 되면 삶이란 단지 하나의 흐름이며 나누어지지 않은 연속적인 순간임을 깨닫게 된다.
3부「선(禪)과 깨달음」부분
--- p.148
너는 나로 인해 존재하고,
나는 너로 인해 존재한다.
둘 다 알고자 하는가?
원래는 다 같은 공(空)이다. (僧璨, 「信心銘」)
아름다움(美)이 무엇인가에 대한 평가는 문화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어왔지만,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진실로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이에게 달려 있을 뿐이다.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형태는 변하지만 아름다움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 것처럼 행복하다는 것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4부「무엇을 깨달아야 하는가」부분
--- p.234-235
부처도 없고 진리도 없다. 달마(達磨)는 비린내 나는 오랑캐이며, 노자(老 子)는 똥 닦는 밑씻개이고, 문수(文殊)보살 보현(普賢)보살은 똥 푸는 사람에 불과하다. 깨달음이란 굴레를 벗어난 범부의 마음에 지나지 않고, 보리와 열반은 나귀 묶는 말뚝일 뿐이다. (「五燈會元」 德山宣鑑)
절대적인 권위와 신성한 지위를 부정한다는 덕산스님의 호언장담은 궁극적 목적인 인간으로 향하고 있다. 그가 이렇게 표현하는 이면에는 존재의 근원에 대한 믿음, 즉 바로 지금의 삶은 온전함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라는 확신이 깔려 있다.‘나’를 무엇이라 부르던지 간에, 그것을 설명하는 수식어에는 ‘그것은 무한하고, 형체가 없고, 변함없고, 어디에나 있으며, 보이기도 하고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표현이 곁들여진다. 뿐만 아니라 ‘나’ 속에는 만물에 깃들여 있는 원리로서의 ‘하나’ ‘모든 것’ ‘신성’이 있다고도 한다. 문제는 이것이 종교에서 말하는 창조주와 구별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5부「관심으로부터의」부분
--- p.266-2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