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사가 나온 것은 언론뿐이 아니다. 미 지질조사국(USGS) 재해대책본부의 데이비드 애플게이트(David Applegate) 박사는 “이번 지진에서 우리는 지구의 매우 큰 균열을 목도했다. 하지만 이런 사태를 극복해낼 수 있는 나라는 일본이 유일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현장을 목격한 중국인 유학생의 말도 의미심장하다. “일본이란 나라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번 지진을 통해 일본 사람은 믿을 수 있다고 느꼈다. (중략) 도둑질하는 모습이란 상상할 수조차 없다. 세계 종말이 와야 한다면 이런 모습으로 왔으면 좋겠다. ---p.6
난을 겪은 시마바라와 아마쿠사의 지역은 주민 전원(3만7천명)이 몰살을 당했기 때문에 졸지에 거주민은 한 명도 없고 수많은 시체만 나뒹구는 황량한 곳이 되어버렸다. 막부에서는 각각의 번에 숫자를 할당해 이주민을 끌어들였다. 지원자가 없어 어떤 곳에서는 이주자를 추첨으로 결정해야만 했다. 그러나 세금을 반으로 줄여주는 등 혜택을 베풀자 무단으로 이주하는 사람까지 생겼다. 세월은 무심히 흘러 그날의 험악한 흔적은 찾기 어렵고 새로운 이주민들의 후손들로 인해 다시 아름다운 고장으로 바뀌었다. 380여 년 전에 울려 퍼지던 그들의 핏빛 외침은 무심한 바닷바람에 실려 아련히 들려올 뿐이다. ---p.29
그날도 뜰의 손질을 하고 있던 프티쟝 신부의 시야에 15명가량의 남녀 무리가 들어왔다. 그들은 교회 안으로 들어가려다 문을 여는 방법을 몰라 곤란해 하고 있었다. 그는 하던 일을 멈추고 문을 열어주었다. 일행은 한참이나 교회 내부를 돌아보았다. 얼마 후 제단의 앞에서 기도하고 있던 신부에게 일행 중 한 여인이 다가와서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의 신앙은 당신의 신앙과 같습니다(私たちの信仰はあなたの信仰と同じです).” 신부는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 이것이 바로 저 유명한 ‘나가사키의 신도의 발견’이다. ---p.32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간 이론이 있으니 바로 ‘본지수적설(本地垂迹說)’이다. ‘본지’는 본래 땅이란 말이니 인도를 말하는 것이며 ‘수적’은 이동이란 뜻이다. 그런즉 간단히 말해 본지수적설이란 인도에 있던 부처나 보살들이 대거 일본으로 들어와 가미(神)가 되었다는 주장이다. -중략- 일개 학설(?)이 일본인에게 그럴듯하게 들렸고 졸지에 통설이 되어버렸다. 따라서 부처가 가미이므로 부처를 예배하면 가미를 예배한 것이고 가미를 예배하면 부처를 예배한 것이므로 불교와 신도(神道)는 같다. 이른바 신불습합(神佛習合)이다. 이것이 일본인의 상식이 되면서 헤이안 시대(794년~1185년) 말기부터 에도 시대(1603년~1867년)까지 신도와 불교는 구분되어 생각하지 않았다. ---p.54-55
영주는 토지 조사와 인구 조사를 꼼꼼히 실시하면서 무라 단위로 세금을 부과했다. 즉 세금의 납입은 개개인이 하는 것이 아니라 무라 단위의 촌고(村高)에 따라 납부토록 했던 것이다. 일본 농민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무라(村)라는 정해진 단체 속에서 어떠한 예외도 없는 단체생활을 해야만 했다. 마을의 누군가가 게을렀거나 아파서 조세를 못 낼 처지가 되면 마을의 나머지 사람들이 대신 그것을 내야 했다. 마을의 누군가 법을 어기면 모두가 함께 처벌받아야 했다. ---p.65-66
에도의 도쿠가와 막부는 1612년에 금교령을 반포하고는 기독교를 금하고 크리스천의 적발 및 제거, 개종 정책을 취해나간다. 애초 막부는 답회(踏會)를 실시하고 보상 제도를 통한 밀고를 장려하는 등, 기독교를 뿌리 뽑기 위해 온갖 노력을 했다. 그중에서도 광범위하고 지속 적으로 시행된 제도가 사청제(寺請制)였다. 절에서는 매년 1회 조사 및 신고에 근거해 종문개장(宗門改帳)이 작성됐다. 이를 토대로 사청증서(寺請?文)가 발행됐으며 사람들이 부역이나 결혼, 그 밖의 이유로 외부로 여행할 경우에는 나이, 성별, 소속 종단 등을 기재해 마을 관리의 전출문 한 통과 함께 이전하는 새로운 절로 보내졌다.---p.75
1695년과 1696년에 걸쳐 동북지방에는 냉해로 인한 대기근이 있었다. 수확이 평년의 30%에 불과했고, 츠가루 번(津輕藩, 현재의 아오모리 현) 에서는 인구의 3분의 1에 상당하는 5만이 죽었다. 굶어 죽은 가족의 사체를 삶아 먹는 일이 속출했다 하니 그 참상은 엄청난 것이었다. 하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쇼군 쓰나요시는 1695년 오쿠보(大久保)에 2만5천 평, 나가노(中野)에 16만 평이나 되는 땅에 정부 1년 예산의 10%가 넘는 돈을 들여 들개들을 수용하는 거대한 신도시를 지었다. 여기서 약 8만2천 마리의 개를 사육하였는데 개 한 마리당 하루에 백미 3홉(약 0.54L), 된장 187g에 정어리 180g을 먹였다. ---p.82-83
일본에서의 의병활동은 어떠한 평가를 받는 것일까? 일본인들에게 그것은 너저분한 짓일 뿐이다. “자기 나라가 졌으면 앗싸리하게 포기하고 이긴 나라에 충성을 하면 되지 무슨 쓸데없는 짓거리인가? 아무나 큰 놈, 강한 놈, 이긴 놈에게 붙어 충성하면 되는 걸 왜 뒤에서 구시렁거리는가? 한국에서 추앙받는 안중근 의사도 대다수 일본인에게는 단지 테러를 저지른 흉악범일 뿐이다. 대한제국은 이미 넘어갔으니 일본에 충성해야지 안중근이라는 놈은 왜 이토 히로부미라는 걸출한 지도자에게 총질이야? 우리를 봐. 영미귀축이니 1억 명 옥쇄니 운운하다가도 일본이 일단 항복하니까 적국의 수장인 맥아더 장군을 카이진 쇼군(外人將軍)으로 모시며 신으로까지 섬기는 것이 안 보이는가?” ---p.96
일본 천태종을 세운 사이초(最澄, 767년~822년) 스님은 말한 바 있다. “천 가지 구석 중에 한 가지만 비추어도 이것이 곧 국보다(照千一隅 此則國寶).” 오래전부터 ‘칼의 힘’과 더불어 ‘천하제일’ 추구라는 확고한 두 기둥으로 세워졌고 여태껏 운영되어왔던 나라가 바로 일본이다. ---p.128
그런데 워렌 교수보다 빠른 1842년에 마취 수술을 한 의사가 있었다는 것이 알려졌다. 조지아 주의 크로포드 롱(Crawford Long) 박사가 장본인인데 불행하게도 그는 이 사실을 1849년에야 발표를 해 영예로운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롱 박사도 아쉽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전 세계에서 제일 먼저 전신마취 수술을 한 사람은 하나오카 세이슈(華岡靑洲)라는 일본인 이다. 미국보다 훨씬 앞선 1804년의 일이었다. ---p.130-131
니노미야가 죽은 지 18년이 된 1954년 영국 왕립 항공 협회는 그의 ‘비단벌레 형 비행장치’의 모형을 전시하고 그를 ‘라이트 형제보다 먼저 비행기의 원리를 발견한 인물’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p.140
왕빈빈(王彬彬)의 한 논문은 다음과 같은 말로 마치고 있다. “마지막으로 나는 말하고 싶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서양의 개념을 기본적으로는 일본인이 우리들을 대신해 번역한 것으로 중국과 서양 사이에는 영원히 일본이라는 존재가 끼어있는 것이다.” ---p.165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때도 금, 은, 동 메달리스트뿐 아니라 1위~8위까지의 모든 선수가 그가 제작한 포환을 사용했다. 아테네에서도 금, 은, 동 메달리스트는 모두 츠지다니 포환을 썼지만 4위였던 스페인의 마르티네스 선수는 인도 산을 사용했다. 그는 경기 후 “일제를 썼으면 좋았을걸….”이라고 한탄했다는 일화가 남아있다. 그런데 이렇게 올림픽에 참가하는 모든 선수가 열광하는 명품 포환이 아테네 다음 번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츠지다니가 납품을 거부한 것이다. 베이징에서는 사정을 했지만 그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세계 육상계에 큰 파문이 일었다. 그가 포환 공급을 거부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p.178
긴짱은 손님들의 모든 명품 구두 메이커를 알고 20개가 넘는 구두 약 중 그 메이커에 맞는 구두약을 사용한다. 그는 “마음을 담아서 닦으면 신발이 응답해준다”며 일이 재미있어 한 번도 그만두고 싶은 마음 없이 열심히 일해 왔다고 한다. 자신의 일에 커다란 자부심을 갖고 있는 긴짱은 팁 주는 손님보다 “굿 잡(Good job)”이라고 한마디 해주는 손님을 좋아한다. 구두닦이 할아버지는 말한다. “구두를 닦는 10분 동안은 세계 일류를 독점할 수 있다.” ---p.202
일본은 독도 문제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약 200명 이상으로 수적인 면에서 신용하 교수 등 몇 명에 불과한 우리를 압도하고 있다. 또 가와카미 겐조(川上健三, 1909년~1995년) 같은 사람은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일본 외무성 조약국에서 독도 문제만 30년 이상 담당했다. 그러나 한국 측의 맞상대 격인 외무부 국제 법규과나, 동북아 1과엔 독도 담당자는 제쳐 놓고 전체 직원 중에 3년 이상 근무한 사람이 없다. 일본 총리실의 한반도 담당자도 30년 넘게 한반도를 연구했으니 한반도가 그의 앞마당이다. 게다가 은퇴하면서 자신의 아들에게 업무를 인수인계했다.
---p.202-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