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을 해서 밖으로 나온 정연은 다소 위태롭게 거리를 걸었다. 가슴에 스며드는 지독한 추위. 그러나 초여름이란 계절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건 바로 그녀의 감정에서 오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차갑게 가라앉은 그녀의 눈빛은 뭇 남성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애처로웠지만, 그녀가 풍기는 차가운 냉기에 차마 다가서는 이가 없었다.
이따금씩 고질병처럼 찾아오는 지독한 괴로움에 마음이 울적했다. 빨리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보며 쓴 미소를 지으며 가끔씩 가는 bar에 들어갔다. select를 주문하고 바에서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음악에 자연스럽게 몸을 맡겼다. 처연한 분위기를 풍기며 혼자 술을 마시는 아름다운 여자에게 너무도 자연스럽게 남자들의 시선이 주목되었다. 그러나 정연은 그런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에 뒤덮여있었다.
늘 가슴이 아팠다. 숨 쉬고 있는 이 시간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하지만 비겁한 윤정연은 그저 한 발자국 물러서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런 자신이 미워 또 다시 술잔을 비웠다.
“윤정연?”
반쯤 감긴 눈꺼풀을 들어 자신을 부르는 사람을 올려보았다. 그녀의 앞에 다소 의아한 표정의 석현이 서있었다. 양부모님의 친우의 아들. 그녀가 기억하고 있는 어린 시절부터 알아온 남자였다. 그녀와는 전혀 다른, 서연과 같은 밝은 존재.
“동석해도 될까?”
사실 그와 그렇게 친분 있게 지낸 것은 아니었다. 서연이 태어나며 모든 관심은 그녀에게 쏠렸고, 이 남자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 더 옳은 얘기였다.
“네.”
“놀랍군. 한 번도 이곳에서 널 본 적이 없는데?”
석현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지어졌다. 대체적으로 외부에서 볼 때, 그는 차갑고 이지적인 남자였다. 그가 부드럽게 긴장을 풀을 때는 가족들, 그리고 서연의 앞. 정연은 그 대상에 들어가지 못했다. 언제나 석현은 그녀를 외면하고 있었다.
그가 빈 잔에 위스키를 따라주고는 웨이터에게 자신의 잔을 가져다 줄 것을 요구했다. 정연은 그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다시 술잔을 비웠다. 살짝 취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웨이터가 잔을 가져온 후, 석현과 묵묵히 술을 마셨다.
두 사람에게는 가족 외에 공통분모가 없었다. 정연은 특별히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려 했던 적이 없고, 그건 석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연과는 친남매로 보일 만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한 반면, 정연에게는 늘 생각을 알 수 없는 시선을 보내었다.
피해망상일지는 몰라도 그 시선이 마치 너는 이 집안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이방인이라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슬펐다.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사실이, 그래서 늘 정체되어 있는 자신의 모습이. 그리고 그녀로 하여금 더욱 강하게 그런 마음을 갖게 하는 한석현이라는 남자의 시선이 그녀를 아프게 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불편한 마음과는 달리 석현과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고 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석현은 찬찬히 정연을 살폈다. 지난번 모임에서 보았을 때보다 더 마른 듯한 느낌이었다.
‘이 여자는 왜 항상 아파보이는 걸까.’
석현은 정연을 처음 보았던 때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노랑 원피스 차림으로 그와 그의 부모를 맞이하던 작은 요정을 본 순간, 석현은 혼란을 느꼈다.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던 애송이가 바로 자신이었다. 서연이 태어나며 부모님들이 그에게 철저히 교육시킨, 친동생처럼 보살피라는 하명 때문에 정연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시간이 없었다.
아니, 서연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차마 수줍어서 그녀에게 다가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본 어느 순간,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어린 요정의 눈에서 모든 빛이 사라졌다. 그 대신 아픔을 담고 있어 그의 가슴을 시리게 했다.
한창 혈기왕성한 중, 고등학교 시절 어머니로부터 늘 어린 정연을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다. 여동생 같은 아이이다, 실수하지 마라, 이런 식으로. 아무래도 두 집안 사이가 워낙 돈독하니, 혹시 석현이 치기를 못 이기고 정연에게 실수를 할까 걱정이었던 듯했다. 때때로 사춘기 남학생들은 충동 조절을 못하니, 그 당시에도 혹 사라지지 않을까 가냘파서 안타깝게 보이는 예쁜 정연에게 이성보다 본능에 충실할까 싶은 우려는 당연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오히려 정연에게 다가가는 것이 점점 더 어색해졌다. 그도 스스로 정연은 아끼고 보기만 해야 하는 도자기 인형이라는 식의 허상을 머릿속에 집어넣었던 것 같았다. 대학생 때, 미팅에서 처음 사귀었던 여자친구, 그리고 사회에 나오며 교제를 가졌던 두어 명의 여자들은 손에 닿지 않을 것 같은 정연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들을 통해 마음펼에 존재하는 공허함을 채울 수 없었다.
그런데 가족들과 함께하는 장소가 아닌 예상 밖의 곳에서 이렇게 정연과 만나게 되자, 심장이 이상할 만큼 거칠게 뛰놀았다. 그리고 그런 기분은 석현으로 하여금 유쾌하게 만들었다.
“적당히 취기가 올라오는 군, 이제 갈까?”
“……네.”
정연이 계산하려는 것을 막고 계산을 한 석현은 약간 비틀거리는 정연을 부축해 바에서 나왔다. 그녀와 함께 나가는 그의 등 뒤로 많은 시기의 시선이 쏟아졌다. 대리 기사를 부른 동안에 두 사람은 잠시 기다려야 했다. 정연을 먼저 데려다주고 후에 가려고 했는데, 휘청거리는 그녀를 부축하기 위해 손을 내밀어 그녀의 어깨를 잡는 순간, 처음 계획을 깡그리 잊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서로에게 맞닿았을 때, 강렬한 스파크가 느껴졌다.
석현이 묻는 시선을 하자, 잠시 멈칫하던 정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착한 대리기사에게 방향을 알려주고 뒷좌석에 탔다. 호텔에 가는 내내 두 사람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서로가 부담스럽다면 이대로 멈추려고 했다. 그러나 정연이나 석현, 누구도 철회하지 않았다.
체크인을 하고 룸에 들어온 정연이 욕실로 향하는데 석현이 그녀를 끌어당겨 안았다. 그의 품안에 그녀를 품을 수 있는 지금이 마치 한낱 춘몽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후에 아쉬움 없이 그 꿈을 만끽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잠시라도 떨어져 있는 시간도 안타까웠다.
“씻어야겠어요.”
“괜찮아.”
석현이 단정하게 고정해두었던 정연의 머리핀을 뽑아 머리카락을 자연스럽게 어깨 위로 흘러내리도록 했다. 객실 안에 은은한 조명 아래에서 본 정연은 현실이 아닌 것 같아 마음이 시렸다. 정연의 입술 위로 입술을 겹쳤다. 두 사람의 입술이 포개어지며 방 안의 온도가 한층 올라갔다.
‘과연 가질 수 있을까?’
정연이 그의 가슴에 매달리며 그가 가진 온기를 빼앗으려 했다. 그녀의 마음은 너무도 추워 그가 데워주웠으면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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