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1,000년에 걸쳐 서구에 나타났던 열정적이고 낭만적인 사랑이라는 개념은 가장 파괴적인 문화유산 중에 하나다. 그로 인해 사람들은 ‘영혼의 반쪽’을 열망하게 되었는데, 그런 사람을 찾기란 현실에서는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어딘가 영혼의 반쪽이 존재한다는 근거 없는 믿음 때문에 사람들은 가능성이 희박해 보이는 한 사람을 찾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한다. --- p.32~33
아카 족 남자들은 세상에서 가장 육아에 헌신적인 아빠들이다. 그들은 하루의 대략 47퍼센트 정도를 아이들을 안고 있거나 바로 옆에서 아이들을 보살핀다. 여자들이 여전히 육아의 많은 부분을 담당하지만, 아카 족 남자들은 육아의 모든 측면에 온전히 관여하며, 대부분의 일을 엄마와 함께 나눈다. 아빠들이 아기를 씻기고 방바닥을 닦는다. 밤에 아기가 울면 아빠가 일어나서 아기를 달래는 경우도 드물지 않은데, 아빠의 젖꼭지를 가볍게 빨도록 할 정도다.--- p.63
남자가 집을 떠나 일을 하러 가는 관행은 19세기 공장들이 생기기 전까지는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다. ‘집안일housework’이라는 단어가 19세기에야 등장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전까지는 모든 일work이 집안일이었고, 모든 남편husband은 집에서 일을 하는 남편, 즉 주부主夫, househusband였다--- p.67~68
서구에서 태어나는 사람들 중에 대다수가 다양한 직업 선택 기회와 사회 계층 이동 가능성을 누렸다고 말해도 좋을 시기는 20세기 들어와서다. 이전보다 훨씬 보편화된 교육 기회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여자들이 서서히 유급 노동 시장으로 진출했다. 이런 흐름에는 여성들의 참정권 투쟁과 제1, 2차 세계대전 기간에 부족한 남성 인력을 대체하여 공장 노동을 했던 경험이 일조했다. 1960년대에 경구피임약의 등장도 여성의 사회 진출을 한결 수월하게 해준 공신이었다. 경구피임약 덕분에 여자들은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릴지 말지, 꾸린다면 언제 꾸릴지를 상당한 정도로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p.133
알고 보면 인류는 지금처럼 시간에 병적으로 집착하지 않고, 분초도 모자라 수백분의 1초까지 시간을 정확하게 구분하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수백 년 동안 무탈하게 잘 살아왔다. 소크라테스는 지금이 10시 10분 전인지 후인지 모르는 채로 평생을 살았지만 위대한 서구 철학을 탄생시켰다. 빙엔의 힐데가르트는 분이나 초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지만 중세 음악에 대변혁을 일으키는 업적을 남겼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최후의 만찬]을 그리면서 초조하게 시계를 힐끔거리지도, 일정을 깔끔하게 정리해주는 전자 달력을 활용하지도 않았다. --- p.167
우리가 풍요로운 사회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적어도 인류학자 마셜 살린스에 따르면 우리 사회는 풍요롭지 않다. 살린스는 1970년대에 진정 풍요로운 사회는 수렵. 채집인 공동체라고 주장했다. 소비재에 대한 욕망 때문에 현대인은 깨어 있는 시간 대부분을 비용 지불을 위한 노동에 써야 하며, 그 결과 가족, 친구와 함께하거나 게으른 쾌락을 맛볼 자유 시간은 거의 없는 처지다. 하지만 살린스에 따르면, 오스트레일리아 북부 원주민과 보츠와나 토착민 쿵 족은 하루 세 시간에서 다섯 시간만 생계 유지를 위한 노동을 했다. 살린스의 설명을 들어보자. “고된 노동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세상이 아니었다. 가끔씩 식량을 찾는 작업을 하고, 충분한 여가를 가졌으며, 1인당 연간 낮잠 시간이 다른 어떤 사회보다 많았다.”--- p.215~216
나처럼 창조성에 대한 자신감이 결여된 사람들은 자기를 탓해서는 안 된다. 탓할 상대는 오히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다. 정확히 말하자면 미켈란젤로를 중심으로 생겨난 창조적 천재에 대한 숭배 문화를 탓해야 한다. 르네상스는 누가 뭐래도 유럽 역사상 가장 놀라운 예술 및 문학을 만들어낸 위대한 시대였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르네상스는 창조성에 대한 엘리트주의 태도와 일반인의 창조적, 예술적 자신감 상실을 야기한 데도 책임이 있다. 사실 우리는 현재도 그때의 충격으로부터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상태다. --- p.388~389
오늘날 묘지들은 보통 교외의 엄숙하고 인적 드문 공간에 있다. (...) 하지만 600년 전에는 묘지들이 오늘날로 치면 도심 쇼핑몰이 있는 자리에 있었다. (지금에 비해 도심에 공간이 풍부하고 교회와 가깝다는 것도 도심에 묘지가 많은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중세 파리, 런던, 로마의 묘지들은 인기 있는 만남의 장소이자 와인, 맥주, 리넨 등을 파는 상인들이 많은 번화한 장소였는데, 순례자들이 지나가는 성인들의 축일에는 한층 사람들로 붐볐다. 사람들은 묘지들 사이에서 거닐고, 묘지에서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즐겁게 웃고 떠들며 놀았다. 아이들은 교회 옆 납골당에서 사람 뼈를 장난감 삼아 놀았다. (...) 매장지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중세에 묘지는 “도시, 시골 할 것 없이 어디서든 가장 시끄럽고, 분주하고, 활기가 넘치고, 상업적인 지역에 있었다.” --- p.427~429
우리는 수천 가지 다른 방식으로 각자 삶을 살 수가 있다. 또한 과거 문명들은 현재 우리가 습관적으로 사랑하고, 일하고, 창조하고, 죽어가는 방식이 우리 앞에 놓인 유일한 옵션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우리는 그저 역사의 ‘원더박스’를 열고, 세상살이 방식에서 새롭고 놀라운 가능성을 찾기만 하면 된다. 그런 가능성들이 우리 호기심에 불을 붙이고, 상상력을 사로잡고, 우리 행동을 자극하도록 하라.
--- p.470~4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