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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두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밤은 두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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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8년 06월 12일
쪽수, 무게, 크기 598쪽 | 744g | 148*200*35mm
ISBN13 9791130030111
ISBN10 1130030113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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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적끈적한 어둠이 감겨든다. 느슨하고 묵직해서 잠에 취한 몸으론 쉽게 떨쳐낼 수 없었다. 위기감이 들어 눈을 떠야겠다 싶지만, 한편으론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이대로 있고 싶다. 가만히 드러누워 뜨듯하고 질척한 늪에 서서히 빨려가듯 조금씩 가라앉고 있다. 새카만 밤에 그대로 잠겨 있는 기분.

눈을 떠야 해.

뜨고 싶지 않아.

떠야 해.

뜨고 싶지 않아.

일어나야 해!

그렇게 로즈는 눈을 떴다. 차가운 새벽 공기가 무거운 몸에 휘감겼다. 제 뜻대로 움직이기를 거부하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다, 로즈는 이불 밑의 제 몸이 나신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허리에 둘러져 있는 묵직하고 건장한 남자의 팔. 그 팔은 마치 제 일부나 된 듯 너무나 자연스러워, 처음에는 이불이라 착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 무게감과 촉감은 당연히 인간의 것이었다. 로즈는 날카롭게 소리지르며 절 안고 있는 팔을 떨어트리려 했다.

팔은 떨어지지 않고 도리어 더 온전히 그녀를 감싸 제게로 끌어당겼다. 맨살과 맨살이 닿더니 쩍, 소리를 내며 붙었다. 잠에 취한 목소리가 로즈의 귓가에 속삭였다.

“또 악몽을 꿨군. 쉬이, 괜찮아. 다시 자. 내가 옆에 있어. 당신은 혼자가 아니야. 괜찮아.”

가장 납득할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이 남자인데, 외려 안심시키려는 듯 저를 부둥켜안는 손길이 경악스러웠다. 로즈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냈다.

“무, 무슨 소리예요? 악몽이라뇨? 내 몸에서 손 떼요!”

그러나 남자는 별일 아니라는 듯 마구 밀쳐내는 로즈를 재차 꼭 끌어안았다.

“모두 꿈이야. 괜찮아. 지금 그대는 꿈에서 깼어. 그러니까 무서워하지 마.”

로즈는 거의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꿈이라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인가. 혼란한 와중에, 지금 알몸의 남자 품에 저 역시 알몸으로 안겨 있는 현재가 꿈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현실감이 들지 않는 무거운 몸뚱이와 심하게 지끈거리는 머리가 어쩌면 이게 꿈인지도 모른다고, 그러니 그냥 잠이나 더 자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꿈이라기엔 남자의 숨소리와 체취, 피부의 감촉까지 생생했다. 남자의 움직임을 따라 제 긴 머리카락이 흔들리며 몸을 찔러댔다. 로즈는 남자와 그녀 자신을 감싸고 있던 부드럽고 얇은 이불을 확 제 쪽으로 당겼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내 몸에서 손 떼요!”

도통 알 수 없다. 어째서 자신이 이런 곳에 벗은 채, 벗은 남자와 누워 있는지. 자신은 평범한 가정교사다. 작위는 없지만 부유한 상인들의 자녀를 가르치는 그런 가정교사.

잠들기 전은 여느 때와 똑같았다. 다음 날 아이들에게 가르칠 교재를 보고, 읽다 만 책을 조금 읽다 피로감에 잠이 들었다. 약도 술도 먹은 바 없다. 마지막으로 음식을 먹은 건 저녁식사 때로, 그 후엔 입에 댄 것이 없다. 별다를 것 없는 평범한 밤이었다. 그런데 왜 자신은 이런 곳에 있을까.

어스름한 새벽녘 빛으론 명확히 보이진 않지만, 방이 꽤 크단 건 알 수 있었다. 상단을 두 개나 가지고 있다던 상단주 저택에서 일할 때도 이렇게 큰 방은 없었다.

어른어른 비치는 벽면은 고급스러운 대리석과 황금으로 장식되어 있고, 가구들은 얼핏 보기에도 고가의 것이다. 제가 몸을 누이고 있는 침대 사방에 자리한 기둥 중 하나만 뽑아 팔아도 가정교사 월급 1년치는 나오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거기까지 생각하다, 기둥에 보석들이 박힌 걸 알아보고 로즈는 생각을 정정했다. 내 월급은 비교도 안 되겠다.

혼란스러움에 생각이 중구난방으로 튀어, 안 그래도 묵직한 머리가 더 아팠다. 이런 자질구레한 잡생각은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바로 자신이 왜 여기서 이런 모습으로 정체불명의 남자와 누워 있는지였다.

로즈가 불안해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남자는, 그녀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에아기네스, 평소보다 심한 악몽을 꾼 모양이군. 진정해.”

남자가 저를 낯선 이름으로 부르자, 로즈는 마치 남의 몸을 바라보듯 자신을 훑었다. 그러나 샅샅이 살펴보기엔 불행히도 눈앞에는 남자가 있고 거울은 너무 멀다. 게다가 사방은 어스름하기까지 했다. 그래도 적어도 제 몸이 어딘가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손으로 대충 더듬어본 얼굴 윤곽은 눈, 코, 입과 턱선 모두 제가 알던 위치에서 제가 알던 생김을 유지하고 있으니까.

어째서 에아기네스라는 여자로 착각당하는지, 왜 이런 곳에 이런 모습으로 있게 되었는지 전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아닌 건 아닌 거다.

“뭔가 오해가 있나 본데, 나는 에아기네스가 아니에요.”

로즈는 제 몸에 두른 이불을 좀 더 단단히 말아 쥐며 항변했다. 그러자 남자는 놀람도 당혹도 없이 침착하게 물었다.

“에아기네스가 아니라고? 그렇다면 너는 누구지?”

남자의 침착한 태도에 로즈도 흥분을 약간은 가라앉힐 수 있었다. 그러나 이내 남자가 그녀에게 다가왔고, 탄탄한 맨몸이 가까워져 그녀는 당황했다.

“내 이름은 로즈…….”

로즈는 다음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어스름에 뚜렷이 보이지 않던 남자의 나신이 남자가 그대로 몸을 일으키는 통에 그녀의 시선을 강탈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지금 당장 돌아서요!”

남자는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로즈는 그가 자신을 제 옆에 알몸으로 붙어 자던 에아기네스라고 확신하고 있음을 알았다.

“에아기네스, 지금 너무 흥분한 것 같은데 진정해봐. 어차피 매일 보던 몸인데 그렇게 민감하게 굴 이유가 뭐가 있어?”

자신의 이야기는 남자에게 조금도 전달되지 않았다. 로즈는 거칠게 뒤로 몸을 빼며 외쳤다.

“난 에아기네스가 아니에요! 내 이름은 로즈예요! 어찌된 건지 모르겠지만 제발 좀 가까이 오지 마세요!”

남자는 더 성큼 그녀에게 다가왔다.

로즈는 결국 침대 가장자리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뒤로 넘어갔다. 몸이 완전히 기울자, 로즈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그러나 바닥에 부딪혀야 하는 몸이 단단하게 받쳐져 안정감 있게 멈췄다. 로즈는 조심스레 눈을 떴다. 예상대로 남자가 신속하게 움직여 그녀를 받아들었다.

알몸으로.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버둥거리던 로즈는 결국 남자와 함께 침대로 완전히 엎어졌다. 남자의 나신을 온몸으로 느끼며, 로즈는 생각하기를 멈췄다. 너무 기가 막혀서,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머리가 너무 아팠다. 차라리 기절이라도 하고 싶다.

로즈는 몸에 이불을 둘둘 만 채 남자와 대치를 지속하다, 결국 이대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으니 차분히 대화를 해보잔 남자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상대가 아무리 미남이라 해도 초면인 남자의 나신을 보았다는 충격적인 현실은 사라지지 않았다. 어디 보기만 했나. 접촉도 했지.

부끄러움과 혼란과 두통이 전신을 강타했다. 이렇게 비현실적인 상황이 아니었다면 차라리 그대로 침대에 누워 푹 자고 싶은 심정이다. 수면이 부족한 상태에서는 생각날 것도 제대로 떠오르지 않을 것 같다.

로즈는 헝클어진 머리를 한 손으로 대충 쓸어올려 정돈했다. 외간남자 앞이다. 비록 옷은 안 입었을지언정 사람 꼴을 하고 맞대면하고 싶다. 로즈가 경기하듯 기겁한 탓에, 남자는 옆에 놓여 있던 긴 가운을 적당히 걸쳤다.

슥, 남자가 부드럽게 뺨을 어루만졌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손길이라 얼른 물러나려다 남자의 시선이 너무 곧아 그럴 수 없었다. 사람의 눈길을 순식간에 강탈하는 강렬한 눈빛인데, 자신에게 닿은 시선 끝이 매우 부드러워 더할 나위 없는 애정이 느껴질 정도였다.

“에아기네스. 내가 당신을 뭐라 부르면 되지? 로즈라고 부르면 되나?”

잘생기면 뭐하나, 자상하면 뭐하나. 이 남자,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 로즈는 몸은 무겁고 머리는 아팠지만, 그래도 단호하게 답했다. 자신을 향했으되 저 달콤한 속삭임은 제 것이 아니다.

“전 에아기네스가 아니에요. 로즈입니다.”

로즈의 단호한 답에, 남자가 순순히 손을 뗐다. 그러나 표정은 심각했다. 새카만 머리카락은 남자의 인상을 강하게 만들어주었지만 투명한 황금색 눈동자는 상대적으로 맑아 곧고 다정한 느낌을 주었다.

“그러면 로즈. 지금 뭔가 필요해 보이는데, 뭘 주면 되지?”

“옷을 입고 싶어요.”

지금 하고 싶은 것 영순위는 당연히 몸을 가리는 것이다. 속옷조차 걸치지 않은 완벽한 알몸은 쌀쌀한 아침 공기로 인해 소름이 돋아 있었다. 찬 기운으로 인해 이불 밑에서 돋아난 유두의 흔적을 발견한 로즈는, 그 위로 이불을 한 번 더 감았다.

남자가 느슨히 대꾸했다.

“도와줄 이를 부르지.”

남자가 침대 옆에 있는 기다란 여러 개의 끈 중 하나를 잡아당겼다. 곧 가벼운 노크와 함께 문이 부드럽게 열리고, 똑같은 옷차림을 한 여자들이 열 명 넘게 조용히 들어왔다. 그들은 침대로 가까이 오지 않은 채 시선을 바닥에 고정하고서 말없이 정렬했다.

에아기네스라는 여자는 도대체 어떤 위치였을까? 이 남자의 아내?

남자는 상당한 지위에 있음이 분명하다. 보통의 귀족여인, 또는 평민이어도 부유한 집안이라면 여인의 아침 성장 때는 세 명 정도의 시중인이 붙는다. 부릴 수 있는 시중인의 수에 제한이 있는 건 아니지만, 머리수가 늘어날수록 그만큼 부담해야 할 비용이 커지기에 적정선에서 멈추기 마련이다. 귀족가에서 일했던 적은 없지만 제법 부유한 상인가문에서의 경험이 있어 로즈는 상류계급의 대략적인 생활상을 알고 있다.

가장 빠른 방법은 남자한테 물어보는 거였지만, 우선은 옷부터 입어야겠다. 이대로는 남자에게 휘말려버릴 듯하다.

“당신도 나가 있으면 안 될까요?”

로즈의 조심스러운 권유에 남자는 미미하게 웃었다. 황금빛 눈동자가 웃음과 함께 반원을 그렸다. 시선을 단박에 끌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그래. 에아기네스도 그랬지. 여자의 화장과 성장은 보는 게 아니라고 말이야. 하지만 난 그대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나신에 옷이 걸쳐지는 걸 보는 게 좋았어.”

로즈는 황당했다.

“변태셨어요?”

직선적인 질문에도 남자는 그저 사랑스럽다는 듯 로즈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만큼 사랑한다는 뜻이야.”

심장을 찌를 듯 낮고 매력적인 음색이다. 저를 향한 눈빛도 다정함도 말도 아니건만, 로즈는 심장이 쿵쿵거렸다. 한편으론 로즈는 자신을 에아기네스라고 부르며 친밀하게 구는 사내가 조금 안쓰러워졌다. 영문은 알 수 없으나 에아기네스는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아마도 에아기네스와 무척이나 흡사한 용모를 지닌 자신이 밀어넣어진 거다. 얼마나 닮았기에.

저 남자는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가 없어진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저렇게 정사 후 옷 갈아입는 모습만 봐도 흐뭇하다는 남자가? 상당한 권력가인 거 같은데 내가 에아기네스가 아니라고 판단하면 처벌하지 않을까?

안쓰러움과 두려움이, 긴장과 피로가 단숨에 몰려왔다.

로즈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남자가 시녀들을 향해 가볍게 손짓했다. 시녀들이 푹신한 카펫 위로 발소리 낮게 다가왔다. 그들은 눈을 내리깐 채 옷과 장신구들을 재빨리 가져왔다. 나이가 제법 있는 시녀 하나가 로즈에게 다가와 정중하게 물었다.

“씻으시겠습니까?”
“아니, 오늘은 우선 옷부터 걸치기로 하지. 간단한 차림으로. 씻는 건 나중에 하고, 그때 다시 부르겠다.”

남자가 로즈 대신 익숙하게 명령을 내렸다. 혼란스러워하는 로즈를 위한 배려이리라.

“알겠습니다.”

답한 시녀는 더는 말이 없다. 주인의 명령에 순종하는 데 익숙한 듯했다. 시녀들 몇이 더 다가와 로즈에게 속옷부터 차례차례 옷을 입혀주었다. 연한 붉은빛이 감도는 흰색의 가벼운 실내복이다. 몸을 스치는 옷감은 아무것도 모르는 로즈가 봐도 값비싸단 걸 알 수 있을 정도다.

남자는 그런 로즈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녀가 제 시선을 부담스러워할 걸 알았는지 작은 탁자로 손을 뻗어 얇은 책자를 집어 들더니 읽기 시작했다. 로즈가 옷을 다 입을 때까지, 그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로즈는 침착해지려 애쓰며 눈앞의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두통은 여전히 심했고 속이 울렁거렸다.

“새벽에 격하게 반응한 건 이해해주시길 부탁드려요. 누가 되었든 그런 상황이라면 소리를 질렀을 테니까요. 통성명부터 해야 할 것 같네요. 제 이름은 로즈 에밀린입니다. 평범한 가정교사고요. 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이거야, 참. 에아기네스 그대에게 내 이름부터 알려줘야 하다니, 기가 막히는군.”

남자가 황망하게 중얼거렸다. 평범한 투덜거림조차, 남성적인 매력을 덧입어 색기가 흘렀다. 로즈는 홀리지 않도록 정신을 바짝 차리며 정정했다.

“죄송하지만 로즈입니다.”

반사적으로 남자의 이름을 부르려다, 제가 아직 남자의 이름을 알지 못함을 깨달았다. 로즈의 침묵에 남자가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루크워렐 션 라우리드센.”

남자의 성을 듣는 순간, 로즈의 얼굴이 확 굳었다. 라우리드센. 제국의 이름을 성으로 쓸 수 있는 이는 직계 황족밖에 없다.

루크워렐은 로즈의 반응이 재밌다는 듯 유려하게 웃었다.

“하는 일은, 이 나라의 황제로군.”

높은 사람이리라고는 짐작했지만, 벗은 몸으로 맞대면했던 사람이 황제이리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다. 현 황제의 황비는 타국의 공주다. 그렇다는 건, 에아기네스는 황비는 아니라는 뜻이다.

지금 있는 거처는 황실인가? 만약 황실이라면, 황비 외에 황제와 이렇게 친밀하게 지낼 이는 소문의 그녀밖에 없다.

황제의 애첩.

“그대는 에아기네스 프린 알키다스. 본인이 매우 총애하는 귀비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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