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승우: 시정에 관심을 가지는 시민들이 좀 있어야 한다는 거네요. 그렇지만 많은 시민들이 그런 게 내 삶과 무슨 상관이 있냐고 말하기도 하잖아요. 한국처럼 노동시간이 긴 곳에서는 참여할 시간을 만들기도 쉽지 않고, 또 괜히 나섰다 나만 찍히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도 있고요. 그래서 은근히 무임승차를 바라기도 하고. 그러니 선생님이 말하는 그런 관심까지 가려면 나름의 동기부여나 징검다리가 필요할 텐데요.
이상석: 동기는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고 봐요. 이게 역사적 근원이 있다고 보는데요. 한국은 완벽한 중앙집권형 국가였잖아요. 대한제국 끝나고 미군정이 시작되며 지방자치제도가 잠깐 들어왔다 박정희가 권력을 잡고 난 뒤 폐지됐고요. 그러다 보니 너무 오랫동안 ‘무관심’이 우리 DNA에 각인되어 있기도 했고요. 보통 세계적으로 국민소득이 2만 달러 정도 가면 시민들이 환경에 관심을 갖더라고요. 그리고 2만 달러 넘어가면 자기가 낸 세금에 대해 관심을 갖고요. --- p.45-46
이상석: 그러니 숫자에 밝다고 예산서를 잘 보는 게 아니라는 거죠. 시민들이 생각해야 할 첫 번째는, 예산서는 숫자가 아니라는 거예요. 약속한 대로 잘 썼는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과정이죠. 그리고 그다음 단계가 시민들이 예산을 만드는 참여예산일 텐데요. 이건 예산에 가치를 부여하는 과정이에요. 그런데 지금 참여예산으로 너무 빨리 갔어요. 참여예산은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니 계속 보완을 해 나가야 할 테지만, 애초에 약속한 대로 법규에 맞게 돈을 쓰고 있는지 감시하는 움직임이 먼저 일어나야 한다고 저는 생각해요. (…) 예산에 가치를 부여한다는 것은 지금 그 돈을 거기에 꼭 그렇게 써야 하는가에 대한 자문자답을 해 보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은 그런 과정이 별로 없어요. 그냥 편성된 예산에 대해서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저는 강의를 하러 가면 항상 이렇게 말해요. 예산감시운동은 보수운동이다. 법을 잘 지키자는 것이니 보수운동이다. 기본은 법을 잘 지키는 거다. --- p.47-48
이상석: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이 돈을 왜 이렇게 쓰셨어요?’라고 물어보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어요. 개인이 일일이 예산서를 뒤지고 조사할 게 아니라 잘 아는 사람에게 물어봐도 되고요. 아니면 우리 같은 시민단체에게 물어봐도 됩니다. 개인이 제도를 바꾸거나 고발하거나, 이렇게 하는 건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왜 그게 맞습니까?’라고 물어보는 게 좋죠. 그렇게 물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예산을 쓴 사람을 다음 선거 때는 찍지 않겠지요.
아직도 남아 있는 병폐가 뭐냐면, 정치인들이 적당히 해먹을 거 해먹어도 우리 동네 발전은 좀 시켜주겠지 하는 착각을 한다는 거예요. --- p.57
이상석: 대통령이 바뀌었다고 다 된 게 아니에요. 정부 안으로 들어가면 별로 안 바뀌었어요. 분권에서도 재정분권이 중요한데, 수직적 분권은 대통령이 의지로 한다 치더라도 수평적 분권은 어떻게 할 거냐고요. 시와 시, 군과 군 단위의 빈부 격차는 어떻게 할 것인지, 강남구와 구례군의 차이, 옥천군과 해남군의 차이는 어떻게 할 것인지 등등 이런 부분들이 정리가 안 되었어요. 이건 격론을 벌여야 할 문제거든요. 이런 일들은 시작도 안 해놓고 분권이라면 다 좋은 줄 알아요. 그러면서 지방채 발행과 관련된 제한을 완화하거나 시?도의 투?융자 심사기준 200억 원을 300억 원으로 올리겠다, 이러면 되겠습니까? 제왕적 권력을 가진 단체장들을 좀 통제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시민들의 직접통제를 강화해야 하지 않겠어요? (…) 재정을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지방정부에게 자치권을 부여하는 게 아니라 지역민에게 자치권을 주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지방자치단체를 지방정부로 바꾼다고 뭐가 좋아질까요? 국세와 지방세 비율을 8대 2에서 6대 4로 만들겠다, 그러면 뭐하나요? 자치단체가 장난을 더 쳐버리는데. 그런 점에서 지방의회의 권한을 더 강화시킬 필요가 있어요. 엄밀하게 따지면, 지방정부를 견제할 수 있는 지방의회에 훨씬 더 많은 권한을 줘야지요. --- p.58
하승우: 시민들이 지역을 잘 둘러봐야겠네요. 사실 지방정부의 권한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 시민들이 더 많잖아요. 지역 사회복지 계획과 지역 보건의료 계획이 다 지방정부 권한이고, 쓰레기 처리방침을 정하고 쓰레기봉투 가격을 정하는 것도 지방정부 권한인데요. 내 삶에 영향을 미치는 지방정부의 결정을 잘 감시해야 할 텐데요.
이상석: 생각해 보면 답답하죠. 박근혜 정부 말미에 주민세를 다 인상했어요. 주민 한 명당 인상된 액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전국으로 생각하면 몇천 억 원이 오른 거예요. 그럼 이렇게 생각해 봐야 해요. 어디에 더 쓰려고 올렸을까? 뭐가 부족해서 올렸을까? 왜 주민세를 인상했지?
지방자치단체가 주민세 인상에 대한 설명을 주민들에게 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근거치도 없고요. 그런데 지방의원들이 다 동의해 줬어요. 그런 의원들을 우리가 잘한다고 하고요. --- p.89
이상석: 운동을 집단적이고 조직적이고 과학적인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려는 움직임이라고 보기 때문에 뭐든 시민들이 시작을 해야 한다고 봐요. 내가 직접 해야 한다고 마음을 먹는 과정이 필요해요. 내가 사는 동네부터 바꿔야죠. 그런데 동네를 바꾸는 게 참 어려운 겁니다. 서울에서 중앙시민운동을 하는 게 차라리 쉽죠. 여기서는 익명이 안 되니까요. 내가 학교 다닐 때 성적이 어땠는지, 아버지 어머니는 뭐하시는지, 이런 걸 다 알아요. 특히 동네에서는 세상을 바꾸겠다는 액션을 취하는 순간 반드시 이득을 보는 사람과 손해를 보는 사람이 주변에서 생겨나요. 그로 인해 관계가 힘들어지죠. 그래서 지역운동은 내 편, 네 편을 가를 문제가 아니에요. 옳으냐, 그르냐만 따져야죠.
하승우: 저도 중앙보다 지역에서 운동을 하는 게 어렵다고 생각해요. 말씀하신 그런 어려움들이 있지요. 반면에 익명성의 공간이 가진 어려움도 있고 친밀함의 공간이 가진 장점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누군가 나서서 뭔가를 시작하면 그것에 대한 지지가 만들어지기 쉬운 공간도 지역이죠. 비슷한 욕구와 필요를 가지고 있으면 그것이 함께함의 기반이 되기도 하고요. --- p.117-118
이상석: 생각해 보면 정치가 세상을 바꾼다는 모토가 그대로 내려온 거예요. 정치만이 세상을 바꾸는 걸로 사람들이 착각을 하고 있어요. 물론 최종 문제에서는 그럴 수 있겠죠. 하지만 그걸 이뤄가는 과정에서는 정말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어야 하는 거잖아요. 하루아침에, 아무런 이해와 요구가 없는데 정치가 바뀌지는 않죠. 그건 불가능한 얘기예요. 그런데 이걸 운동권은 가능하다고 보는 거예요. 과학자와 운동권, 깡패들만 그런 게 가능하다고 봐요. 이 사람들이 꼭 집단으로 움직이잖아요. 그래서 이들은 정보공개청구 이런 건 안 해요. 자기가 아는 시의원이나 국회의원을 통하면 더 편리하고 훨씬 영향력이 있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저는 아니라고 봐요. 위에만 싹 바꾸면 세상이 다 바뀐다? 너무 조급한 거예요. 궁금해 하는 시민들 누구나 확인할 수 있어야 하니 공식 제도를 통해 변화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우리는 아는 사람에게 전화해서 필요한 서류 바로 받아 봐요. 그러면 일반 시민들은 어떻게 그 자료에 접근하나요? 몇몇 사람들만 하는 걸 민주주의라고 봐야 할까요? --- p.150
또 하나 예산 감시를 하며 느낀 답답증을 토로하자면, 지방의원들이 생각보다 예산을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많은 지방의원들이 자신이 가진 권한을 잘 모를 뿐만 아니라 예산서를 볼 줄도 몰랐습니다. 자치단체보다 의회가 약하기는 하지만 큰 무기가 있죠. 우리나라의 지방 예산은 편성과 집행은 자치단체의 몫이지만 심의와 의결은 의회의 고유 권한입니다. 그런데 이 고유 권한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단체장의 권한이 막강하다며 체념하는 분위기가 팽배합니다. 미리부터 의기소침한 분위기를 조장하는 측면도 있지만, 의회가 가진 고유 권한을 잘 사용하도록 교육하는 기관이나 단체가 많지 않다는 것도 문제의 원인 가운데 하나입니다. 의회가 가진 권한도 모르고 예산서도 볼 줄 모르는 의원이라니요.
이 책이 출간될 즈음이면 지방의원과 단체장을 뽑는 지방선거가 끝났겠지요. 지방의원 공천 과정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현상이 목격됩니다. 정당 공천 과정의 주요 변수가 바로 당에 대한 기여도라는 점입니다. 당에 대한 기여도를 우선으로 평가하기 때문에, 예산과 의회의 역할 및 의원의 권한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공천 과정에서 이를 판단하는 기준이 없는 것입니다.
--- p.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