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면 느는데 어떻게 안 쓰겠는가
2011 학정 이돈흥 선생 작품집에 부쳐
학정 이돈흥 선생은 외우(畏友)인 하석 박원규, 소헌 정도준과 더불어 대한민국뿐 아니라 한자문화권 동아시아 서예의 진수를 보여주는 서예가다. 학정은 지금까지 정통 서예만을 고집해왔다. 단 한 번도 관상자로 하여금 ‘이런 작품도 서예라고 할 수 있을까?’하는 의심을 품게 하는 작품을 한 적이 없다. 학정이 추구해온 서예, 즉 한자문화권 정통 서예의 예술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나는 우선 이글의 제목 “쓰면 느는데 어찌 쓰지 않으랴”라는 말의 의미부터 설명하고자 한다. 이 말은 곧 ‘쓰면 쓸수록 느는 것이 눈에 보이는데, 작품전을 목전에 둔 사람으로서 어떻게 한 번이라도 더 써볼 생각을 하지 않겠느냐’는 뜻이다. 연륜과 지위를 쌓을 만큼 쌓은 큰 서예가가 한 말이기에 더욱 감동적이다. 그리고 평범한 것 같은 이 말은 서예의 예술적 특징을 어떤 말보다도 절실하게 표현한다.
서예는 고흐나 피카소의 회화보다는 김연아 선수의 피겨스케이트나 조수미 소프라노의 성악과 훨씬 근접한 예술이다. 영감이 필요하지 않은 바는 아니나, 영감이나 아이디어만으로 작품이 이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끊임없이 반복하고 지속하는 연습과 연마 후에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예술이 바로 서예다. 하루도 거르지 않는 기본 연습과 독서가 서예의 수준을 높이는 지름길이다. 독서를 통해 정신의 경지를 높이고 그렇게 높아진 정신세계를 피나는 연습을 통해 자유자재로 표현하는 것이 바로 서예의 격을 높이는 길이다. 한 번 그어 지나가버린 획은 그것으로 끝이다. 그러므로 모든 공연 예술이 한 순간을 위해 피나는 연습을 반복하듯이, 서예도 손으로 머리나 가슴에 든 것을 그대로 그려내는 ‘心手相應’의 작품을 얻기 위해 연습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서예는 미술보다는 오히려 음악이나 무용, 스포츠와 더 가까운 예술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대로 공부를 하는 서예가라면 연륜과 지위에 관계없이 “쓰면 느는데 어떻게 안 쓰겠느냐”는 말을 자신도 모르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서예에서 ‘는다’는 말의 적용 범위는 손의 기능에 국한하지 않는다. 손 기능의 ‘늚’(진보)을 자극하고 인도하는 원동력으로서의 정신적 성숙까지 포함한다. 그렇다면 서예에서 필요로 하고 또 추구하는 정신적 성숙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바로 ‘思無邪’의 청정성과 ‘止乎禮儀’의 절제성과 천인합일의 자연성이라고 생각한다. ‘思無邪’란 공자가 『詩經』의 시를 평하여 “詩三百 一言而蔽之 曰 思無邪”라고 한 데서 취한 말로서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는 뜻이다. 서예는 마치 셔터를 한 번 눌러 사진을 찍어내듯이 한 차례 필획을 통해 작가의 마음을 그대로 찍어내는 예술이기 때문에, 일체의 꾸밈이나 거짓이 끼어들 틈이 없다. 평소 수양으로 속기와 사기를 벗어내고 한결같이 청정한 정신을 갖추어야만 청정한 작품이 샘솟는다. 이런 까닭에 서예는 청정한 인품을 강조하며, 그런 인품을 갖추는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독서를 제시한다. 그래서 소동파도 “글씨 연습하느라 닳은 붓이 산처럼 쌓인다 해도 그것은 높이 여길 바가 못 된다. 책을 만 권 읽었을 때 비로소 서예의 신묘한 경지에 들게 된다”[退筆如山未足珍 讀書萬卷始通神]고 한 것이다.
‘절제하여 예의에서 멈춘다’는 ‘止乎禮儀’는 한나라 사람 위굉(衛宏)이 쓴 『모시』(毛詩) 서문에 나오는 말로, 한자 문화권 문화·예술정신의 주요 내함인 ‘절제미’를 대변하는 말이다. 그런데 서예는 한자문화권의 많은 장르 중에서도 특별히 이 절제미를 장조하고 또 구현하는 예술이다. 서예는 지극히 절제된 색인 黑과 白 두 가지만을 사용하여 ‘計白當黑’의 조화로 천변만화를 일으키는 예술이다. ‘發乎情’의 방자함을 배격하고 ‘止乎禮儀’의 절제미를 본령으로 하는 정신적 성숙을 필요로 하는 예술인 것이다. 자연과 내가 하나를 이룬다는 의미의 ‘天人合一’은 한자문화권 문화예술정신의 대표적인 내함임과 동시에 궁극적 목표이다. 그런데, 서예는 인품을 정화하여 궁극적으로 해탈한 자연으로 돌아가는 ‘由人復天’[인공을 거쳐 천연으로 돌아감]을 지향한다. 유인복천은 곧 천인합일이다. 그것은 ‘從心所欲不踰矩’[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음]와 같은 경지이며 장자가 말한 ‘逍遙遊’[절대자유]와 비견할 만한 경지다. 서예는 이런 천인합일의 정신적 성숙을 필요로 하는 예술이다.
학정 이돈흥 선생은 무엇보다도 서예의 이런 정신성을 소중히 여기며 그것을 구현하는 작품을 창작하기 위해 정신적 성숙을 끊임없이 추구한다. 그런데 서예의 이런 정신성은 당연히 수천, 수백 년을 이어온 정통서예라야만 표현이 가능하?. 선인인들 어찌 변화의 욕구가 없었겠는가? 기존의 틀을 깨부수고자 하는 욕망이 없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천, 수백 년 내내 전통이자 정통 양식의 서예가 이어져온 이유는 정통 서예가 아니고는 서예에 본래 담겨져 있었던 思無邪의 청정성과 止乎禮儀의 절제성과 천인합일의 자연성을 표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인들은 선인을 좇아 서예의 정통을 이어 지금에 이르게 한 것이다. 松門拾得一片? 知是高人向此行! 소나무 숲길에서 나막신 한 짝을 주워들고서 앞서 선생님께서도 이 길을 걸어간 줄 알고서 그 길을 따라 걸어온 것이다. 학정은 서예가 서예여야 하고 또 서예를 서예이게 하는 이 思無邪의 청정성과 止乎禮儀의 절제성과 천인합일의 자연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지금까지 단 한 작품도 서예를 벗어난 작품을 하지 않았다. 손의 기능과 함께 정신 성숙, 즉 청정과 절제와 자연을 추구하는 공부를 끊임없이 해왔다. 그리고 그렇게 성숙한 정신을 손을 통해 표현함으로써 ‘心手相應’의 만족을 얻기 위해 오늘도 그저 “쓰면 느는데 어찌 안 쓰겠느냐”는 말을 뇌고 있는 것이다.
김병기
서예가, 서예평론가, 전북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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