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ㆍ영상시대 ‘붓글씨’의 존재이유와 생존방식
-소헌 서예 ‘오십대 해외초대전 시기’ 작품분석을 중심으로
이동국(예술의전당 수석큐레이터)
문자ㆍ영상시대의 한가운데에서
……3000년을 넘게 헤아리는 서예 역사에서 이와 같이 패러다임이 바뀌는 사례는 몇 차례 있어왔다. 한나라 때 붓이라는 도구가 발명된 것이 한 가지 예다. 이것을 계기로 글씨가 비로소 예술로 영역이 확장되고 미학적으로도 논의가 본격화되었던 것이다. 당시 조일(趙壹) 같은 사람은 ‘비초서’(非草書) 논쟁을 야기했는데, 그는 칼의 산물인 전서(篆書)에서 붓의 산물인 초서의 등장이 필연적이지만 외형의 모방에만 급급한 초서유행 행태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마치 오늘날 자판문화로 인해 필묵의 가치가 여지없이 평가 절하되는 현실과 흡사하다. 하지만 이러한 첨단 테크놀로지에 의한 ‘기계서예’(機械書藝)의 득세가 인간성 고양이라는 입장에서 꼭 옳은 방향인가는 한번 생각해볼 문제다. 이 문제는 문자ㆍ영상시대에 이미 ‘만들어진’ 자판이 아니라 인간의 손으로 문자를 ‘만들어가는’ 붓글씨의 존재이유나 생존방식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묻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서구의 산물이자 기계문자로서 자판의 타이포그래피가 인간성을 담아내지 못한다는, 즉 붓글씨의 시각으로 말한다면 인간이 만들어낸 최고의 성취물인 초서와 같은 작품들은 이제 자판에서는 자유자재로 구사될 수 없다는 비판에서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기계가 손을 대체한다면 그것은 결국 예술에 있어 인간의 영역을 축소하는 쪽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 요컨대 문명의 진보가 꼭 선하거나 좋은 것만이 아님을 역사적 경험으로 아는 서예가들은 타이포족과 붓글씨족 모두를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이제 무수히 제작되는 서예작품들은 도구와 문자라는 문명사적 관점에서 붓이냐 아니냐는 물론 ‘씀’의 결과인가 아닌가,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 필획을 통해 인간의 성정과 기질을 여하히 담아낼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서예에 있어 가장 근원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제 문자ㆍ영상시대 서예의 존재이유나 생존방식은 물론 더 큰 가치도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이 않을까.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보면 소헌 정도준이 현재 벌이고 있는 작품세계는 바로 ‘문자ㆍ영상시대, 왜 붓글씨인가’ 하는 우리 시대 사람들의 근원적인 물음에 매우 의미 있는 답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10년이 넘게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소헌의 해외초대전은 서구 미술의 심장부에서 서예의 존재이유나 생존방식을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더 나아가 서예의 가치가 현대미술이나 문자ㆍ영상시대에 새롭게 자리매김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서예 전통과 정통의 체화-가학과 서숙시기
소헌의 서예, 즉 붓글씨로서 글 ‘쓰기’는 그가 이미 십대 초반부터 휩쓸고 다녔던 《개천예술제》의 최고상 수상이 증명하듯 그가 태어날 때부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러한 성과에 힘입어 소헌 서예의 경우는 애초부터 부친이 소헌 예술의 성격과 방향을 규정지을 정도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잘 알고 있다시피 소헌의 부친 유당(惟堂) 정현복(鄭鉉輻, 1909~73)은 20세기 한국 근현대서단을 대표하는 작가다. 특히 유당은 생애 전반기를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1705~77)나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1770~1847)과 같은 조선 후기 말기의 소위 ‘동국진체’(東國眞體) 계열을 조선의 전통 필적을 핍진하게 소화해내면서도, 후반기에는 전서 필획으로 행초를 구사해내는 실험과 혁신서풍으로 한국서단을 주도한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 1903~81)의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이를 통해 그는 20세기 근현대 서예 역사에서 사례가 없는 전통과 현대를 한 몸으로 구사한 이모작적(二毛作的) 예술 행보로 일세를 풍미했던 인물이다. 이런 부친의 훈도로 일찌감치 붓을 잡은 소헌은 안진경(顔眞卿, 709~785)의 글씨를 처음 공부하게 된다. 십대 중반인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국전에 출품하여 아홉 번을 입선한 소헌은 1982년(34세) 국전에서 민전(民展)으로 이양된 《대한민국미술대전》의 첫 해 대상을 거머쥐었다. 국전 시기라 할 이십대를 전후한 소헌의 학서 과정에서 2차적인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것은 바로 가학(家學)에서 서숙(書塾)으로의 전환이다.
1969년(21세) 때 일중묵연(一中墨緣)에서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 1921~2006)의 가르침을 직접 받게 된 소헌은 여기서도 가학으로 받은 안법(顔法) 수련이 기본적인 서법으로 제시되면서 소헌 예술의 일차적인 토대를 더욱 공고히 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안법의 소화는 우람한 획질과 결구를 바탕으로 지금 현재 왕성하게 구사되고 있는 장엄한 소헌 서예미학의 성격을 결정짓는 인자가 되고 있다. 조선의 학문과 예술이 기본적으로 가학을 토대로 이루어졌다면 봉건시대와 현대의 과도기라 할 우리의 근대기 서예는 서숙과 가학이 교차하는 시대다. 위에서 본대로 과도기적인 서예학습과정은 소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가 서예가로서 일차적인 토대가 되는 학서기(學書期)를 이와 같이 부친 유당의 훈도와 스승 일중의 가르침 속에 삼십대를 전후한 시기까지 계속해서 가져갔던 것이다. 이러한 가학과 서숙 궤적은 지금에 와서 보면 가르침 그 자체보다 육십대를 전후한 현재의 소헌 서예의 성격은 물론 향후 소헌 예술의 방향을 규정짓는다는 측면에서 더 중요하다. 그 이유는 소헌의 경우 어떤 작가보다 정통서예에 대한 연마의 토대가 깊고 굳건하고 그래서 미래의 서예 또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더라도 그러할 수 있다는 실천과 믿음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해 항상 소헌은 “고전(古典)은 작가로서 평생 길어올려야 될 깊고도 마르지 않는 샘물이자 자양분이다”고 토로한 바 있다. 매사가 그러하지만 뿌리가 부실하고는 꽃과 열매가 튼실할 수 없다. …
소헌 서예의 혁신―오십대 해외초대전 시기부터 지금까지
소헌의 오십대, 특히 10여 년간의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벨기에, 미국 등지의 해외초대전 발표를 위한 작품 수련과 제작은 그 자체가 소헌의 예술 궤적에서 분수령이다. 다시 말하면 유년기 청년기의 가학은 물론 삼사십대 학서기의 정통서법은 오십대 해외초대전에서 서예 역사의 시작인 고대문자를 본격적으로 녹여내면서 소헌 예술의 조형성이나 사상에서 전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특히 대전(大篆)은 물론 갑골문(甲骨文), 종정문(鐘鼎文)과 같은 문자의 시원으로의 회귀가 그러하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 있는 전각(篆刻)의 도법과 포치가 혼융되면서 담대하고 웅장한 획질과 결체(結體), 자유분방한 장법(章法)의 공간경영, 나아가서는 각체 혼융으로 갈아엎으면서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테크놀로지 시대가 가속화되면 될수록 너무나 당연하고 필연적인 일이지만 작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소헌의 예술사상 또한 이즈음 와서 다분히 반문명적인데, 태고에서 놀거나 원시로 회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시대가 시대인 만큼 의식이 있는 작가라면 누구나 정법으로서 당해나 왕법류의 행초(行草)와 전예(篆隸) 수련은 이미 삼사십대를 즈음한 학서기에 어느 정도 소화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20세기 한국은 물론 중국 일본서예 또한 시대서풍으로서 과도기 성격의 육조해(六朝楷)나 죽간체(竹簡體), 전서 중에서도 갑골문과 종정문 같은 고전이 새롭게 소개됨으로서 광범위하게 학습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소헌에게 있어 특히 두드러지는 이 시기의 필법으로 기존 안법과 한예류 중심의 일중의 정통서법 위에 갑골문 종정문 죽간체와 같은 이와 같은 전예의 혼융과 전각기법의 응용이 주목되는 이유는 서로 다른 서체와 필법의 대담한 결합이 또 다른 서체는 물론 혁신적인 공간경영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1999년(51세)부터 2011년(63세) 12회에 걸쳐 계속되고 있는 소헌의 해외초대전은 우선 작품 외적인 측면에서 서구 사람들에게 한국 문화, 그중에서 서예를 이해시키는 아주 특별한 계기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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