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적인 근대 개항도시를 꼽으라면 부산, 인천, 목포 등을 거론할 수 있다. 1876년에 부산이 개항을 했고, 1883년에 인천이, 그리고 1897년에 목포가 개항을 했다. 개항이 단순히 항구를 열고 외국 선박이 출입하는 것을 허가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문물과 문화가 들어오면서 기존의 문화가 변하고 달라져 새로운 외피를 입게 되는 것을 포함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 시기의 개항은 일제의 야욕, 야망과도 연결되는 아픈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인천의 대중가요는 그러한 배경에서 출발했다. _ p.18 〈광복 이전 인천의 상황과 대중음악〉
인천은 개항과 더불어 몰려든 각국의 군인, 외교관, 기술자, 상인, 선원들을 통해 서양음악이 유입되는 팝 음악 전파의 출발점이 되었다. 1949년 모두 철수했던 미군은 인천상륙작전이 이루어진 1950년 9월부터 본격적으로 주둔의 역사를 시작했다. 더불어 미군 캠프에 생성된 미8군 무대는 이후 한국 대중음악계에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때부터 한국인들로 구성된 스윙 재즈 밴드들이 미군을 위한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_ p.63 〈1950년대 인천의 상황과 대중음악〉
일제강점기 부평의 삼릉과 신촌에 위치한 일본군 군수의 핵심이었던 조병창에는 미군수지원 사령부 애스컴이 들어왔다. 애스컴(ASCOM 미군수지원사령부)은 영어 ‘Army support command’의 약자로 당시 많은 미군 부대가 상주하며 지역경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애스컴 주변 신촌 지역은 미군을 상대로 한 상업지구들이 번성하여 ‘애스컴 시티’로 불렸다. _ p.72 〈부평 미 군수지원 사령부 애스컴(ASCOM)〉
1960년대 당시 큰돈을 벌 수 있었던 부평 애스컴에는 무수한 악사들이 모여들었다. 프로덕션은 물론, 피아노와 기타를 생산 판매하는 회사들도 이후에 이곳을 거점으로 진을 쳤던 이유이다. 특히 부평에 소재한 애스컴의 미군클럽에서 수많은 국내밴드들이 활동하면서 미군들이 좋아하는 다양한 음악장르가 실연되었다. 전국에 소재한 미8군 클럽무대에서 한국 음악인들은 음악성을 배양했다. 특히 부평 애스컴을 통해 인기와 음악실력을 배양한 걸밴드들은 60~70년대에 일본, 동남아, 미국 등 해외에 진출하며 한류의 우수성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향상된 음악성을 바탕으로 한국대중음악은 질적 성장을 이루며 록, 팝, 포크, 댄스, 발라드, 힙합 등을 거쳐 오늘날 K-POP의 토대를 마련하기 시작했다. _ p.104 〈1960년대 인천의 상황과 대중음악〉
1970년대 대한민국은 박정희 군사정권, 유신체제에 의해 억압된 상태로 대중문화의 검열이 극심했던 시대였다. 음악적으로는 포크, 록, 소울, 발라드 등의 장르가 크게 확대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문화에 대한 금지와 규제가 강할수록 하고 싶은 이야기와 던지는 메시지는 더욱 많아지는 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1970년대는 권위주의 체제와 억압에 대응해 대중음악도 장르나 스타일 면에서 더욱 다양하게 뻗어갔다. _ p.169 〈1970년대 인천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단서〉
인천의 1980년대는 직할시 승격과 함께 찾아왔다.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더욱 강화된 수출입공단 관련 정책으로 수출 관련 산업은 인천항이라는 입지조건을 끼고 발전했다. 꾸준히 건설되어온 동인천역 주변의 지하도들은 서로 연결됐고, 1980년대 말 민자 역사가 완공됐으며 인천백화점이 개점했다. 동인천 지역은 꾸준하게 최고의 번화가로서의 위용을 과시했다. (중략) 1980년대 인천의 대중음악 씬을 돌아볼 때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수많은 록밴드, 그 가운데서도 헤비메탈 밴드들의 활동 거점이 되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새롭게 개발된 관교동 일대와 동인천역 주변을 중심으로 자신들만의 영역을 구축했으며, 이는 국내 록음악계를 통틀어 보더라도 가장 독특한 움직임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커다란 파장을 만들어냈다. _ p.206 〈1980년대 인천의 상황과 대중음악〉
1990년대로 들어와 인천은 행정구역 면에서 가장 먼저 많은 변화와 확장을 거듭하게 되었다. 일단 1968년부터 이어져왔던 4개 구(중구, 동구, 남구, 북구)가 인천 비중심지역의 택지 개발과 주거 지역의 건설, 그리고 인구의 유입과 증가로 인해 구 자체의 분화와 동별 분화가 더 가속화되었다. (중략) 문화적으로는 인천 지역의 관 주도 문화예술 행사의 중심공간이 주안동(특히 2001년 철거된 인천시민회관)에서 남구 관교동을 이웃에 두고 남동구 구월동에 건설된 인천광역시문화예술회관(1994년 건립)으로 서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는 점을 이 시기의 가장 주목할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건물은 당시 시립 문화공간으로는 최대 규모였다는 것에서도 인천 문화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의미는 건물 주변 지역 상권의 발달로 인해 1985년 인천광역시청이 현재의 위치로 이사한 이후에도 여전히 강세를 지키고 있던 경인 전철역사 주변 지역(동인천역, 제물포역, 주안역)의 문화적 활력이 1990년대 중반부터 서서히 감소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대신 문화회관 주변을 양쪽으로 감싸고 있는 관교동-구월동 지역으로 인천의 젊은이들이 문화적 향유 장소를 옮기게 되면서 인천이라는 도시의 활력도 그 틀을 달리하게 되었다. _ p.236 〈1990년대 인천의 상황과 대중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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