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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하 회고록

황진하 회고록

: 나는 황희 정승 21대손 파주 토박이다

[ 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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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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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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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2년 01월 06일
쪽수, 무게, 크기 400쪽 | 784g | 153*224*30mm
ISBN13 9788996649830
ISBN10 899664983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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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 정승 21대손

나는 파주 본토박이다. 1946년 8월 25일,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 20번지에서 평생교육자로 살아온 아버지 황인적과 어머니 윤한영의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본관은 장수이고 방촌 황희 정승 21대손이다.

자유로를 따라 임진각을 가다 보면 황희 정승이 낙향하여 지낸 반구정이 임진강 변에 있다. ‘갈매기를 벗 삼아 지낸다’라는 뜻을 가진 반구정으로부터 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내가 태어났다. 장수 황씨 문중이 황희 정승 전대부터 파주에 자리 잡았으니 줄잡아도 700년가량 대대손손 살아온 셈이다.

어머니는 나를 가진 후 호랑이 꿈을 꾸었다. 어느 날, 장독대에서 일하는데 호랑이 새끼 한 마리가 앉아 있다가 슬그머니 다가왔다고 한다. 어머니는 다가오는 새끼 호랑이가 마냥 귀여워 품에 안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나를 가진 직후에 꾼 꿈이어서 어머니는 태몽이라 여겼고, 너무도 생생한 꿈이기에 아들이 태어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머니는 이 꿈이 상서로워서 태교에 특별히 신경을 썼다. 내가 3성 장군을 거쳐 정치인이 된 것도 어찌 보면 운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배고팠던 어린 시절

내가 다섯 살 되던 해에 6·25 전쟁이 일어났다. 우리 가족은 강 건너 김포로 피난을 갔는데, 피난길에 내가 도통 걸으려 하지 않아서 어머니, 아버지가 교대로 업어야 했다고 한다. 누나는 지금도 내가 부모님 등에 찰싹 붙어 다닌 이야기를 한다. 너무 어렸을 때라 기억은 희미하다. 하지만 피난살이 중 또렷하게 기억나는 것이 있는데, 너무 배가 고파 힘없이 축 늘어져 지내야 했던 것과 돼지우리 같은 움막에서 웅크리고 추위에 떨던 일이다. 3년간의 긴 전쟁이었으니 내 또래의 어린 시절은 무척 고달팠다. 분단 접경지역에서 태어난 탓에 전쟁을 고스란히 겪어야 했던 내 어린 시절은 항상 추운 겨울과 같이 을씨년스러웠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9월 28일에 서울이 수복되고 국군과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하자 우리 가족도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때 아버지가 파주시 광탄면에 있는 용미초등학교의 전신인 용미분교의 교장을 맡게 되면서 우리는 금촌이나 문산이 아닌 광탄면 용미리에 자리를 잡았다. 지금은 용미리가 금촌과 가까운 거리지만 그 시절에는 아득한 거리였다. 외딴곳에 뚝 떨어진 것 같은 막막했던 느낌이 지금도 생생하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53년,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평온을 되찾고 있던 다른 지역과 달리 파주는 크고 작은 전투가 이어지고 있었다. 휴전을 앞두고 남북이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격전을 벌이느라, 파주가 격전의 한복판에 있었던 것이다. 물자가 귀하던 시절이라 우리는 교사(??도 없이 바람을 맞으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공부해야 했다. 얼마 후에는 봉일천에 주둔한 미군들이 와서 설치한 군용텐트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어린 마음이었지만 대궐이 부럽지 않았고 미군들이 정말 고마웠다.
나는 누나와 동생들만 있어서 형이 있는 친구들이 제일 부러웠다. 집안에 형이 있는 아이들은 소나무로 만든 바퀴가 달린 나무썰매를 타고 비탈길을 쌩 하고 내려오는데 나는 구경만 해야 했다. 한 번이라도 썰매를 얻어 타려고 조바심내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난다. 아버지에게 만들어 달라고 졸라도 봤지만, 학교 일에 바쁜 아버지는 그걸 만들어줄 짬이 없었다. 형이 있는 친구들이 그렇게 부러웠고 형이 없는 게 분하고 원통하기까지 하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내 또래 어린이들의 일상 중 하나는 방과 후에 산으로 땔감을 하러 가는 것이었다. 지금이야 산에 나무가 썩어나가지만 당시에는 나무 한 다발 하려면 몇 시간씩 헤매야 했다. 허기진 배를 물로 채우고 까치집만 한 나무 다발을 지게에 지고 돌아오면서 밥값을 했다는 뿌듯한 마음에 한달음에 집으로 왔다. 젊은 세대에게는 석기시대 얘기 같겠지만 우리 세대에게는 그것이 일상생활이었다.
또한 그 시절은 하루하루 먹는 게 가장 큰 고민이었다. 지금이야 수제비가 별미지만 당시의 곡식이 떨어진 춘궁기에는 배급받은 밀가루조차 양이 적어, 새로 돋아난 쑥을 잔뜩 넣어 수제비를 만들어 먹곤 했다. 한 양재기의 쑥 수제비 안에는 고작 대여섯 개의 수제비가 들어 있고 나머지는 모두 쑥이었다. 나는 맛없는 쑥부터 먹고 맛있는 수제비를 먹는 게 순서였고 습관이었는데, 내 동생은 수제비부터 먹고 다른 사람의 수제비를 들여다보며 욕심을 내곤 했다. 나는 싫지만 수제비 한두 개를 넘겨 줄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땐 왜 그렇게 동생이 미웠는지 모른다.
한창 클 때라 돌아서면 배가 고픈 우리는 산에 올라 소나무 껍질을 벗겨 내고 속살의 달콤한 물기를 훑어 먹으면서 허기를 달래기도 했다. 그?는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배고프고 굶주렸던 시절이었다. 이른 봄에는 진달래를, 초여름에는 아카시아 꽃이 먹을거리였다. 먹을 수 있는 것은 닥치는 대로 먹고 살았다. 그래서인지 몸속에는 기생충이 늘 우글거렸다.

영어웅변대회와 담대한 준비

고등학교 2학년 때, 봉일천에 주둔하고 있던 미1기갑사단 사령부에서 주최하는 경기도내 고등학생 대항 영어웅변대회가 열렸다. 평소 영어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웅변대회에 출전하기로 마음먹고, 영어 선생님께 도움을 청했다. 김원진 선생님이 해병대에 입대한 이후에 새로 온 영어 선생님은 3학년이 아닌 2학년 학생이 왜 나서느냐며 나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영어에 자신도 있고, 오랫동안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왔다고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화가 난 나는 선생님 도움 없이 스스로 대회 준비를 하겠다고 결심했다.
어떻게 할지 며칠을 고민하던 끝에 미군 부대에 찾아가서 도움을 받아보자고 생각했다. 지금의 통일공원 자리에 미군 포병대대가 있었는데, 그곳이 문산에서 제일 가까운 미군 부대였다. 나는 무턱대고 그곳 위병소에 찾아가서 미군 장교 한 명만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보초를 서는 사람은 주로 한국인 경비원이었는데 대부분 우리 동네 사람들이었다. 사실 그들이 누구를 소개해 줄 수 있는 분들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생각으로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생길 때까지 찾아보기로 했다.
나는 부대에 들어가거나 나오는 차량을 붙잡아 세워 영어를 배우러 왔다면서 가르쳐줄 수 있는지 물었다. 하지만 모두가 신통치 않은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그러다 부대로 복귀하는 대대장 차량을 만나게 되었다. 무슨 일이냐 묻기에 영어를 가르쳐줄 사람이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대대장은 사무실로 들어갔고, 잠시 후 대대장실에서 나를 들여보내라는 명령이 초소에 떨어졌다.
오로지 영어웅변대회에 나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가득 차 있던 나는 겁도 없이 성큼성큼 부대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다시 만난 대대장은 내게 상세한 사정을 물어봤다. 설명을 들은 대대장은 나를 가상히 여겨 흔쾌히 도와주겠다고 했다. 대대장이 어딘가로 전화하자 잠시 후 미군 중위 두 명이 대대장실로 들어왔다. 대대장으로부터 무언가 지시를 받고 두 사람은 무언가를 의논하였다. 그러더니 그중 한 사람이 나에게 다가와 자신은 로버트슨 중위라고 소개하며 영어를 가르쳐 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한 달여를 매일같이 미군 부대를 찾아가 로버트슨 중위에게 영어를 배웠다. 그는 내가 쓴 문장을 고쳐주고 발음도 교정해 주었다. 손동작이나 몸동작은 물론 웅변에서 중요한 시간 배분 연습까지 도와주었다. 시간이 남거나 부족했을 때 어떻게 할 것인지도 철저하게 준비하였다.
학교 선생님에게 아쉬운 소리를 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영어 선생님에게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철저히 숨겼다.
드디어 대회 날이 되었다. 대회장에 가기 전에 예행연습을 했는데 로버트슨 중위가 잘했다고 칭찬했다. 로버트슨 중위의 헌신적인 지도로 내 영어 실력이 한 달 만에 괄목상대하게 발전한 것이다. 영어 선생님도 많이 놀랐는지 내게 어떻게 그렇게 잘하느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나는 선생님이 가르쳐 주시지 않아서 학교와 집에서 죽어라 연습했다고 말했다.
준비를 마치고 대회가 열리는 파주여상으로 향했다. 행사장에는 문산농고, 율곡고 등 파주에서만이 아니라, 동두천, 인천, 수원 등 쟁쟁한 학교에서 온 17, 8명의 발표자와 응원을 온 학생들로 가득했다.
드디어 출전한 연사들이 모여 발표 순서를 정하는 순서 뽑기 추첨을 했다. 나는 7번을 뽑았다. 행운의 숫자를 뽑았다는 생각에 너무나 기뻤다. 나와 함께 갔던 3학년 선배 두 명은 각각 4번과 11번을 뽑았다. 선생님은 내 손에 있는 7번 쪽지를 달라고 하더니 대신 4번 쪽지를 건네줬다. 그리고 올해는 선배에게 양보하고 내년의 기회를 보라고 했다. 나는 선배들만 챙기는 선생님의 처사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섭섭함을 넘어 화까지 치밀어 올랐다.
순서가 앞당겨졌기에 더는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집중하려고 애를 썼다. 마침내 내 차례가 왔다. 발표 시간은 7분씩이었다. 나는 준비한 대로 차근차근 말을 이어갔다. 처음엔 긴장이 되어서 원고를 외운 대로 발표했는데 몇 분이 지나자 탁자에 놓인 시계바늘이 눈에 들어올 정도로 여유가 생겼다.
심사가 끝나고 순위 발표가 시작되었다. 나는 내가 아무리 미국 사람한테 직접 배웠다고 해도 시골 학교 학생에 불과했고, 워낙 기라성 같은 선수들이 참가했기 때문에 입상은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다. 3위에 이어 2위를 발표하는데도 내 이름이 없었다. ‘최선을 다해 준비했지만 입상은 못했구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지막 최우수상 발표에 “황진하”라고 내 이름이 불렸다. 대회에 출전한 일류학교 아이들 때문에 잔뜩 주눅 들어 있던 내 어깨가 쫙 펼쳐지면서 가슴이 벅차올랐다. 나는 수상 소감을 얘기하면서 영어를 배우게 된 계기를 준 아버지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했다. 행사장에 와 있던 아버지는 기분이 무척 좋았는지 그날 얼큰하게 취해 집으로 돌아왔다.
표창과 함께 부상으로 커다란 트랜지스터라디오를 받았다. 기분이 날아갈 듯했다. 하지만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라디오가 공부에 방해된다고 생각한 아버지가 라디오를 없애기로 했기 때문이다. 나는 기쁘고 자랑스러웠기에 반대했지만, 결국 아버지의 뜻을 따라야 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라디오를 어떻게 처분할지 고민하는 며칠 사이에 집에 도둑이 들어 라디오를 훔쳐가 버렸다. 아버지는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좋은 일이라며 오히려 기뻐하셨다. 상을 탄 게 중요하지 라디오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면서 말이다. 나는 아버지 말씀에 동의할 수가 없었다. 보통 라디오가 아니라 내 노력의 산물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지금도 성심을 다해 영어를 가르쳐준 로버트슨 중위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내 친구 이재욱

우리 집안은 대대로 교육자 집안이었다. 할아버지를 비롯하여 아버지와 친척 대부분이 그러했고, 작은할아버지는 파주 교육청의 초대 교육장을 지냈다. 가족들은 당연하게 내가 교육자가 되길 원했다. 특히 어머니는 내가 사범대에 가서 집안 전통을 이어가기를 간곡하게 권유하였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아버지가 우리 일가인 황인모 중위(육사 10년 선배이기도 하다)의 결혼식에 다녀오시더니 내게 육군사관학교 가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결혼식 때 황인모 중위의 반듯하고 남자다운 모습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지금껏 사범대학교에 진학하는 것만을 생각했는데 아버지가 처음으로 다른 곳을, 그것도 사관학교를 추천한 것이다. 아직 결정할 시기는 아닌지라 생각해 보겠다고 대답했다.
우연도 겹치면 필연이라 했던가. 외사촌인 윤용섭 형이 명문대학교 시험에 합격했는데 의붓어머니가 학비를 대주지 않자, 고민하다 고모 댁인 우리 집에서 한동안 지냈다. 외사촌 형은 마지막으로 공부한다고 결심한 후 사관학교 시험에 붙어서 입학을 하게 되었다. 형은 우리 집에서 지내는 내내 사관학교의 장점을 나열하면서 나와 부모님을 부추겼다. 결국 나는 형의 얘기에 넘어갔고 사관학교에 가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목표는 사관학교로 잡았지만, 선생님도 부족해 제대로 공부하기 어려운 시골 학교에서 과연 합격할 수 있을지 고민이 되었다. 그때 이재욱이란 친구가 그 무엇으로도 갚지 못할 큰 도움을 주었다.
우리 집안과 재욱이네는 조상 대대로 바로 옆집에 살았다. 6·25가 났을 때는 피난을 갔다 온 후 마정초등학교 4학년 때 다시 만나게 되었다. 나와 이재욱은 그때부터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중학교에 입학할 때는 이 친구가 3등을 하고 나는 2등을 해서 나란히 문산중학교에 들어갔다. 이재욱은 중학교 3학년 가을에 서울로 전학을 갔다. 서울로 전학을 간 후에도 시간이 날 때마다 나를 만나러 문산으로 오곤 했다. 그는 당시 명문이던 경복고등학교에 들어갔고 문과를 선택했다.
나는 시골 학교에 다니는 신세를 한탄하며 어떻게 해야 사관학교에 갈 수 있는지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다음 주말이 되자 그가 종이뭉치를 들고 찾아왔다. 바로 경복고등학교 모의고사 시험지였다. 자기 공부하기에도 바쁜데 내 처지를 생각해서 이과 모의고사 시험지를 구해 온 것이었다.
그는 내게 한 번 풀어보라며 시간을 재어주었다. 나는 학교에서 늘 90점이나 100점을 맞았기 때문에 자신 있었다. 그런데 문제지를 보는 순간 앞이 깜깜했다. 대부분이 모르는 문제였던 것이다. 제대로 풀 수 있는 문제가 별로 없었다. 문제를 풀고 나니 더 걱정이었다. 경복고의 모의고사도 이렇게 어려운데 과연 사관학교에 갈 수 있을지 자신감이 사라졌다.
이재욱이 학교에 가져가서 채점을 했는데 23점 나왔다고 해서 나는 낙담했다. 그런데 친구의 말은 의외였다. 자기 학교 평균이 19점이라는 것이었다. 경복고등학교 평균보다 훨씬 낫다며 용기를 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그 이후로도 매주 모의고사 시험지를 가지고 와서 함께 공부했다.
지금 생각해봐도 이 세상에 그런 친구는 어디에도 없을 것 같다. 고등학교 그 바쁜 시기에 주말마다 시골에 있는 친구를 찾아온다는 것은 뜨거운 우정이 아니라면 생각할 수도 없는 대단한 일이었음이 분명하다.
육군사관학교는 일반대학교 시험보다 이른 10월에 보는데 걱정했던 것과 달리 단 한 번의 시험으로 합격했다. 시골 학교에 다니는 내가 단번에 붙었다는 게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릴 정도로 믿기질 않았다.
얼마 후 일반대학 입시일이 되었다. 나는 좋은 연필 몇 자루를 사서 이재욱에게 전해주며 시험을 잘 보라고 응원했다. 공부를 썩 잘하던 그는 서울상대에 입학하였고 후일 한국은행 부총재보까지 역임하게 되었다. 이재욱은 내가 준 연필에 대한 추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고민이 많았던 그 시절에 열과 성을 다해 도와줄 수 있는 친구가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운아였다. 돌이켜보면 내가 육군사관학교라는 인생의 커다란 첫 관문을 지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섬세한 교육 철학과 넓은 이해심, 그리고 친구 이재욱의 덕이었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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