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의 2대 교주인 최시형이 정부의 탄압을 피해 태백산 등 여러 곳에서 피신 생활을 했는데, 이곳 국사봉 서남쪽 끝자락에 있던 가섭암에서도 숨어 지냈다고 한다. 1898년 6월 최시형이 체포되어 사형당했는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늦가을, 최시형으로부터 접주 임명을 받은 김구가 피신 생활을 하다가 끝내는 마곡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루 종일 걸어서 마곡사 남쪽 산꼭대기에 오르니, 해는 황혼인데 온 산에 단풍잎은 누릇누릇 불긋불긋하였다. 가을바람에 나그네의 마음은 슬프기만 한데 저녁 안개가 산 밑에 있는 마곡사를 마치 자물쇠로 채운 듯이 둘러싸고 있는 풍경을 보니, 나같이 온갖 풍진 속에서 오락가락하는 자의 더러운 발은 싫다고 거절하는 듯하였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저녁 종소리가 안개를 헤치고 나와 내 귀에 와서 모든 번뇌를 해탈하고 입문하라는 권고를 들려주는 듯하였다(.『 백범일지』 151쪽)
김구는 마곡사에 도착했을 때의 풍경과 심정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위 글은 마치 어느 수필집의 한 구절같이 유려하다. 비록 소설가 춘원의 손을 거쳐 나온 문장이라지만, 김구의 심사가 잘 나타난다. 필자가 김구의 자취를 찾고자 마곡사에 간 것이 11월 어느 날 오후 4시경이었다. 120년 전 김구가 왔던 시각도 비슷한 때였다. 며칠 전 내린 눈으로 남아 있는 단풍도 잎이 누렇게 바래 있었다. 김구가 느꼈을 쓸쓸함이 밀려왔다. ---p.37~39,「공주 마곡사-출세간의 길을 가다 」
김구의 사상이나 종교의 편력이 아무리 복잡하다 해도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유교 사상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 젊은 날에 관서의 유학자인 고능선(高能善, 1842~1922)을 만난 것이 그의 운명을 갈랐다. 김구는 자신이 그를 만난 것은 “젖을 주리던 아이가 젖엄마를 만난 것과 같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고능선의 학맥은 화서학파華西學派로 이어진다. 호는 후조後凋이다. 그는 1880년대 후반에 3년간 강원도 춘성군 가정리의 가정서사柯亭書舍에서 성재省齋 유중교柳重敎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화서학파 안에서 그리 두드러진 인물은 아니었다. 그 무렵 고능선은 유중교의 집안 조카인 의암 유인석을 만났다. 고능선과 유인석은 동문수학을 한 동갑내기로서 그 사이가 자별했다.
고능선이 어떤 인연으로 춘천을 찾아갔는지는 알 수 없다. 1893년, 그러니까 50세가 넘은 초로에 고능선은 안중근安重根의 아버지인 안태훈安泰勳의 초청으로 황해도 신천에 정착하여 청계동에서 학동을 가르치고 있었다. 이 무렵에 김구는 황해도 팔봉 접주로 동학농민전쟁에 참가한 뒤 안태훈의 주선으로 청계동에 피신하러 가면서 안태훈을 통하여 고능선을 만났다. 김구의 충의를 들은 고능선도 그를 각별히 아꼈다. 이때 김구는 고능선에게서 『화서아언華西雅言』과 『주자백선朱子百選』을 배웠다. 그 뒤 안태훈 일가와 종교적 문제로 갈등하다가 단발령을 계기로 고능선은 청계동을 떠났다. 고능선은 김구를 손주사위로 삼을 생각을 할 만큼 그를 사랑했으나 인연은 거기에서 그쳤다.
고능선은 김구에게 이제 청나라의 복수 전쟁이 곧 일어날 것이니 이때를 이용하여 국모를 죽인 일본에게 항전할 의병 활동을 권고하면서, “나라가 망하는 데도 신성하게 망함과 더럽게 망함이 있는데 우리나라는 더럽게 망하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조국의 미래를 걱정하며 서로 붙잡고 울 때도 있었다. ---p.81~83,「춘천 가정리 유인석 묘소-존경과 그리움의 여정」
쇠실마을 주민들은 마을 입구의 도로를 수리하고 솔문을 세워 김구를 환영했는데, 당시 국민학교 2학년생 김경회는 가가호호 쌀을 걷어 음식을 장만했다고 회고했다. 김구는 은거 당시 식사했던 바로 그 마루에서 음식을 대접받았다. 김광언은 이미 사망했고, 7세 때 김구가 글공부하던 자리에서 놀았다는 여성과 김판남이란 주민만이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김구는 주민들에게 휘호를 써 주면서 감사의 뜻을 전달했다.
한편 김구는, 자신이 48년 전 쇠실마을을 떠날 때 붓 주머니를 선물했던 선계근이 생각났다. 다음은 『백범일지』의 내용이다.
그중에 또 잊지 못할 한 가지 사실이 있다. 다름 아닌 48년 전 동갑되는 선씨 한 사람이 있어, 나와 격의 없이 지내다가 내가 그 동네를 떠날 때, 그 부인의 손으로 만든 필낭筆囊 하나를 작별 기념으로 내게 주었던 일이 눈에 선하다. 그 선씨에 대해서 물으니 “선씨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그 부인과 가족은 보성읍 부근에 거주합니다. 그 노부인 역시 옛일을 잊지 않고 지금 가시는 보성읍으로 마중 나온다 합니다.”고 소식을 전했다. 그날 그 동네를 떠나 보성읍에 도달하니, 과연 그 부인이 전 가족을 거느리고 마중 나온 광경은 참으로 감격에 넘치었다. 만나는 자리에서 나이를 물으니 나와 역시 동갑이라, 과거사를 잠깐 토론하고 헤어지는 예를 마치었다.
『백범일지』를 읽다 보면 감동적인 장면이 한둘이 아니지만, 필자는 이 대목이 가장 인상적이다. 40여 일 남짓 머물다 떠나는 생면부지 낯선 타지인에게 정성스럽게 만든 붓 주머니를 이별의 선물로 건네준 선씨 부부의 따뜻한 마음, 그리고 22세 꽃다운 나이 때 만난 동갑내기들이 48년이 지나 70대 노인이 되어 다시 만났을 장면이 떠올라서다. “그 부인이 전 가족을 거느리고 마중 나온 광경은 참으로 감격에 넘치었다”라는 짧은 구절이지만 서로에게 얼마나 가슴 벅찬 순간이었을까. 이들을 비롯한 쇠실마을 주민들이야말로 김구를 민족의 지도자로 키워준 수많은 민초民草들이 아닐까. ---p.187~189,「보성 김광언 가옥-쇠실마을에서 추억에 잠기고 」
김구가 전주를 다시 찾은 시기는 1949년 봄이다. 환국 후 김구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부여잡고 살았다. 임시정부의 주석으로 환국했으니 당연한 일이었으나, 그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삼팔선을 경계로 미소가 남북한을 분할 점령하여 각기 군정을 실시하고,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 신탁통치를 결정하여 추진하려는 굴욕적인 상황이 도래하였다. 임시정부나 김구의 입장에서 보면, 제2의 독립운동을 벌여야 하는 상황이 온 것이다.
민족의 ‘자주독립과 통일 민주국가’ 수립을 위해 목숨을 바쳐 왔던 김구이고 보면 해방 정국은 또 다른 고뇌와 고난의 시기였다. 그래서 김구는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설치하여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나아가 민족분단이 뻔히 보이는 단독정부 수립 노선에 반대하여 남북협상을 통한 통일 민주국가 건설에 온갖 노력을 경주하였다. 하지만 김구의 뜻과는 달리 남한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곧이어 북한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성립하였다. 남북 국토 분단에 기반하여 각기 다른 체제의 정부가 만들어져 민족 분단이 현실로 나타났다. 김구가 우려하고 걱정하던 일이 기어코 일어나고 말았다.
민족 분단국가는 김구로서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나라였다. 낯설고 물선 수만 리 이국땅에서 풍찬노숙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때에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걱정되는 일은 또 있었다. 민족 분단은 필연코 민족 상쟁의 비극을 초래한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일만은 결코 일어나선 안 되기에 김구의 마음이 바빴다. 좌절된 남북 통일정부 수립의 필요성을 동포들에게 다시금 전파하고, 자신을 따르는 한국독립당 동지들을 격려하기 위해 재차 지방 순회에 나섰다.
---p.260~261, 「전주-호남제일성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