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1997년 02월 2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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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271쪽 | 153*224*20mm |
ISBN13 | 9788980384228 |
ISBN10 | 898038422X |
발행일 | 1997년 02월 2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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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271쪽 | 153*224*20mm |
ISBN13 | 9788980384228 |
ISBN10 | 898038422X |
1. 저자의 죽음 2. 작품에서 텍스트로 3. 텍스트의 즐거움 4. 강의 5. 대담 6. 심의 7. 롤랑 바르트의 주요어 20개 8. 지식인은 무엇에 유용한가? 9. 롤랑 바르트 연보 |
시인의 꿈은 무엇일까? 건조한 문장으로 정리해 보자면 이렇다. 언어가 표현할 수 없는 지점을 언어로 말하기. 황현산 선생님은 더 멋진 문장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시는 사람들이 보았다고 믿는 것을 명백하게 볼 수 있을 때까지 저를 지우고 다시 돋아나기를 반복하며, 진실한 것이건 아름다운 것이건 인간의 척도로 파악하기 어려운 것에까지 닿으려고 정진하는 시의 용기와 훈련은 우리가 상상했던 것이 이 세상의 것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지극히 절망적인 순간에 그 절망을 말하면서까지도, 포기하지 않는다. 시는 포기하지 않음의 윤리이며 그 기술이다. "(『잘 표현된 불행』, 7쪽) 시의 윤리는 언어의 한계 지점에서 포기하지 않는 기술에 달렸다. 그렇다면 어째서 시인은 언어로 언어 바깥을 상상하는 것일까? 롤랑 바르트의 후기 저작은 시인의 꿈을 이론적으로 명료하게 짚어주고 있다. (물론 지금에 와서 보니 황현산 선생님의 문장은 일부 독자들을 오해하게 한다. 시는 그렇게 멋있지 않다. 인용문에서 시는 숭고한 인간의 알레고리로 보인다. 하지만 시는 또 한편으로 게릴라이며, 매복한 군사이고, 노회한 책략가이다. 시는 정의와 아름다움으로 자기를 포장하려는 선의까지 기습하여 발가벗겨 버린다. 왜 선생님은 시를 저리 선량한 인간으로 묘사하셨을까? 그 무의식이 문학은 우리편이어야 한다는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는 아니었을까?)
롤랑 바르트의 「텍스트의 즐거움」은 형식부터 흥미롭다. 글은 일부러 체계성, 위계성을 깨뜨리고 소제목을 알파벳 순으로 나열하여 제시하고 있다. 소제목 아래에 있는 글도 단락과 단락 사이에 유기적 연결이 약화되어 있어서 글들이 파편처럼 보인다. 이러한 형식은 나중에 『사랑의 단상』에서도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독자는 어디를 먼저 읽어도 상관 없다. 각각의 글들은 모두 롤랑 바르트의 사유로 들어가는 문이 된다. 입구와 출구가 따로 없다. 롤랑 바르트는 독자가 단순히 텍스트를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 '쓸 것'을 요구한다. 그는 정전으로 신성화된 '작품' 대신 유희의 대상인 '텍스트'를 옹호한다. 작품의 담지자, 소유자, 아버지, 권위자가 된 '저자' 대신에 텍스트에 볼모로 잡혀 있고, 의미망 중의 하나가 되어버린 '필사자'를 선호한다.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고 언표된 의미를 확정하는 '읽는 텍스트'가 아니라 텍스트의 언표행위, 생산성을 통해서 다시 서술하는 '쓰는 텍스트'를 가지라고 명령한다. 롤랑 바르트는 크리스테바와 그의 동료들인 『텔 켈』과 뜻을 함께 했으며, 데리다의 사유를 받아들여서 후기구조주의와 해체주의를 적극적으로 문학 담론에 끌어들인다. 따라서 텍스트나 언어의 의미는 확정되지 않고 계속 미끄러지도록, 특정한 체계에 사로잡히지 않고 그로부터 탈주하도록 글쓰기를 실천한다. 그는 기호학을 받아들여서 과학적인 비평을 추구했지만, 후기구조주의와 만나면서 일반적인 기호학으로부터 일탈하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기호학을 재구축한다. 그것은 객관화, 일반화하기 어려운 방법론이지만 '탈주'의 사유 방식과 호응한다.
후기 롤랑 바르트의 문제의식은 '인간이 언어에 속박되어 있다'는 것이다. 소쉬르가 제안한 랑그/파롤 중 랑그를 책은 '언어체'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모국어를 사용하는 화자에게 랑그는 피할 수 없는 언어 구조로서 내면화되어 있다. 인간이 언어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까닭은 랑그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내일 보자.'라는 문장을 철수가 영희에게 말할 때, 'ㄴ', 'ㅐ', 'ㅣ', 'ㄹ', 'ㅂ', 'ㅗ', 'ㅈ', 'ㅏ'의 자음과 모음은 변별적으로 화자와 청자에게 인식되어 공통적인 음가로 이해된다. 철수가 발음하는 'ㄹ'과 영희가 발음하는 'ㄹ'은 엄밀하게 같지 않지만, 외국인이 들었을 때는 다르다고 할 만한 차이여도 철수와 영희 사이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둘은 언어를 추상화하여 인식하기 때문이다. 철수의 'ㄹ'과 영희의 'ㄹ'은 변별되지 않기 때문에 같은 소리로 이해되며, 'ㄹ'과 'ㅂ'은 차이가 변별적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인간의 언어는 이와 같이 몇몇 층위에서 변벌적으로 기능하는 자질들의 체계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러한 체계의 종합을 소쉬르는 랑그라고 했다. 파롤은 개별 언어 현상을 가리킨다. 철수의 '내일 보자'와 영희의 '내일 보자'는 각각이 다른 발화이다. 다만 음성적 의미적으로 그것이 같다고 보는 이유는 랑그 때문인 것이다.
문제는 랑그 자체를 모국어 화자가 자연적으로 인식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언어 능력을 타고난다. 문법을 공부해 보면, 우리가 하는 말이 이렇게 까다롭고 복잡한 것이었는지 새삼 깨닫게 되는데, 그 말은 거꾸로 문법을 공부하지 않아도 우리는 모국어를 활용하는 데에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는 뜻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부모를 비롯하여 주변 사람들과 의사소통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언어를 습득하고 언어의 변별적 자질을 자기도 모르게 내면화한다. 랑그는 그 자체로 인식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인식의 조건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주변 사람들과 소통하는 과정에서 랑그를 내면화하며 자신이 배운대로 언어를 사용하게 되어 있다. 한국에서 태어나면 한국어를, 일본에서 태어나면 일본어를 쓰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언어는 저마다 고유의 구조와 결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맹점이 존재한다. 쉬운 예로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한국어의 구조가 서술어를 문장의 끝에 위치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어는 서술어가 문장의 중간에 위치하고 목적어나 보어를 서술어 뒤에 둔다. 이로 인하여 사고 방식에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 더 어려운 예로는 우리 말로 '바보'라고 하면, 음성 기호로는 [pabo]로 표기하게 되는데, 앞의 'ㅂ'는 무성음인 반면, 뒤의 'ㅂ'은 모음 사이에서 발음하여 유성음화되기 때문이다. 외국인은 앞의 'ㅂ'과 뒤의 'ㅂ'을 변별적으로 이해하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p]와 [b] 사이에 변별적 기능이 없기 때문에 동일한 음운으로 인식한다. 우리말 모국어 화자에게는 둘 사이의 차이에 대한 인식을 갖지 못하는 맹점이 생기는 것이다. 반대로 우리에게는 명료한 차이인 'ㄷ-ㅌ-ㄸ'를 외국인이 더러 구별하기 어려워하는 까닭도 그들에게는 'ㅌ'와 'ㄸ' 사이에 변별적 차이가 식별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각자가 배운 언어에 따라서 세계를 이해하고 의미를 파악하게 된다. 언어가 일종의 감옥이 되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는 '랑그(언어체)'의 감옥으로부터 탈주하는 언어를 새롭게 발굴하려고 한다.
하지만, '언어체' 자체는 아까 살펴보았듯 언어가 성립하는 토대이자 조건에 해당한다. 이것을 거부한다는 것은 언어 자체를 거부한다는 뜻과 같지 않을까?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관습적이다. 관습은 의사소통의 노력을 줄여준다. 한국어 화자가 '그 친구는 발이 넓다.'라고 하면 듣는 사람이 한국인이라면 그 친구가 인간관계가 폭넓은 사람임을 즉시 알게 된다. 동일한 문화권에서 공유하고 있는 관용어나 속담과 같은 관습적 언어가 유용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관습적인 언어는 사회적으로 널리 통용되는 언어이며, 그 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대변하기 쉽다. 하지만 무성음 'ㅂ'과 유성음 'ㅂ'을 구별하지 못하듯, 우리는 관습적인 언어를 사용하면서 그것에 묻어 있는 이데올로기를 식별하지 못하게 된다. 그것을 일컬어 롤랑 바르트는 그의 철학적 작업 초기에 '현대의 신화'라고 했다. 롤랑 바르트는 후기에 이르러서는 푸코의 '담론' 개념을 차용하여 언어체가 권력 작용임을 분명히 한다. 그는 콜레주 드 프랑스 취임 당시 발표했던 「강의」에서는 언어가 있는 곳에서는 권력이 도처에 편재해 있는 현상을 강조한다.
우리는 언어체 안에 있는 권력을 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언어체는 분류이며, 모든 분류는 억압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르도(ordo)라는 말은, 분배인 동시에 신벌(神罰)의 선언을 의미합니다. 야콥슨은 관용어란, 그것이 말하고자 하는 것보다는 말해야만 하는 것에 의해 정의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우리 프랑스어에서는(조금은 투박한 사례이기는 합니다만), 나는 우선 하나의 행위를 발화하기 이전에 자신을 주어로 설정해야 하며, 따라서 그 행위는 나를 수식해 주는 말에 불과하게 됩니다. 즉 내가 하는 것은, 내가 존재하는 것의 결과이자 연속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항상 남성과 여성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고, 중성이나 복성은 내게 금지되어 있습니다. 또 나는 타자에 대한 나의 관계를 너, 혹은 당신에 의거하여 표시해야 합니다. 감정적인, 혹은 사회적인 미결상태는 내게 거부되어 있습니다. 이렇듯 언어체는 그 구조 자체에 의해 숙명적으로 소외관계를 연루시킵니다. 말한다는 것, 하물며 담론을 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지나치게 자주 반복해서 말하듯이 소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예속되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강의」, 121쪽)
담론이 가진 권력에서 탈주하여 새로운 유토피아를 꿈꿀 때 예속에서 벗어난다. 하지만 언어는 언어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 랑그는 인간의 인식을 조건짓고 있기 때문이다. 롤랑 바르트는 랑그를 속이는 길만이 남았다고 말한다. 그것이 관습적인 언어가 지닌 상투성을 거부하는 이상한 언어, '문학'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언어체를 가지고 속임수를 쓰는 일, 언어체를 속이는 일만이 남아 있습니다. 이 구원의 속임수, 이 도피, 이 놀라운 술책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언어의 영속적인 혁명의 그 찬란함 속에 탈권력의 언어체를 이해하게 해주며, 나로서는 이것을 문학이라 부릅니다." (「강의」, 123쪽)
문학은 언어체 바깥을 사유하는 텍스트가 된다. 롤랑 바르트에게 텍스트는 말 그대로 직물이고 짜임으로서 해체와 재구축이 자유자재로 되는 언어이다. 주체 중심의 사고방식, 권력 중심의 담론과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는 텍스트는 그 누구의 소유물도 되지 않아야 한다. 텍스트의 주권자였던 주체와 텍스트 관계가 역전되어 주체는 텍스트가 짜여지기 위한 조건에 지나지 않게 된다. 주체가 언어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주체를 이용해 스스로를 나타낸다. 필사자 개념은 자본주의적 소유 관계를 연상시키는 작가와 작품의 관계를 해체한다. 모든 문학 작품은 작가의 개성을 표현한 결과물이 아니라, 필사자가 베낀 산물이다. '상호텍스트성'이란 이를 일컫는다. 텍스트는 소유, 권력 작용을 벗어난다. 그리고 그러한 이탈의 상태를 가장 잘 나타내는 개념이 즐거움(plaisir)과 즐김(jouissance)이다.
롤랑 바르트가 즐거움을 전면에 내세우는 까닭은 쾌락만이 언어에 편재한 권력으로부터 탈주하기 위한, 장소 아닌 장소이기 때문이다. 주체 중심, 이성 중심, 체계 중심의 사고방식에 균열을 일으키는 곳이 쾌락이다. 그런데 롤랑 바르트는 즐거움과 즐김을 구별하고 대조시킨다. 두 개념은 명백하게 대립하지 않고 중첩되거나 넘나드는 경향은 있지만 바르트는 텍스트를 즐기는 두 가지 태도를 계속 구별한다. 즐거움은 텍스트를 이해하면서 해석하고, 비평하고, 문화적인 관점에서 수용하고, 알고 있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는 자아의 강화와 관련된다면, 즐김은 충격을 받고, 결여를 감지하며, 관습과 문화로 해명되지 않는 상실이며, 언어로 포착하기 어려운, 자아의 붕괴와 관련된다. "즐거움의 텍스트는 만족시켜 주고, 채워 주고, 행복감을 주고, 문화로부터 와 문화와 단절되지 않으며, 편안한 독서의 실천과 연결된다. 즐김의 텍스트는 상실의 상태로 몰고 가서 마음을 불편케 하고(어쩌면 권태감마저도 느끼게 하고), 독자의 역사적 · 문화적·심리적 토대나 그 취향 · 가치관 · 추억의 견고함마저도 흔들리게 하여 독자가 언어와 맺고 있는 관계를 위태롭게 한다."(「텍스트의 즐거움」, 61쪽)
라캉의 용어로 포착하자면 즐거움은 상징계와, 즐김은 실재계 내지는 상상계와 관계 맺고 있다. 즐거움은 의식화 할 수 있는 기쁨이지만, 즐김은 언어의 맹점에 존재하는 균열, 오로지 개별적인 실존으로밖에 체험할 수 없는 고유한 욕망의 대상인 것이다. "즐거움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지만, 즐김은 말로 할 수 없는 것(in-dicible)이거나, 혹은 말해진 것 사이 (inter-dite)에 놓여 있다. 나는 라캉(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즐김이란 말하는 주체로서의 말하는 자에게는 금지되어 있거나, 혹은 행 사이에서 (entre les lignes)만 말해질 수 있다는 점이다)과 르클레르(누구든지 말하는 사람은 그 말에 의해 즐김이 금지되며, 또는 상관적으로 즐기는 사람은 누구든지 모든 문자를, 모든 가능한 말을, 그가 찬양하는 절대적인 마멸의 경지로 사라지게 한다)의 말을 참조한다."(「텍스트의 즐거움」, 68쪽)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 지점을 맹공격한다. 주이상스를 개별적인 체험으로 가둘 때 자본주의 사회 체제에 대한 변혁 내지는 혁명의 가능성은 왜소화되기 때문이다. 이를 마르크스주의적으로 전유하여 구제하려고 했던 이론가가 지젝이다. 지젝은 주이상스를 경유한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꿈꾼다.)
기의보다는 기표의 차원을 주목하거나, 복수적 양상을 강조하고, 자유주의가 아닌 변태/뒤집음을 지속적으로 선언하는 것도 이데올로기에 오염된 담론, 권력으로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언어에 저항하기 위함이다. 바르트는 그러한 움직임이 문학에 있다고 믿었다. 기표들의 놀이로 일상적 의미를 영도로 만들어 버리는 시들(롤랑 바르트가 염두에 둔 건 말라르메였다), 환상과 꿈 같은 플롯으로 현대사회를 알레고리하면서 박살 내 버리는 소설들(롤랑 바르트가 그리 염두에 두지 않은 카프카), 그 텍스트들을 유희하면서 또 다른 텍스트를 거미줄처럼 짜내는 독자들(그 모범이 롤랑 바르트 자신이었다). 이윽고 언어를 쓰고 말하는 주체들이 사라지고 텍스트들이 생성되고 발화하고 운동하는 경지. '나'를 잊고 '상념'을 잊는 무아의 지경. 언어체와 담론의 폭력에 걸려들지 않는 속임수란 이를 뜻한다. 롤랑 바르트의 궁극적인 꿈은 문학적 담론의 편재화였던 것 같다. 탈권력의 유토피아, 언어체의 모든 지배로부터 벗어난 궁극의 자유. 하지만, 그 자유는 인간의 의식을 고문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쾌락이다. 대중은 과연 그러한 상태를 원할까?
중요한 것은 즐거움의 영역을 균등하게 만들어 실천적 삶과 명상적 삶의 거짓 대립을 파기하는 것이다. 텍스트의 즐거움은 바로 텍스트의 분리에 대항하여 행해진 권리주장이다. 왜냐하면 텍스트가 자기 이름의 특수성을 통해 말하는 것은 즐거움의 편재성, 즐김의 아토피(atopie)이기 때문이다.(「텍스트의 즐거움」, 107쪽)
한때는 무척이나 관심이 높았고 자주 언급되었지만, 요즘에 롤랑 바르트를 언급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많지 않을 것이고 그의 글을 읽는 사람도 얼마 없을 것이다. 어쩌면 유행이 지난 이의 글을 읽는 것일지도 모르고 읽어도 큰 도움이 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너무 제목이 눈에 들어와 읽게 됐고 적당히 읽을 만했다.
“신화, 기호, 텍스트, 소설적인 것의 '현기증 나는 이동 작업'을 통하여, 프랑스와 세계에 가장 활력적인 사유체계의 개척자로 손꼽히는 롤랑 바르트는, 그의 사후 15년이 지는 오늘날까지도 프랑스 문단의 표징으로, 또는 소설 속의 인물로 여전히 우리들 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그의 모든 모색과 좌절, 혹은 기쁨은 다만 그 자신에게 국한된 것만은 아닌 오늘날의 모든 전위적 사유가들에게도 공통된 것으로,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그의 문학 편력에 대한 조망은 특권적인 자리를 차지한다.
이 책 속에 옮겨진 글들은 바르트의 후기 사상을 정확하게 담고 있는 것들이다. 그의 후기 작업은 '저자의 죽음'을 그 시작으로 하기 때문에, 그것을 이 책의 첫 번째로 하였다. 그리고 '작품에서 텍스트로,' 그 다음에는 그의 후기 작업의 이론적인 틀을 제시하고 있는 [텍스트의 즐거움]과 [강의]가 실려 있다. 이 두 권의 책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그의 후기 문학 실천의 이론적 배경을 이루고 있으며, 또한 그가 생전에 출판하기를 허락한 유일한 일기인 [심의]도 여기에 실려 있는데, 우리는 이를 통해 그의 말년에 문학적 관심사가 무엇이었나를 소상하게 알 수 있다.”
편역 編譯 - 원문을 그대로 번역하지 않고 편집하여 번역하는 것
딱히 롤랑 바르트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없어 적당히(그리고 대충) 읽었지만 그의 “후기 사상”을 잘 들여다 볼 수 있(다)는 대담이 많아 롤랑 바르트가 어떤 생각과 입장이었는지 조금은 쉽게(그리고 솔직하게) 접할 수 있는 책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글이 아닌 목소리가 많이 들어가 있어 좀 더 수월하게 그에게 다가갈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많지 않아 그런 말조차 꺼낼 수 없을 것 같다. 그냥 적당하게 읽었고, 이런저런 관심 속을 살짝 채울 수 있었다.
아직 롤랑 바르트에 대해서 뭘 말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라 살짝 훑어봤다는 말이 가장 적당할 것 같다.
그러니... 당연히... 읽었다는 것으로도 충분히 만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