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일련의 상황은 마추피추의 존재가 1911년까지 망각될 이유가 없었다는 뜻이다. 스페인인들은 외지인이니까 그렇다 해도 원주민들까지 그 존재를 망각했다는 점은 커다란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완벽하게 잊어버린 덕분에 마추피추를 발견한 후에도 그 도시를 누가, 언제, 왜 만들었는지에 대한 학설이 분분하다. 아주 오랫동안 자신의 내력에 대해 철저하게 침묵으로 일관한 유적지가 바로 마추피추인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침묵이야말로 한 가지 명백한 역사적 진실을 웅변적으로 말해준다. 아메리카 정복이 제노사이드genocide, 즉 집단학살에 연유한다는 점이다. 정복전쟁, 식민시대의 가혹한 노동과 강제이주, 전염병 등 여러 가지 요인이 겹치면서 안데스의 원주민 인구는 정복된 지 50~100년 만에 10분의 1까지 급격하게 감소했다. 그토록 많은 사람이 몰살된 결과 키푸quipu라는 잉카의 매듭문자를 해독할 사람이 남지 않게 되었고, 잉카 문자는 아직도 해독되지 못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추피추의 존재와 내력에 대해서 아는 사람도 어느 순간 남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적막한 마추피추 유적은 오히려 집단학살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침묵의 웅변이라고 할 수 있다. ---p.54~55
독립 이후 100년 동안에 걸쳐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대내외적으로 수많은 시련을 겪어야 했다. 국가 형성기에 해외시장에 의존적인 경제 구조가 고착되면서, 라틴아메리카는 외부의 변화에 종속되었다. 정치 영역에서도 혼란은 지속되었다. 이런 심각한 정치적 불안과 극심한 빈부격차 등은 변화를 바라는 사회운동 세력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던 잠재적인 요인이 되었다. 결국 독립 이후 이런 사회적 모순들은 멕시코의 경우 1910년 혁명으로 폭발했고, 아르헨티나의 경우에는 시기적으로 조금 늦지만 1930년부터 만성적인 사회적 혼란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런 폭력적인 사회정치적 과정을 통해서도 라틴아메리카 경제의 본질적인 변화는 나타나지 않았다. 가격 경쟁력이 높은 1차 산물을 수출하는 라틴아메리카의 종속적인 경제 구조는 지금도 유지되고 있으며, 여전히 극심한 빈부격차와 시민들의 정치 참여를 제한하는 불완전한 민주주의 등은 여전히 라틴아메리카가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p.95
마지막으로 콜럼버스Colombus라는 이름을 살펴볼 수 있다. 콜럼버스는 이탈리아 제노바 태생의 탐험가로 원래 이름은 콜롬보Colombo였다. 그가 원래 이름인 콜롬보나 스페인식 이름인 콜론Colon이 아니라 영어식 이름인 콜럼버스로 흔히 불리는 것은,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만든 세계사를 우리가 배우고 익숙하게 받아들인 까닭이다. 라틴아메리카 대륙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라틴 아메리카 대륙도 어떻게 보면 누군가가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만들어낸 이미지를 받아들이고 이를 소비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콜럼버스라는 이름을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사가 특정 세력의 입장에서 쓰인 것이 아닌가 하는 비판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나아가 이 질문을 라틴아메리카에 대해 던져보는 것은 라틴아메리카를 보다 사실적으로 이해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p.217
라틴아메리카를 ‘혼종성의 대륙’이라고 한다. 혼종이라고 하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라틴아메리카에는 다양한 요소가 섞여 있다. 정복 이전에 아메리카 대륙에 존재하던 고유의 것, 정복 이후에 유럽에서 유입된 유럽적인 것, 그리고 노예들을 통해 유입된 아프리카적인 것들이 섞여서 새로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혼종성의 시작은 콜럼버스의 도착이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도착하면서 유럽과 아메리카가 서로 자신들의 것을 교환하게 된다.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 식물, 질병 등 다양한 것이 유럽에서 아메리카로, 아메리카에서 유럽으로 넘어가는데, 이것을 ‘콜럼버스의 교환’이라고 한다. 이후 식민지배가 지속되는 과정에서 흑인 노예들이 가지고 온 아프리카적인 것들이 서로 섞이게 된다. 이렇게 서로 다른 문화적 요소들이 끊임없이 교환되면서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낸다. 물론 이 과정이 평등하고 자의적이지 못한 폭력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었지만 말이다. 이러한 혼종성을 통해 아메리카 대륙은 문화적 다양성을 잘 보여주게 되었다. ---p.220~223
라틴아메리카에서 커피 수확에 참여하는 인구는 8,000만 명에 달하고, 이는 라틴아메리카 전체 인구의 10퍼센트를 상회하는 숫자이다. 특히 라틴아메리카 내에서 20여 개국만이 커피 생산에 참여하고 있음 을 감안한다면, 이들의 존재는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다. 앞에서 살펴본 커피뿐 아니라 라틴아메리카에서 커피 생산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이유이다. 더욱이 커피 소비가 일상을 넘어 도무지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폭발적으로 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라면, 우리 일상의 삶이 라틴아메리카에서 커피 생산에 참여하는 이들의 삶과 결코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지리상의 거리뿐 아니라 커피의 생산과 소비라는 양극단에 각각 위치하지만 서로의 삶과 삶이 커피를 통해 긴밀하게 엮여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p.260
마지막으로는 카니발의 이중성에 대해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과연 카니발이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브라질 사회에 긍정적인 면만을 남기고 있느냐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화려한 카니발의 그림자에 가려진 것들 중 대표적인 것이 브라질의 빈부격차이다. 지표상으로 아직도 우리나라보다 빈부격차가 훨씬 극심함에도 불구하고, 제3자 입장에서는 리우에서 중계되는 카니발을 보면 마치 브라질은 인종차별이 없고, 빈부격차를 떠나 모든 사람이 어울려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인종 민주주의 국가라는 착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실제로 카니발을 통해 벌어들인 막대한 수익금이 열심히 움직이는 혼혈인과 흑인들에게 돌아가지 않고 삼바스쿨을 장악하고 있는 백인들에게 돌아가는 일이 만연하다. 역으로 카니발이 브라질 사회와 문화가 안고 있는 모순에 가림막을 씌우고, 이를 정치적인 의도로 이용하려는 백인 집단들과 일부 상위계층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이용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성찰해봐야 한다.
---p.334~3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