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는 지정학적·전략적으로뿐 아니라 교통이나 경제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어, 동아시아 국가들은 만주를 차지하기 위해 역사적으로 치열한 각축을 벌였다(박선영, 2001: 155~159). 따라서 만주에서 발생한 문제는 단시간에 온전히 해결될 수 없고 상황에 따라 여러 나라의 우호 관계를 깨뜨릴 수 있으므로, 세계사적으로 국제분쟁의 씨앗이 심긴 곳, 언제든 동아시아와 세계의 평화를 위협할 수 있는 곳, 아시아의 화약고, 제3차 세계대전의 전쟁터 등으로 이해되었다. --- pp.21-22
IPR을 운영하는 목적은 아시아·태평양 지역 국가의 상호 이해와 친선을 증진시켜 평화로운 관계를 공고히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약소국의 관점에서 보면 IPR이 내세운 의도는 현실과 부합되지 않았으며, 그들은 IPR이 감추고 드러내놓지 않는 내적 이익이 있다고 보았다. 당시 중국에서는 “제국주의의 대변자”, “제국주의자에 영합하는 주구”(劉馭萬, 1932: 1)라며 IPR을 비난했고, 조선은 “제국주의 편의대”, “제국주의 대변 기관”, “제국주의자의 어용 기구” 등 구체적인 이유를 들어 IPR 회의를 비판했다. --- p.53
들끓는 중국 내 여론으로 IPR 회의에 참석할 일본인이 위협을 당할 수 있다고 판단한 IPR 의장 제롬 그린(Jerome Greene)은, 당시 상하이에 체류 중인 위원만 참석하는 것은 어떤지 일본 IPR에 타전했다. 일본은 일본을 제외하고 IPR 회의를 개최하는 것은 규약 위반이라고 하면서 항저우가 위험하다면 상하이에서 개최하든가 호놀룰루에서 개최하는 것은 어떠냐고 제안하는 등 참여 의사를 강력히 밝혔다(「太平洋會議開催中止」, 1931: 193~194). 중국은 그동안 항저우에서의 IPR 회의를 준비해왔으므로, 장소를 변경해 개최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1931년 10월 13일 상하이 캐세이 호텔에서 중앙이사회를 열어, 중국의 IPR 회의 중지 제안을 철회하고 예정대로 1931년 10월 21일부터 11월 2~3일까지 상하이에서 회의를 개최하기로 합의했다. --- p.152
이런 가운데 1931년 6월 나카무라 신타로(中村震太?) 대위 살해 사건이 발생했다. 니가타현(新潟縣) 출신의 육군참모 나카무라 신타로 대위와 다른 3명이 1931년 6월 27일 군용 지지 작성을 위해 농업기사로 신분을 위장해 중국의 출입 금지구역인 다싱안링(大興安嶺) 동측 일대에서 활동하다가 잡혀 총살된 사건이다. 또한 1931년 7월 2일 중국 지린성(吉林省) 창춘현(長春縣) 만보산 지역에서 조선인 농민과 중국인 농민이 대립해 유혈 사태로 번진 만보산(萬寶山) 사건이 발생했고(Sunyoung, 2016), 만보산 사건이 와전되면서 조선에서 화교들이 공격당하는 배척 사건으로 확대되었다. 게다가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이라는 무력 점령이 이어지자, 제4회 IPR 회의에서 만주 문제를 논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 p.154
종합적으로 보면 중국은 만주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 역사를 근거로 삼지만 일본은 현상(사실)에 초점을 맞췄으므로, 문제 인식의 출발점부터 차이가 있었음을 지적할 수 있다. 중국은 주권국가로서 만주의 중동철도에 주권을 행사하고 싶어 했고, 일본은 국제법에 의존해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고자 했다(Wright, 1930a: 455). 일본은 만주가 비록 중국에 유리하지만, 일본이 만주에서 철도부설권을 갖고 이민을 통해 사회를 안정시키며 군대주둔권을 행사해 책임 경영을 한다면 양국 모두에게 이익이라고 주장했다. 중국은 일본이 만주를 내정 간섭하고, 토비를 창궐시켜 치안을 교란해 궁극적으로 중국의 발전을 저해하는 것(徐淑希, 1978: 183~184)으로 보았다. 결국 명확한 근대법적 근거 여부와 이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서 불거진 논쟁은 합의점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평행선을 달렸다. --- p.172
리튼 조사단의 보고서는 침략과 저항의 확대라는 두 가지 문제를 야기했다. 국제연맹의 중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일본은 이를 계기로 국제연맹 탈퇴를 선언하며 세계 정복의 꿈을 더욱 확대시켜갔다. 반면 국제연맹의 힘을 빌려 주권 문제를 외교적으로 해결해보려 했던 중국의 국민들은 자신들의 힘을 통해서라도 주권을 지켜야겠다는 일념으로 항일운동에 참여했다. 공산당 토벌에 주력했던 국민정부조차 시안(西安)사변과 중·일전쟁 발발이라는 위기에 몰리자, 결국 내전을 중지하고 항일운동에 주력할 수밖에 없었다. --- p.239
역사적으로 인식한 만주, 1920년대 IPR과 국제연맹이 논의했던 만주, 1945년 시점에 중화민국 외교부가 인식했던 만주, 국공내전 시기와 한국전쟁 시기에 중국공산당이 인식한 만주, 21세기 동아시아 각국이 인식한 만주 등 시대와 상황에 따라 내용은 다르지만, 전략적·지경학적 요지라는 점에서 맥을 같이했다. 동아시아 국가의 각종 프로젝트가 만주에서 진행되고 있고, 특히 대표적인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과 러시아의 신동방정책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볼 때, 과거에도 그랬듯이 만주는 여전히 글로벌한 만주로서 전략적 요충지이자 ‘변동의 핵’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만주의 세계성을 고려할 때 “만주를 장악하는 자가 세계를 장악한다”(趙?文, 1981: 7)는 말은 동아시아 정세 속에 여전히 건재를 과시하면서 우리에게 더욱더 깊이 있는 성찰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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