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의 종교혁명, 근대 초기의 정치혁명, 근대 중기의 산업혁명에 이은 근대 말기의 기술지식혁명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정통성 전쟁의 중요성을 강화하고 있다. 따라서 21세기의 개념 전쟁은 이미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개념 전쟁의 승패는 21세기 미래사의 주인공이 누가 될지를 크게 좌우할 것이다. 19세기 동아시아가 새롭게 겪어야 했던 근대적 문명표준을 개념화하기 위해서 서양 개념을 도입했다면, 21세기 아시아 태평양이 겪고 있는 복합적 문명표준의 개념화를 위해서는 고금동서를 동시에 품을 수 있는 개념이 필요하다. --- p.11, “서문 한국 개념사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찾아서”
조공은 단일위계 속에서 정체성과 문화에 기반해 정치적·경제적 관계를 맺는 행위이기도 했고, 복수위계 속에서는 동등한 외교적 행위이기도 했으며, 경쟁과 전쟁 상태에서는 전략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기민한 대처 방법이기도 했다. --- p.57, “제1장 동아시아 위계질서의 역사적 변화에 따른 조공 개념”
19세기 후반부터 1945년에 해방되기까지 한국인이 ‘독립’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에 그것은 단순한 학술적 논의나 정치적·외교적 수사에 그치지 않고, 절박하게 심정적으로 느끼고 행동과 운동으로 실행에 옮겨야 하는 도덕적·당위적 의미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 p.62, “제2장 근대 한국의 독립 개념”
동아협동체는 아시아의 해방을 위해서 일본 국내 정치·경제체제의 혁명적 변환을 요구했고, 따라서 식민지 지식인들에게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켰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조선의 민족 문제를 해결할 방법으로 공동체론의 보편적 성격을 적극적으로 해석해 수용했다. --- p.101, “제3장 지역질서로서 공동체 개념의 등장”
‘1949년’에 주목하는 이유는, 지구적 수준에서 전쟁도 평화도 없는 상태인 냉전이 구조로 정착되는 시점이면서 동시에 반핵·반전 평화운동이 전개된 연도이기 때문이다. 소련판 냉전적 인식이 북한으로 수입되어 국제 정치경제에 관한 북한적 ‘마음체계(system of mind)’가 굳어지는 과정에서 북한은 열전(熱戰)을 준비하며 평화운동에 참여했다. --- p.136, “제4장 북한의 평화 개념, 1949년”
북한의 자주 개념은 건국 초기의 자주독립 담론, 주체사상의 극단적 자주노선과 메타이론적 자주 개념을 거쳐 핵무기를 자주성의 실체로 물신화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핵무력 완성을 선언하면서 역설적으로 그동안 핵개발이 고양해주었던 정치적 효과는 반감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핵이 군사적 자주성을 부여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핵을 먹고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 p.199, “제5장 북한의 자주 개념사”
《사상계》 지식인 그룹은 4·19에 크게 감격했으나 그 감격만큼이나 4·19 직후의 사회적 혼란상에 실망했다. 이러한 실망은《사상계》가 5·16을 환영한 직접적 배경이 되었다. 이들은 박정희가 내세운 민족적 민주주의에 부분적으로나마 동의했다. 하지만 민정 이양과 군정 연장을 둘러싼 논란 속에서《사상계》는 점차 ‘혁명군인들’에게 실망했고, 한일회담과 한일협정 반대에 나서면서 박정희와 결정적으로 반목하게 된다. 이후 한국 정치에는 독재와 민주의 이분법적 구도가 한층 더 선명하게 남게 되었다. --- p.206~207, “제6장 자유민주주의의 공간”
한반도에서 연방 개념의 역사는 주로 남한과 북한 사이의 통일 논의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잘 알려진 대로 북한은 1960년대 이래 ‘고려연방제’라는 연방제 통일을 제안해왔고, 한국은 1980년대 말 이래 정부와 재야 차원에서 각각 연방적인 방식의 통일을 제안해오고 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에서는 북한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와 남한의 연합제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는 선언까지 이끌어냈다. --- p.242, “제7장 한반도에서 연방의 개념사”
최근 급성장하고 있는 중국의 인터넷 기업들이나 사물인터넷 산업의 기세로 미루어볼 때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한국이 어느 으로 네트워킹할 것이냐의 문제를 놓고 고민이 깊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구조 변환의 전망 속에서 한국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역량은, 미국과 중국 그 어느 과도 배타적이지 않은 관계를 설정하는, 다시 말해 호환성을 지닌 미래 정보화 개념을 생산해내는 일이다. , “제8장 한국의 정보화 개념”
--- pp.311~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