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베르는 콜레와 관계를 맺는 동안 그녀에게 수백 통의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 속에는 그들의 연애 이야기 외에도 플로베르의 문학관, 걸작에 대한 개념과 구조, 집필 중인 작품의 진행 과정에 관한 매우 상세한 이야기가 서술되어 있다. 특히 『보바리 부인Madame Bovary』을 집필하던 시기에 콜레에게 보낸 편지에는 작품의 착상에서부터 구조, 주제, 줄거리 등은 물론 한 문장 한 문장에 대한 작가로서의 고뇌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또한 작품을 집필한 후 목이 쉴 만큼 큰 소리로 낭독하면서 유사음이나 반복적인 표현이 있는지 검토하고 문장을 가다듬는 플로베르의 버릇도 콜레에게 보낸 편지들을 통해 엿볼 수 있다. 하지만 그녀와 헤어진 후 플로베르는 집필 중인 작품에 관해 다시는 그렇게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두 사람의 결별은 콜레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많은 아쉬움을 남긴다._16쪽
세간의 호사가들은 직간접적으로 관련 있는 인물에 의해 쓰인 자전적 소설뿐 아니라 두 연인이 나누었던 편지들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랑담에 대한 일종의 ‘증거’로 간주했다.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에 상드는 뮈세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를 삭제하고 위조했는지 모른다. 당시 사회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을 수밖에 없었던 여성으로서 자신의 명예와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뮈세와의 사랑이 결정적으로 종지부를 찍고 난 지 1년 후 상드는 자신이 보낸 편지들을 돌려달라고 뮈세에게 요청하고, 1837년 봄 이 편지들을 다시 손에 넣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아마도 사후 출간을 염두에 두었을 상드는 편지의 일부를 가위로 잘라 없애고, 편지가 쓰인 지 20여 년이 지나서는 1834년에 쓴 6통의 편지를 다시 쓰고 ‘위조’해 다른 편지들과 함께 후세에 남긴다. 이 사실은 20여 년에 걸쳐 상드의 서간집을 완간한 조르주 뤼뱅Georges Lubin이 6통의 편지가 1834년과는 전혀 다른 필체로 쓰였음을 증명함으로써 밝혀졌다. 이는 상드 사후 100여 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상드의 문체는 1856년을 기점으로 완전히 바뀌었고 이 사실은 상드가 이후 편지들을 ‘위조’했음을 밝혀내는 결정적 증거가 되었다. 이러한 뤼뱅의 ‘발견’으로 19세기 내내 프랑스 문단을 뒤흔들었던 ‘베네치아의 연인’의 진실에 대한 공방은 일단락을 맞이했다._34쪽
『잔 로즈로에게 보낸 편지들 1892~1902』에 소개된 편지들은 1892년에서부터 1902년까지 11년 동안 쓴 편지들이다. 특히 많은 편지가 오간 1892년(35통), 1893년(37통), 1894년(34통)은 부인 알렉상드린과의 마찰로 졸라가 잔과 아이들과 떨어져 지내며 그들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편지로 써 보낸 시기였다. 졸라가 잔에게 쓴 이 편지 모음집은 이들의 관계가 웬만한 소설보다 더 극적이었음을 보여준다. 이 편지들은 사랑으로 행복한 남녀를 말하기보다 사랑하는 여인과 떨어져 있어야 하는 한 남자의 고통을 말하고 있다. 뒤늦게 이들의 사랑을 알게 된 알렉상드린의 광기 어린 분노에 대한 두려움과 더불어 고락을 같이한 아내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뜨겁게 찾아온 새로운 사랑과 함께 있지 못하는 졸라의 애절한 심정이 절절히 드러난다. 이 책에 수록된 편지가 쓰이기 시작한 1892년 7월 말은 긴장이 극도에 달한 시기이기도 하다._55쪽
『제니 콜롱에게 보낸 편지』에는 20여 편의 편지가 실려 있는데, 그 가운데 같은 내용이 또 다른 편지에 그대로, 또는 개작해서 실려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네르발은 ?첫 번째 편지?의 몇 단어, 몇 문장을 바꾸어 ?열아홉 번째 편지?의 첫 부분에 재수록한다. 수신자만 상정할 뿐(제니 콜롱에게) 아마도 처음부터 끝내 부치지 못한 편지였을 가능성도 있지만 예비소설로 쓰인 것이라는 일종의 허구적인 짧은 소설, 문학 연습의 일환, 서한체 작품을 위한 문학 텍스트로 기획된 것인 양 이 ‘사랑의 편지’가 진정한 서간체 소설은 아니어도 『실비Sylvie』, 『꼬리야Corilla』, 『옥타비Octavie』, 『오렐리아Aure?lia』 등의 작품 곳곳에 각색되어 삽입되었다. 이렇게 각색된 문학 텍스트 속 편지의 수신인은 현실 속의 제니 콜롱이 아니다. 그리하여 이 ‘사랑의 편지’는 네르발의 기억 속 제니 콜롱, 그것도 상상 속에서 한없이 이상적으로 꿈꾸어진 제니 콜롱, 즉 기억의 스크린에만 현존하는 제니 콜롱에게 건네는 편지라고 할 수 있다._81쪽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의 내면의 공백 속에는 상실된 마리아의 이미지가 깊게 자리하고 있었다. 강박관념처럼 시인의 심중에 자리한 이 이미지의 근원적 의미를 현상세계에서 밝혀내는 일은 시인 스스로 내적 균형을 찾는 일이었다. 심연같은 공백을 거부하기 위해 자아와 현실을 연결시키는 일?이는 현실 속에 살아있는 마리아 찾기라는 숙제로 끝없이 집중된다. 마리아 찾기는 그 1 단계 과정으로, 미래의 아내 마리아와의 만남으로 귀결된다. 말라르메가 마리아와 친구 카잘리스에게?보낸 편지들에서는 시인이 마리아에 가까이 가는 이러한 과정과 마리아의 의미를 읽어볼 수 있다. _ 110쪽
사강과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사이에는 사랑과 우정이 섞인, 뭐라 쉽게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이 존재했다. 그들은 둘 다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로 서로를 이해했고, 짧지만 열정적으로 서로를 좋아했다. 특이한 점은 유명한 실존주의 철학자인 사르트르와 사강은 우연히도 생일이 6월 21일로 똑같다는 것이다.
사르트르에게 보내는 이 사랑의 편지는 갈리마르 출판사Librairie Gallimard에서 출간된 『나의 추억의 순간들Avec mon meilleur souvenir』이라는 수필집에도 수록되어 있고, 이 책은 또 한 권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사강과 사르트르는 30세의 나이 차이가 무색할 정도로 아주 잘 어울렸다. 사강은 처음에 이 사랑의 편지를 두 언론 매체 ≪르 마탱 드 파리Le Matin de Paris≫와 잡지 ≪에고이스트Egoiste≫에 공개적으로 기고했다. 이 편지를 읽을 당시 시력을 잃어 눈이 보이지 않았던 사르트르는 누군가의 도움으로 편지를 읽었고, 그 후 사강을 저녁식사에 초대한다. 어쩌면 잘 어울릴 수도, 기묘하게 보일 수도 있는 두 커플은 첫 번째 만남 이후 열흘에 한 번씩 규칙적으로 만나 식사도 하고 대화를 나누면서 사르트르가 죽을 때까지 우정과 사랑의 묘한 감정을 이어나간다._117쪽
플로베르는 인류에게 희망을 건다는 것이 어리석은 것이라고 말하며, 특유의 회의적이고 자조적인 태도를 보인다. 상드에게 ‘민중’에 대한 순진한 환상 따위는 잊으라고 충고한다. 파리코뮌을 이끌었던, 스스로를 ‘민중’의 대변인이라 일컬었던 폭도들이 결국 파리의 민중으로 하여금 그토록 처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한 것에 대한 분노이다. 그들은 앞뒤 가리지 않고 무조건 그들의 생각을 밀어붙인 것이다. 그리고 정작 그 모든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 것은 민중이었다. 플로베르는 그런 그들과 그들을 따르는 자들을 ‘우매한 민중’이라 칭한다. 그리고 민중이란 어리석은 존재이고, 오직 소수의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 사회는 다스려져야 한다는 플라톤Platon의 논리를 주장한다. 플라톤은 자신의 책 『국가Polis』에서 국가는 정치가가 아닌 철학자에 의해 통치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다수의 우매한 민중도 사리사욕에 눈이 먼 정치가들도 아닌, 생각하는 철학자들이 나라를 통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상드에게 민중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라는 환상에서 깨어나라고 말한다. 플로베르에게 그것은 과학도 이성도 아닌 집단적 감성과 종교적 ‘은총’ 같은 무의미한 것일 뿐이다. 그는 신앙이 아닌 과학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마침내 상드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증오라고 소리친다. 이것은 사랑으로 민중이 주인이 되는 새 세상을 건설하려는 상드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준다. 파리코뮌의 아수라장 속에서도 그녀는 사랑의 힘을 여전히 구원처럼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어떻게 ‘민중’으로부터 동떨어져 그들의 일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무심히 바라볼 수 있느냐고 묻는다. 도대체 ‘어리석은 민중peuple’과 ‘특별한 엘리트e?lite’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오히려 그녀는 “자기중심적인 욕구만을 부추기는 학식이란 본성적으로 정직한 습성을 가진 프롤레타리아의 무지보다 못한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이른바 엘리트층이라 불리는 자들이 이 사회에 미치는 더 큰 해악을 말한다. 그리고 그녀는 “인류를 경멸해서는 안 됩니다……우리의 삶은 사랑이며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죽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라고 말하며 플로베르의 자조적이고 회의적인 생각을 반박한다. _ 129쪽
여기에서는 생존 페르스가 외교관으로 중국에 체류할 당시 가족에게 쓴 편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 편지에는 여러 개인적 메시지도 많지만, 서양인으로서 보는 동양인에 대한 시각, 발견과 성찰 등이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다. 번역된 문장으로는 생존 페르스 특유의 깊고 격조 있는 문체가 살아나는 것 같지 않아 유감이지만 내용은 전달될 수 있으리라는 점으로 위안을 삼아본다.
이를 위해 생존 페르스의 수많은 편지 중 20세기 초에 쓰인 ?아시아에서 쓴 편지?를 살펴볼 것이다. 이미 100년이 다 된 글인 만큼 그 시대의 정치 상황을 담고 있지만, 문화나 사고방식의 영역은 시대의 변동에 그리 민감하게 변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만큼 오늘날의 시각에서도 공감할 부분이 많다고 할 수 있다. 생존 페르스의 시는 진귀하고 희귀한 용어로 가득해 읽어나가기 수월치 않은 작품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의 편지에도 그런 특징이 드러나 있다. 그러나 그의 시가 그런 특성만으로 축소되어 정의될 수는 없다. 격조 높은 어법과 시세계의 자취 역시 그의 편지에서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이다._145쪽
사실 유르스나르는 자신의 사생활이 드러나는 것을 극히 꺼렸기에 생전에 편지들을 직접 정리했다. 특히 평생의 동반자였던 그레이스 프릭Grace Frick과 함께 선별한 편지들을 하버드대학 도서관에 보냈는데, 여기서 소개되는 서간집 『친구들과 몇몇 다른 이들에게 보낸 편지들Lettres a? ses amis et quelques autres』은 그중 2,000장의 편지 가운데서 300통을 간추려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출간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서간집은 작가의 내면 일기와 같은 사적 공간이므로 독자의 기대와 호기심을 유발한다. 하지만 이 책의 서문을 통해 편지 속의 유르스나르는 소심할 정도로 상세히 작품을 설명하거나 작품의 숨은 의미가 드러나도록 애쓰는 철두철미한 작가임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이 서간문에서 그녀의 사적 공간을 기대하기에는 마치 흔들린 사진처럼 모호하고 아쉽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대로 그리스 신화를 매개로 나눈 편지들이라면 작가의 내적 사유와 그 흔적을 발견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_ 157쪽
편지에서 드러나듯 지오노는 여행을 무척 싫어했고, 마노스크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의 집에서 일생을 보낸 붙박이별 같은 사람이었다. 그는 프로방스의 자연풍경과 대비되는 ‘더러운’ 파리를 평생 혐오했다. 파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은 에펠탑이 아니라 파리를 떠날 때 보는 기차역의 시계탑이라고 말한 적도 있다. 지오노는 파리라는 공간뿐 아니라 파리가 대표하는 상징 권력, 특히 문단과 출판계를 신뢰하지 않고 평생 거리를 두었다. 그는 당대의 어떤 문학운동에도 관여하지 않은 채 프로방스에 남아 독자적인 문학세계를 개척했다. 다만 이번 파리 체류에서 사귄 지드 등의 작가들과 사적인 우정을 나누었을 뿐이다.
문단의 속물적인 권력 다툼을 경멸하고 문단 정치를 멀리한 결과 지오노는 프랑스의 유수 문학상은 한 번도 받지 못했다. 1928년 그라세 출판사는 지오노의 『언덕』이 공쿠르상Le prix Goncourt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15부를 급히 인쇄해 후보작으로 제출하지만 수상에는 이르지 못했다. _ 171쪽
사르트르에게 편지는 어떤 의미였을까? 그는 전쟁 기간 이외에도 간혹 편지를 쓰긴 했지만 자주는 아니었다. 주로 여행 중에 쓰인 이 편지들의 수신인은 여자들이었고, 대개는 보부아르와 동행한 여행이었기에 그녀가 아닌 다른 ‘연인’에게 보낸 것이었다. 사르트르에게 편지의 의미는 ‘삶을 즉각적으로 옮겨 적는 일’이었다. 편지란 낯선 곳에서 보낸 자신의 하루를 고스란히 상대에게 전해주려는 ‘자발적인 작업’이었고, 그런 면에서 사르트르에게 편지는 ‘일기의 역할’을 했다. 전쟁 중에 사르트르가 보부아르에게 보낸 편지들에도 이러한 일기의 성격이 짙다. 그는 자신의 하루를 자세히 기록하고, 군대 내의 다른 병사들을 묘사하기도 하며, 『야릇한 전쟁수첩』에 전개된 사유의 단편들을 설명하며 보부아르의 의견을 구하기도 했다._180쪽
베를렌의 편지 중에서 여기서 살펴볼 출판인 레온 바니에Le?on Vanier에게 보낸 편지들은 바로 랭보와 헤어진 지 10년이 되는 1884년부터 쓰인 것이다. 그의 나이 40세였고, 그가 파리 문단으로 다시 돌아온 시기이기도 하다. 베를렌의 생애에서 랭보는 누구보다도 중요한 인물이지만 베를렌이 랭보와 교환한 편지는 많지 않다. 두 사람은 1년 반을 같이 살았으나 그 흔적은 시 작품을 통해서 문학적으로만 짐작해볼 수 있을 뿐이다. 두 사람이 같이 생활했기 때문에 편지가 별로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또한 랭보는 베를렌과 결별한 후 절필해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글을 남기지 않았고, 베를렌 역시 여러 자전적인 글이나 강연에서 둘의 관계에 관해서는 한사코 입을 다물었던 것이다._202쪽
이 둘의 첫 만남으로부터 25년이 지난 1916년, 지드가 먼저 프루스트에게 편지를 쓴다. 당시 지드는 ≪신프랑스 평론≫을 창간해 편집인으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다. 지드를 비롯, 자크 코포Jacques Copeau 등 젊은 문인들이 합세해 창간한 월간지 형식의 이 새로운 동인지는 당시 전통적이며 보수적인 주류 문단에 대항하고자 젊고 유망한 신진 작가들을 발굴해 그들의 새로운 목소리를 실음으로써 프랑스 문단에 신선한 바람을 몰고 왔다. 이후 문화부 장관이 되는 『인간의 조건La Condition humaine』의 작가 앙드레 말로Andre? Malraux나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의 초기 글들이 이 문예지를 통해 발표되기도 한다. 1911년 가스통 갈리마르Gaston Gallimard가 편집인으로 합세하면서 실질적인 운영자가 되고 ≪신프랑스 평론≫은 갈리마르 출판사의 원조가 된다. 당시 지드는 『좁은 문』의 성공으로 작가와 출판인으로서 유명세를 누리고 있었다.
반면 프루스트는 영국의 대문호 존 러스킨John Ruskin의 책 두 권을 번역하고, 문예지나 일간지 등에 다양한 형태의 에세이를 발표했다. 그러나 이렇다 할 대표적인 작품 없이 중년을 보내고 있었고, 그는 지인들에게 돈 많고 시간 많은, 글 좀 쓰는 멋쟁이 한량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자신의 삶을 담은 소설을 쓰기로 결심하고, 점점 더 심해지는 천식 때문에 코르크 마개로 모든 구멍을 막아 외부의 먼지와 소음으로부터 완전히 차단된 방에 숨 막힐 듯이 진한 향을 피워놓고, 그 안에 자신을 가둔 채 밤낮이 바뀌는 생활을 하면서 집필 활동에만 전념하기를 수년, 마침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제1권을 구성하는 『스완네 집 쪽에서Du co?te? de chez Swann』를 완성한다._225쪽
얀 안드레아는 뒤라스를 만난 후 그녀에게 수많은 편지를 쓰기 시작하고 결국 이 편지가 매개체가 되어 두 사람은 상식적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운명적인 삶을 살게 된다.
얀 안드레아가 보낸 편지들에 대해 뒤라스는 그가 보낸 편지들에 대해 “사막 같은, 삶이 존재하지 않는 죽음의 장소로부터 외치는 편지들”, “너무나 완벽하게 아름다운 외침”이라고 말한다. 그로부터 수십 통의 편지를 받았지만 뒤라스는 읽기만 할 뿐 답장을 쓰지 않는다. 그러던 중 몇 달 동안 편지가 끊기자 뒤라스는 그에게 편지를 쓴다. 뒤라스는 얀 안드레아의 편지에서 한 청년의 고통을 읽어내는데, 이는 자신 역시 고독한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얀 안드레아에게 보낸 편지에는 당시 뒤라스의 고독한 상황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_245쪽
첫 번째 편지는 1933년 앙드레 프레뇨Andre Fraigneau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프레뇨는 그라세 출판사의 편집인이자 소설가로 작가 지망생이었던 유르스나르의 재능을 일찍이 알아보고 그녀의 초기 소설들을 출판해준 남자이다. 그녀 스스로 완벽한 자유의 시기라고 불렀던 1929~1939년의 10년 동안 ‘신보다 더 사랑한 남자’로 기억될, 그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첫사랑이었다. 그리스 조각 같은 외모의 소유자였던 프레뇨는 남자만을 사랑하는 동성애자였던 것이다. 전기傳記 작가 조지안 사비뇨Josyanne Savigneau에 의하면 프레뇨는 너무 맹목적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유르스나르를 떨쳐내기 위해 자신의 그리스인 친구 앙드레 앙비리코스Andre? Embiricos를 소개시켜준다. 그리스 부호의 아들로 초현실주의 시인이자 정신분석가였던 앙브리코스는 이후 몇 년 동안 프레뇨에 대한 사랑의 상처로 괴로워하는 유르스나르를 위로해주는 치유자 역할을 한다. 첫 번째 편지는 유르스나르가 아테네Athe?nes에서 앙브리코스를 만나 시간을 보낸 후 그곳을 떠나기 전 프레뇨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 편지에는 아직 사랑이 절망으로 바뀌기 전 프레뇨에 대한 그리움이 한껏 묻어나는 젊은 유르스나르의 풋풋함이 묻어난다. 또한 이제 막 데뷔한 젊은 작가로서 출판한 소설의 반응을 궁금해 하는 모습도 살짝 드러난다. 아테네는 이 시기 유르스나르에게는 사랑과 젊음의 도시였고, 미국에 정착한 후에는 인류 문명의 탄생지이자 요람으로서 그녀의 많은 작품에 공간적 배경으로 등장하는 원형적 도시이기도 하다._2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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