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다케스 마을은 피카소나 밀로, 마티스 등 다른 많은 예술가를 매료시킨 곳이기도 하다. 맑고 푸른 하늘과 바다, 그 경계를 메운 하얀 집들, 예전과 다름없는 한가로운 거리에는 지금도 분명 미래의 거장이 될 젊은 화가가 걷고 있을 것이다. --- p.8, [달리의 집] 중에서
아틀리에 한켠에 축 늘어진 외투와 함께 걸려 있는 모자는 마치 세상을 떠나고 없는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1906년, 이 아틀리에에서 수백 미터 떨어진 장소에서 생트 빅투아르 산을 그리던 세잔은 폭풍우를 만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을 계속 그리다가 의식을 잃었고, 며칠 후 세상을 떠났다. --- p.29, [폴 세잔의 집] 중에서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르누아르가 살았던 카뉴의 꼴레뜨 저택 Les Collettes을 걷다보면 왜 그가 이곳을 마지막 장소를 정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넓은 택지에는 그가 사랑한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고 울창한 나무들에는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으며, 그리고 무엇보다 강렬한 햇살이 따뜻하게 감싸고 있음을 느낄 수 있을 테니까. --- p.32, [르누아르의 집] 중에서
고통은 지나가지만, 아름다움은 영원하다. _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35, [르누아르의 집] 중에서
르누아르는 꼴레뜨 저택을 좋아했다. 원래 올리브 밭이었던 정원에는 올리브 외에 아내 알린이 좋아하는 오렌지 나무도 많다. 그녀는 정원 가득 꽃을 키웠고 그 꽃을 꺾어 집안을 장식했다. 그것을 보면 르누아르는 몹시 기뻐했다고 한다. 지병의 요양을 겸해 르누아르는 이따금씩 문밖으로 나와 스케치를 하며 일광욕을 했다. 휠체어도 당시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그는 붓을 들지 못할 정도로 병이 악화된 상태에서도, 팔에 붓을 묶어가면서까지 제작에 열정을 쏟았다. --- p.36, [르누아르의 집] 중에서
1830년대에 들어서면서 화가들이 풍경을 스케치하러 모여들기 시작했고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간느여인숙Auberge Ganne은 찾아오는 화가들로 일종의 살롱이 되어 버렸다. 밀레 부부와 3명의 자녀도 처음에는 이 여인숙에 머물렀다.바르비종파 박물관이 된 구 간느여인숙과 함께 바르비종 마을을 찾는 관광객을 매료시키는 시설이 밀레의 집, ‘장 프랑수아 밀레 기념관’이다. --- p.56, [밀레의 집] 중에서
공원처럼 넓은 부지 안에는 색색의 꽃들이 만발한 정원과 함께 호화로운 아치가 있고, 마치 남프랑스나 이탈리아에 있는 수도원처럼 회랑식 중정이 있으며 그 중심에는 손색없는 규모의 화려한 성이 세워져 있다. 또한 방마다 디자인을 달리했는데, 기하학적인 디자인으로 꾸며놓은 방, 체스 판처럼 생긴 마루가 있는 방, 갈색을 기조로 한 방 등등, 루벤스의 손길이 구석구석 닿아 있다. --- p.69, [루벤스의 집] 중에서
이탈리아 반도 북동부에는 우르비노Urbino라는 아담한 마을이 있다. 끝에서 끝까지 15분 정도면 걸을 수 있는 작은 마을이지만, 이곳은 오늘날 대학 도시로 잘 알려져 있다. 내가 이곳 우르비노 대학에서 유학을 하던 시절, 일요일 아침이 되면 마을은 차도 사람도 거의 없었다. 그 신비한 고요 속을 걷고 있노라면 마치 르네상스 시대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했다. --- p.75, [라파엘로의 집] 중에서
파리의 생 쉴피스 성당의 예배당 벽화를 주문 받은 들라크루아는 생 제르맹 데 프레 성당 뒤에 있는 퓌르스탕베르 광장에 작업장을 새로 만들게 된다. 들라크루아가 아틀리에를 직접 설계했고 1857년에 정원이 딸린 작업장이 완성됐다. 이 아틀리에는 현재 국립 들라크루아 미술관으로 개방되고 있다. 당시 파리는 앵그르를 따르는 신고전주의와 들라크루아를 중심으로 한 낭만주의 두 파로 나뉘어 있었다. 라이벌관계였던 두 거장의 작품은 메인 전시실에서 마주보도록 전시되기도 했다. --- p.87, [들라크루아의 집] 중에서
이 중세적인 분위기로 가득한 가옥은 주위의 경치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내부는 공들인 구조의 수납가구나 계단, 창틀에서 벽지에 이르기까지 모두 모리스사의 제품처럼 개성 넘치는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 p.94, [모리스의 집] 중에서
정원을 보면 모네의 꼼꼼한 성격이 잘 드러나 있다. 백 가지가 넘는 꽃들도 개화 시기와 색을 고려해 심었다. 모네는 이 정원을 ‘내 최고의 걸작’이라 말했다고 한다. 그에게 이 정원은 거대한 팔레트였던 것이다. --- p.102, [모네의 집] 중에서
오베르 쉬르 우아즈는 파리에서 북쪽으로 3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마을이다. 고흐의 마지막 3년은 ‘기적의 3년’이라고 불릴 정도로 엄청난 양의 작품이 탄생한 시기이다. 오베르에 머물었던 10주 간 그는 수많은 그림을 그렸다. 마을 여기저기에는 그가 그린 교회나 목장이 그대로 남아 있고, 교외에는 고흐가 여러 차례 그렸던 보리밭이 마치 시간이 멈춘 듯 펼쳐져 있다. --- p.105, [고흐의 방] 중에서
라부여관은 19세기에 촬영된 사진과 비교해 봐도 거의 변하지 않았다. 어두컴컴한 계단을 통해 3층에 오르면 천창이 하나 있는 작고 검소한 다락방이 나온다. 고흐는 10주 정도 이 방에 머물렀고 이 방에서 숨을 거두었다. --- p.107, [고흐의 방] 중에서
마그리트는 평생 그렸던 약 1600점에 달하는 채색화 중에서 거의 절반을 이 아파트에서 그렸다. 그래서 이곳에는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소재가 많이 남아 있다. 마그리트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의 신기한 회화에 그려진 검은 중절모와 서랍장, 창틀이나 난로 같은 것을 이곳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 p.115, [마그리트의 집]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