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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박구리의 봄노래

직박구리의 봄노래

파란시선-0021이동
홍신선 | 파란 | 2018년 06월 22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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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8년 06월 22일
쪽수, 무게, 크기 137쪽 | 216g | 128*208*20mm
ISBN13 9791187756187
ISBN10 1187756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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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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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덕장 길에서

아침나절 읍내 버스에 어김없이 장짐을 올려 주곤 했다
차 안으로 하루같이 그가 올려 준 짐들은
보따리 보따리 어떤 세월들이었나
저자에 내다 팔 채소와 곡식 등속의 낡은 보퉁이들을
외팔로 거뿐거뿐 들어 올리는
그의 또 다른 팔 없는 빈 소매는 헐렁한 6.25였다
그 시절 앞이 안 보이던 것은 뒤에 선 절량 탓일까
버스가 출발하면
뒤에 남은 그의 숱 듬성한 뒷머리가 희끗거렸다

그 사내가 얼마 전부터 보이지 않는다
깻박치듯 생활 밑바닥을 통째 뒤집어엎었는지
아니면 생활이 앞니 빠지듯 불쑥 뽑혀 나갔는지
늙은 아낙과 대처로 간 자식들 올려놓기를
그만 이제 내려놓았는지
아침 녘 버스가 그냥 지나친 휑한 정류장엔
차에 올리지 못한
보따리처럼 그가 없는 세상이 멍하니 버려져 있다

읍내 쪽 그동안 그는 거기 가 올려놓았나
극지방 유빙들처럼 드문드문 깨진 구름장들 틈새에
웬 장짐들로
푸른 하늘이 무진장 얹혀 있다 ***


늦깎이 공부

무너진 축대 위 양귀비 붉은 꽃이 스스로 피었다 저절로 진다.

그 자리 해진 구멍이라도 남았나
살펴보면 세제로 씻은 듯 흘린 거 묻은 거 없는 허공이 천연덕스레 깊은데
내 가고 난 뒷자리는……

경전 한 페이지 사적(私的)으로 펴든 한해살이 저 풀에게도
이제 한 무릎 꺾고
방과 후 뒤늦은 나머지 공부
졸업인 듯 해야 하리. ***


물도 때로는 불길이다

서울 아파트 거실서 지내던 난 화분들을
시골집으로 데려와 마당에 내놓는다.
어리둥절 며칠 뒤 난 잎에 거뭇거뭇 흑반이 끼기 시작한다.
하나둘 예외가 없다.
긴 잎은 가운데가 갈라지고 이내 잎끝부터 마른다.
결국 실내에서 컸던 난 잎들
모두 말라 떨어진다. 지난날 강직함을 털썩털썩 내려놓는다.
자디잔 난석 틈에는 새 촉들이 솟는다.
품새의 크기와 색깔을 바꿔 밀어 올린 저 민낯들
낯선 바람과 햇볕에 근성 바꿔 어울리는
단순 적응인가 방어인가
머잖아 죽을 자리 잡는 짐승인 듯
여기 으늑한 산골 마을을 골라 나는 왔다.
귀촌은 도연명(陶淵明)이 원조지만 이 구석진 동네 아무개로 와
새참에 몇 잔 털어 넣는 막소주가
허기진 내 내벽에 홧홧한 불길로 치붙어 오르는데
저는 무엇에 허기졌는가 자질한 고랑물이 터앝의 두둑마다
흙을 머금고 위로 위로 치솟는 걸 본다.
보고 있으면 꼭 절정까지 솟구치는 불길이다.
퇴경(退京) 전 달래고 쓰다듬던 서울을 내려놓고
적응인지 방어인지
본색을 바꿔 가며 이즘 나도 새 촉들을
절정까지 푸른 불길들로 밀어 올린다. ***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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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꿈꾸는 ‘놀이’ 곧 ‘무위’의 밑자리는 어쩌면 모든 분별이 사라진 자리일 수 있다. 분별은 유위의 산물이다. 시인이 스스로 끝내 벗어나고자 하는 것, 그리고 이 세계에서 끝내 벗겨져야 하는 것은 바로 그 분별이다. 분별이 사라질 때, 차별은 차이가 되지 않고 낙차는 격차가 되지 않는다. (중략) 그래서일까, 시인은 늘그막에 찾아온 건망증조차도 반갑다. 그것은 몸이 스스로 ‘나’를 버리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나’, ‘분별하는 나’의 의식은 몸의 산물이다. 경험과 기억이 바로 ‘분별하는 나’를 가능하게 한다. 늘그막에 이른 시인에게 경험과 기억은 더 이상 고착된 무엇이 아니다. “뇌 해마의 거죽에/잠깐 잠깐 앉았다 날아가는”(건망증) 것이 되어 버렸으며, 그리하여 “툭하면 소지품들 시도 때도 없이 손아귀 밖으로 도망치고/심지어는 입안에 든 밥알들도 어어 어어라 뛰쳐나와/식탁 밑 고꾸라지듯 굴러떨어지곤 한다./각자 물건들을 그렇게 서슴없이 방량이나 시켜 줄 일밖에 없는”(이런, 나도 어치과인가) 자유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세월에는/어떤 내가 본래 나인가”(이런, 나도 어치과인가)라는 물음은 이미 대답이 내재된 질문이다. 그 대답은 ‘어떤 나’도 본래 ‘나’가 아니며, 나아가 ‘본래 나’라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그럴 때에야 고통조차도 고통이 아니게 된다. “모처럼 먹통에도 열린 내 코는 얼마나 상쾌한가./벌름벌름 취한 삶은 얼마나 황홀인가”(비염)에서처럼 고통과 취함이 다르지 않고, 닫힘과 열림이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 삶은 게다가 어렵지도 않다. 시 한 고전주의자의 독백이 명쾌하게 보여 주는 바에 따르면, 그 삶은 “저 하고 싶은 대로” 하지 않고, “남의 파리한 등줄기 찍어 누”르지 않는 것이며, “괴춤을 부여잡고 공중변소 앞인 듯/긴 줄 선 방동사니들이 어쩌랴 바로 그런 게 삶이라고/서로가 서로에게 생각 비켜 주는” 단순함에 있다. 시인의 무위는 이렇게 소박한 자리에서 시작한다.
- 한용국 (시인, 해설 중에서)
선생님의 시를 두고 이런저런 말을 꿰어 맞추는 일은 아무래도 열없는 짓이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 그것은 마치 시삼백(詩三百)을 앞에다 놓고 “나부대”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나는 저 ??시경??의 웅숭깊은 뜻을 헤아릴 지혜가 없으며, 그 수려하고 빈틈없는 꾸밈을 가늠할 시안도 없고, 옛적 사람들의 살뜰했던 하루하루와 그들의 속정을 살필 정성마저 부족하다. 그러니 나는 감히 읽을 따름이다. 읽고 또한 감히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쓸쓸해하고 안타까워하고 잠시 격분할 뿐이다. 그럴밖에. 누천년을 지나오면서 겨우 삼백 남짓 전해지는 시편들은 하늘의 무늬와 그 무늬를 펼친 법도가 이미 따로 있어 그를 애써 베끼고 옮긴 게 아니라 낱낱의 사람살이의 애틋함과 간곡함과 간혹은 구구해 보이기까지 하는 저마다의 사연들이 곧 세상의 이법이자 생의 별다를 바 없는 궁극임을 그것 스스로 입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저 없이 말하건대 선생님의 시가 바로 그렇다. 선생님의 시의 출처는 어디 외따로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집 뒤 야트막한 자드락”이나 “아침 녘 버스가 그냥 지나친 휑한 정류장” 혹은 “마을 회관 앞 느릅나무 잎눈”이나 “아파트 후문 근처 맥줏집” - 요컨대 바로 다름 아닌 “우리 동네”에 있다. “흐르는 듯 흐르지 않는” 그곳은 그런데 놀라워라, “부정에 부정을 잇댄 순행(巡行)의 끝”에 다다른 “무작정 가려던 언젠가의 바로 그 어느 곳”이면서 더불어 “겨울 세트장 한구석”처럼 “하릴없이” “적막”하고 “소슬”하기 짝이 없는 곳이기도 하다. “쓸쓸해서 더 의연”한 거기, “무너진 축대 위 양귀비 붉은 꽃이 스스로 피었다 저절로 진다”. “어쩌랴 바로 그런 게 삶”인데. 이 경이로운 “막막”함에 무슨 말을 더 얹을 수 있겠는가. 다만 ‘읊고 연주하고 노래하고 춤추면’ “그만”이다. “됐다”. “꽃 진 자리” “푸른 하늘이 무진장 얹혀 있다”.
-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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