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긍정력도 중요하지만, 자신을 냉철하게 바라보는 자기 객관력도 중요합니다. 적당한 자기 긍정력과 자기 객관력을 조화롭게, 균형에 맞게 갖춘 사람이야말로 바람직한 인재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고, 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자존감이 있다는 것은 무엇이고, 없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렇게 자신에 대해 제대로 자각하는 것, 내가 못하는 부분이나 자존감 부족한 부분을 어떻게 채우고 보완할 수 있을지 아는 것. 이런 균형 감각이 가장 중요합니다!
--- p.30 ‘자기 긍정만으로는 자존감을 얻을 수 없다’에서
자존감이 없다는 것은 ‘아직 익숙하지 않은 것일 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더 편해집니다. 마음이 가벼워지면 행동은 더 자유로워집니다.
일을 망치거나 주의를 받으면 풀이 죽거나 더 자존감을 잃게 되기도 하지만, 그걸 자신의 인격적인 문제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세요. (중략)
자존감이 없는 사람은 부정적인 부분을 더 확대해서 받아들이는 바람에 자존감을 더욱 없애는 경향이 큽니다. 그 악순환에 빠지지 않기 위해 마음을 유지하는 간단한 팁이랍니다.
익숙해지는 속도는 물론 개인차가 있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부분입니다. 익숙해지면? 다 똑같습니다. 이 ‘익숙함’을 위해 의식적으로 꾸준히 연습해야 ‘기술’을 얻을 수 있겠지요.
--- pp.32-33 ‘아직 익숙해지지 않았을 뿐’에서
처음부터 너무 높은 목표를 설정하면, 아무리 연습해도 도달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좌절을 맛보게 됩니다. 갑자기 높은 곳을 목표로 하지 말고, 작은 단계의 목표를 설정해서 달성한 뒤 마지막에 높은 목표에 이르도록 해야 합니다.
처음부터 갑자기 에베레스트 등정을 목표로 삼는다면, 그야말로 그 산은 꿈으로만 남을 확률이 높겠지요. 우선은 더 많이 자주 걷고, 팔다리가 더 튼튼해진 다음 가까운 산에 올라 조금씩 실적을 쌓아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 pp.36-37 ‘자그마한 목표를 달성해서 최종 목표로!’에서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안 돼’ 하며 우울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요구되는 것은 ‘기술’입니다. 나 자신의 인격이 부정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잘 못하는 이유는 기술이 아직 몸에 배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디까지나 기술의 문제입니다.
일은 기술로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나는 참 쓸모없는 인간이다’라는 착각에 빠지거나, 우울해지는 사태를 방지할 수 있습니다.
‘나보다 이 기술을 잘하는 사람은 없다’라고 말할 수 없다면, 좀 더 실력을 쌓아 그 기술을 내 것으로 만들면 그만입니다. 그 기술을 익히는 자체가 고통스러워서 견딜 수 없다면, 다른 분야에 가서 역할을 다하면 될 뿐입니다.
--- p.82 ‘일이란 기술을 발휘하는 장소’에서
이인증(離人症, 인격 상실감 또는 현실감 상실을 일으키는 자아장애-옮긴이)을 앓는 사람의 경우, 다른 사람과 적절한 거리를 두고 관계하지 못합니다. 무턱대고 다가와 허물없이 굴거나, 반대로 지나치게 멀리하며 서먹서먹하게 군다고 하지요. 사람과 사람 간의 ‘거리’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거리’를 이해하면 사람과의 거리에 위화감이 사라집니다. 대인관계에서 근본적인 안정감을 갖게 됩니다.
--- p.97 ‘자신과 타인의 거리에 갈등하는 《인간 실격》’에서
태어나 살아온 이래 만나온 여러 사고방식, 받아온 교육, 읽은 책, 본 영화나 연극, 들었던 음악……. 다양한 곳에서 만나온 지혜, 생각, 의견 등이 내 안에 점점 더 크게, 더 많이 담기고 있으니까요. 이런 것을 모아온 그릇이 바로 ‘나 자신’입니다.
현재의 나는 그 축적으로 인해 생겼으니까요. 그렇게 쌓인 것들 가운데 마음에 드는 것을 끄집어내고, 자신의 방식대로 해석하고 다시 밖으로 드러내 보이는 것이 나의 ‘사고’입니다.
사실 완벽히 고유한 나라는 존재는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생각’인 것입니다.
나의 생각은 누군가의 생각, 모두 다른 사람들로부터 흡수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거기에 크게 연연할 이유는 없습니다.
--- p.130 ‘풍부한 마음의 숲이 나를 풍요롭게 한다’에서
니체는 인간이 스스로 새로운 가치를 찾아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여기서 유명한 ‘초인’이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슈퍼맨 같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을 지배하려는 존재를 두지 않고, 자신의 가치를 단정 짓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치 기준을 바깥(타인)에서 찾는 게 아니라, 자기 안(자신)에 두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초인의 방식입니다.
--- p.152 ‘나는 나만이 지배할 수 있다’에서
자신이 어디로 에너지를 향해야 할지 제대로 알고 있고, 해야 할 일이 있으며 사람들의 기대를 받는다고 생각하면 살아갈 의욕이 넘치게 됩니다.
활력이 넘쳐흐르는 사람은 그런 의욕을 찾아내는 데 뛰어나지요. 자신의 에너지를 쏟아낼 장소, 활력이 향하는 곳을 귀신같이 잘 찾아내는 겁니다! 특별한 능력이 아니라, 그런 삶을 오랜 습관으로 삼아왔기 때문입니다.
--- p.162 ‘활력이 향할 곳을 찾아서’에서
마음의 심지라는 것은 온 힘을 다하고 ‘드디어 넘어섰다!’라고 생각하면서 가능한 것입니다. 눈앞의 과제나 시련에 대해 도전을 해나가고, 못했던 일을 가능하게 만들고, 무리라고 생각했던 것이 이제는 가능해졌을 때. 그렇게 약점이나 공포를 넘어서 극복한 자존감이 마음의 단단한 심지가 되어갈 수 있지요.
그렇다면 무엇으로, 어떻게 해야 ‘극복’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 감각은 본인 말고는 모릅니다. 아무리 다른 사람들이 굉장하다며 칭찬하고 북돋아도 본인이 납득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반대로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고 알아주지 않아도, 본인만은 해냈다는 느낌, 극복한 보람을 충분히 맛보는 경우도 있지요. 자존감은 본인이 기준이어야 합니다.
--- p.187 ‘마음의 심지는 ‘극복’을 통해 만들어진다’에서
자신의 외모에 대해서 특정 부위를 두고 마음에 안 든다며 싫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돌아봅시다. 다른 사람들이 내 외모의 그 부분에 대해 좋은 평가를 내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 평가 기준은 무척 획일적이고 단순하고 다양하지 못합니다.
작은 눈과 낮은 코도 충분히 매력적이며 개성 있다는 미의 기준이 인정받고, 또 그런 모습을 사랑하고 칭찬하는 사람이 있다면 외모 컴플렉스는 자연스럽게 사라집니다. 무리하게 살을 빼지 않아도 우리는 충분히 아름답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제 눈에 안경’이라든가 ‘지게를 지고 제사를 지내도 제 멋이다’라는 것은 사실 매우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잘 보인다는 것은 애정이 있다는 뜻입니다. 한 사람의 애정이 있다면 다른 많은 사람들이 내뱉는 얄팍한 평가 따위 필요 없습니다.
그렇게 말해주는 사람이 없다면 내가 말하면 그만입니다. (중략)
타인의 평가가 신경 쓰인다고 하지만, 실은 타인의 기준을 너무 중시하는 나 자신이 더 문제입니다. ‘타인의 눈은 이렇다’라고 믿고 있는 나 자신에게서 벗어난다면, 나를 둘러싼 세계는 더 아름답고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 pp.200-203 ‘다른 사람의 평가와 떨어진 곳에 행복이 있다’에서
타인의 기준에서 더 나은 나를 추구하고 그런 나에 도달하고자 집착하는 동안 진정한 나의 자존감은 더 멀어지게 됩니다. 언제나 하늘이 나를 보고 있다고 의식하고, 하늘을 기준으로 삼아 살아가면 집착에서 벗어나기가 더 쉬워집니다.
사심 없이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그 누구보다 강합니다.
그렇게 되면 어쩌면 자존감의 유무조차도 상관없어지겠지요.
--- pp.207-208 ‘나를 내려놓아 집착에서 벗어난다’에서
호흡이라는 것은 항상 새로운 자신과 낡은 자신이 서로를 교환하고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것을 맞아들일 때 마음도 몸도 새로운 상태여야 합니다. 앞서 강조했듯 우리 마음과 몸은 함께 가니까요.
--- p.217 ‘새로운 바람을 넣으면 마음도 몸도 변한다’에서
마음에 강철 같은 기둥은 필요 없습니다.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자신이란 있을 수 없지요. 인간 자체가 신이거나 하늘이 아니니까요!
때로는 마음먹었던 것과 현실이 달라질 때, 노력하고 시도했으니 과정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면 더 편안해집니다.
‘동료와도 웃으며 일을 진행할 수 있었으니 오늘은 좋은 날’이라든가, ‘일은 힘들었지만 도중에 많이 웃었으니 뭐 됐지’라든가 말이죠. (중략)
조금씩 바뀌어가는 과정와 유연성에 무게를 두세요. 유연하게 대처하고 과정을 즐기는 동안 자존감이 살아납니다. 상황에 유연히 대처해가는 것 또한 삶의 지혜를 더하는 과정이니까요!
--- pp.221-222 ‘유연하게 흘러가며 과정을 즐기자’에서
아무리 가혹한 상황에 놓이고 감정을 봉인했어도, 자신들이 이 아름다운 세계에 살아 있다는 사실에 감동하고 노을을 바라보게 되는 마음은 남아 있었던 겁니다.
분명 몸이 자연스레 반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이렇게 살아 있다는 사소한 실감, 최악의 순간만이 가득한 하루에도 ‘저 노을을 보게 되어 좋았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삶을 향한 커다란 힘이 됩니다.
이런 지독하고 이율배반적인 환경 속에서 빅터 프랭클은 생각합니다.
‘우리가 인생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인생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고 있느냐가 문제이다. 인생은 우리에게 매일 매시간 질문을 하고, 우리는 그 물음에 말이나 명상이 아니라 올바른 행동에 의해 대답해야만 한다.’
괴로운 상황이 계속되면 우리는 ‘이런 걸 해서 무슨 의미가 있나’라든가 ‘내 인생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프랭클은 ‘살아가는 의미가 있을까?’라고 묻는 것은 잘못이라고 강조합니다. ‘인생은 항상 질문을 하고, 그에 행동으로 대답하는 것이 살아가는 것’이라고, 그는 그 고통을 겪은 뒤 결론을 내립니다.
‘결국 인생이라는 것은, 인생이란 어떤 의미일까라는 질문에 온전히 대답하는 것, 인생이 각자에게 부과한 사명을 완수하는 것, 매일의 의무를 다하는 책임을 맡는 것과 같다.’
--- pp.233-234 ‘인생의 질문에 끊임없이 대답하는 삶’에서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경우를 맞닥뜨렸을 때 불행하다고 개탄하는 것이 아니라 그건 이미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문제였음을 받아들이고, 따라서 처음부터 나를 상처 입힐 수 없는 것임을 인지하면 됩니다. 그 상황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에만 집중해도 충분합니다. 스스로 고르고, 정하면 그 길을 긍정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좋은 것도 좋지 않은 것도, 잘한 것도 잘못한 것도 모두 받아들인 후 인생의 방향을 스스로 정하는 것입니다.
--- pp.236-237 ‘내 인생의 방향은 나 스스로 정한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