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는 시간과 함께 자신의 역사를 꾸려오는 동안 자연 세계에서 자신들을 넘어서는 거대한 힘을 느꼈다. 그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과 통제할 수 없는 힘을 경험하면서 신성한 존재를 인식한 것이다. 인간들은 이 초자연적 힘에 대해 두려움과 경외심을 갖고 응대했으며, 그런 마음으로 도무지 알 수 없는 것들을 이해하려 애썼고 호감을 얻으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제의 형식을 발전시켰다. 또 어떤 현상은 신성한 것으로 간주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바라보기도 했다. 사람들은 예술과 제의를 통해 자신들의 느낌을 표현했으며, 그렇게 제한적으로 초자연적인 것과의 접촉을 추구했다. 어떤 문화는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영역에서 신성한 영(靈)들을 인식했다. 또 어떤 문화는 인간이 제의를 통해 최고 존재인 신과 연결될 수 있다는 믿음을 발전시켰다. 다신(多神)을 섬기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유일한 절대 존재를 믿는 사람들도 있다. 모든 전통에서 공히, 인류는 세계와 자연, 그리고 신의 질서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왔다. 인간은 어떻게 신적인 존재와 관계를 맺어야 할지, 어떻게 고난을 이겨내고 삶을 보호받아야 할지, 그리고 삶 이후의 구원을 어떻게 받아야 할지에 대한 규칙을 정해야만 했다. 그들은 이러한 요구를 주술과 제의적인 춤을 통해 성취했다. 그들은 신 또는 영혼을 청하기 위해 서약, 예물, 그리고 제사를 바쳤고 종교적 제의를 발전시켰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신이 자신들보다도 더 큰 힘이 있을 것이라고 이해했기 때문에 신적인 도움을 요청함으로써 구원을 추구했다. ---p.18
가정을 이루고 가장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나면 그 가장은 ‘임주기’라 불리는 삶의 세 번째 무대로 들어서게 된다. 이제 그는 가장 나이 많은 자식의 손에 가족을 맡긴 채 가족을 떠나, 신성한 경전을 공부하는 데 몰두한다. 그가 비록 숲으로 들어가지는 못할지라도, 그의 헌신은 문명화된 농경 도시의 안전함을 떠나 신들을 더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는 광야로 돌아간 위대한 성인들의 삶을 보여준다. 삶의 네 번째 단계에서 그는 확신을 가지고 세속의 모든 속박을 버리고 고행과 명상을 통해 브라만, 즉 신을 추구하는 거룩한 사람, 사두(Sadhu, 고행자)의 길을 선택한다. 사두는 가정과 명성, 부와 소유물들을 포기고 도시를 따라, 마을을 따라 순례했다. 그들은 기부 받은 음식에 의지해 빈약한 식사를 했으며, 은거 생활에 적당한 장소를 찾았다. 어떤 이들은 의복을 입었고, 어떤 이들은 벌거벗은 채 살았다. 어떤 이들은 머리카락을 잘랐으며, 어떤 이들은 머리털과 턱수염을 길게 자라도록 하였다. (……) 환생에 대한 믿음은 힌두교의 전 체계에 스며들어 있다. 힌두인들은 모든 살아 있는 것은 끝없는 태어남과 죽음을 반복하면서 수많은 몸의 형태를 통해 순환한다고 믿는다. 산스크리트어로 ‘행위(action)’를 의미하는 ‘업(Karma)’을 통해 현재 삶에서의 행위가 다음 삶의 특징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신을 향한 더없는 헌신의 삶은 다음 환생에 보상받게 될 것이다. 고대의 힌두 경전은 “그 사람의 행위로, 그 과정으로 그는 그렇게 된다”고 말한다. “선한 일을 하는 자는 선하게 되고, 악을 행하는 자는 악하게 된다. 선한 일을 함으로써 사람은 거룩하게 되며, 악한 일을 함으로써 그는 악하게 될 것이다.”---p.95-96
붓다가 가르치는 방식은 고대 인도의 의술의 형식을 따른다. 고대 인도의 의사들은 병의 증상, 원인, 치료의 가능성, 치료 이 네 가지 순서로 질병을 분석하고 치료했다. 붓다의 가르침은 윤회, 즉 붓다가 삶의 수레바퀴라고 부른 탄생과 죽음과 재탄생의 순환을 근간으로 한다. 이 세상의 물질세계에 대한 집착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윤회의 사슬로 우리를 속박한다. 붓다는 이것으로부터의 자유, 즉 해탈에 도전했다. 붓다는 해탈에 이르는 수행의 단계도 가르쳐주었다. 불교도는 이를 따름으로써 열반에 이를 수 있다. 또, 붓다는 탄생의 순환 고리를 끊을 수 있고, 삶의 고통을 종결시킬 수 있는 길을 제안한다. 그러한 수행의 단계는 오랜 시간에 걸쳐 팔정도(八正道)로 정립되었는데, 이는 세 범주로 나뉜다. (……) 붓다는 가르침에서 생명을 사랑할 것과 세속적인 부(富)의 덧없음을 강조했다. 욕심[貧], 성냄[瞋], 어리석음[癡]이 세 가지 악의 뿌리다. 붓다는 제자들에게 말했다. “세상에 생명을 갖고 태어난 모든 존재는 즐거움을 얻으려는 탐욕과 열정과 갈증으로 고뇌한다.” 붓다는 이기심을 모든 고통의 근원이라고 하였다. 붓다는 모든 이에게 “고통을 없애고, 욕망을 버리고, 분노를 진정시켜라. ‘나는-이다(I-am)’라는 거짓 관념을 버려라. 무지를 떠나 깨달음을 얻는 길을 따르라”고 설하셨다. 이러한 길은 계급을 막론하? 모든 이에게 열려 있다. ---p.140, 145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이삭의 극적인 이야기를 통해 그 당시 다른 사람들이 예배하는 것과 구별되는 유일신 하나님에 대해 들어왔다. 당시에는 다른 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직접 대화하고,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 약속을 주시며,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제물을 바치는 것을 중요시한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언약의 표시로서, 아브라함의 남자 후손들은 의무적으로 할례를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출현으로 가나안 땅은 성별되었다. 하란, 세겜, 네게브, 베델, 헤브론 같은 모든 지역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약속의 땅을 줄 것을 약속하셨다. 마침내,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궁극적인 자신의 믿음을 보여줘야 했던 모리야 산을 성별했다. 아브라함의 제의는 이후에 예루살렘이라 불릴 도시의 한가운데 있는 산에서 이어질 무수한 제사의 첫 제사였다. (……) 모든 자료는 아브라함을 유일신론자로 그리고 있다. 그에게는 유일하신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다. 아브라함은 지역별로 다른 신을 섬긴 수메르 지역을 떠났다. 그리고 바알(Baal) 신을 섬기는 가나안을 거쳤다. 바알은 계절의 순환을 상징하며, 매년 죽었다가 다시 부활한다. 아브라함이 우르에서 가나안을 거쳐 약속의 땅에 도착한 것은 지역 신(神)들을 섬기는 풍토에서 출발하여, 기후를 관장하는 신을 거쳐, 비로소 자연적 힘에 구애받지 않는 전능한 유일신 하나님의 땅에 도착한 과정과 정확히 겹쳐진다. ---p.204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이야기가 기독교를 규정한다. 모든 기독교 종파들은 그리스도는 인류를 위해 죽었다는 것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인간의 고통과 죽음을 감당하고 희생해 더 위대한 보상에 이르렀다는 것을 믿는다. 지상에서의 삶을 통해 예수의 신념과 행위는 죄에서 자유로운 인간성의 위대한 한 전형을 보여준다. 그 어떤 인간과도 비교할 수 없지만 굴욕, 배신, 그리고 죽음에 직면해서 그가 보여준 힘을 모방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인류를 구원했다고 믿는다. 그는 죽음으로써 모든 이의 죄를 대속했다. 예수의 본을 따름으로써, 기독교인들은 그의 고난, 그의 섬김의 자세, 고통에 직면해서의 그의 깊은 신앙, 그리고 부활에 대한 그의 약속을 나눈다. ---p.274
무함마드는 고별 설교에서 이슬람의 의무를 다섯 부분으로 된 행동 규약으로 구체화했는데 이것을 ‘이슬람의 다섯 기둥’이라고 부른다. 첫 번째 기둥(Pillar)은 샤하다(shahada)이고 문자적으로 “증언을 지닌다”는 것을 뜻하는 ‘신앙 고백’으로 알라와 예언자로서의 무함마드에 대한 믿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것의 본질은 다음과 같은 만인 공통의 믿음의 진술문으로 표현된다. “하나님(알라) 외에 신이 없고 무함마드가 하나님의 사도이다.” 이것은 가브리엘이 히라의 동굴에서 무함마드에게 한 첫 번째 말이다. 그것을 말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무함마드에 대한 진정한 사랑과 선한 의도를 가진 마음을 드러내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신앙 고백은 ‘예언자들의 봉인(封印)’인 무함마드 이전에 왔던 모든 예언자도 인정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 신앙 고백이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데 요구되는 유일한 것이다. 매일 기도하는 가운데 이슬람교도들은 이 진술을 17번 듣는다. 그들은 이것을 새로 태어난 아이에게 말하고 또 죽기 직전 마지막 말이 되게 하려고 애쓴다. 이슬람의 두 번째 기둥은 살랏(salat), 바로 합동 기도 혹은 예배이다. 합동 기도는 개인 기도보다 더 축복을 받는데 무함마드는 금요일을 이슬람교도들이 기도하기 위해 모이는 날로 제안했다. 전 세계 모스크에서, 하루에 다섯 번 예배 시간을 알리는 사람인 무에진(muezzin)이 이슬람교도들을 기도로 부른다.
---p.349-3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