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발화점
바람은 언제나 삶의 가장 허름한 부위를 파고들었고 그래서 우리의 세입은 더 부끄러웠다. 종일 담배 냄새를 묻히고 돌아다니다 귀가한 아버지의 몸에서 기름 냄새가 났다. 여름밤의 잠은 퉁퉁 불은 소면처럼 툭툭 끊어졌고 물 묻은 몸은 울음의 부피만 서서히 불리고 있었다.
올해도 김장을 해야 할까. 학교를 그만둘 생각이에요. 배추 값이 오를 것 같은데. 대학이 다는 아니잖아요. 편의점 아르바이트라도 하면 생계는 문제없을 거예요. 그나저나 갈 곳이 있을지 모르겠다. 제길, 두통약은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남루함이 죄였다. 아름답게 태어나지 못한 것, 아름답게 성형하지 못한 것이 죄였다. 이미 골목은 불안한 공기로 구석구석이 짓이겨져 있었다. 우리의 창백한 목소리는 이미 결박당해 빠져나갈 수 없었다. 낮은 곳에 있던 자가 망루에 오를 때는 낮은 곳마저 빼앗겼을 때다.
우리의 집은 거미집보다 더 가늘고 위태로워요. 거미집도 때가 되면 바람에 헐리지 않니. 그래요. 거미 역시 동의한 적이 없지요. 차라리 무거워도 달팽이처럼 이고 다닐 수 있는 집이 있었으면, 아니 집이란 것이 아예 없었으면. 우리의 아파트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고층 아파트는 떨어질 때나 유용한 거예요. 그나저나 누가 이처럼 쉽게 헐려 버릴 집을 지은 걸까요.
알아요. 저 모든 것들은 우리를 소각하고 밀어내기 위한 거라는 걸. 네 아버지는 아닐 거다. 네 아버지의 젖은 몸이 탈 수는 없을 테니. 네 아버지는 한 번도 타오른 적이 없다. 어머니, 아버지는 횃불처럼 기름에 스스로를 적시며 살아오셨던 거예요. 아, 휘발성의 아버지, 집을 지키기 위한 단 한 번 발화. ***
키위, 혹은
지금 둘이 살기도 빠듯하고 힘든데 애를 낳으면 어떻게 해요? 애는 누가 키우구요? 우리가 뻐꾸기처럼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는 것도 아닌데, 친정엄마도 아프고 시어머니도 질색이신데, 지금도 아파트 대출 원금은커녕 이자 갚기도 힘이 든데 아기를 낳는 순간 직장에서 잘릴 게 뻔한데 당신이 벌어 오는 고만고만한 월급으로 세 식구가 어떻게 살겠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에게 우리의 삶을 온전히 물려주기는 싫어요. 제발 날개가 퇴화되기 전의 우리 부모들과 우리의 삶을 동일시하지 말아요.
여기서 한나절을 꼬박 날아가면 닿게 되는 뉴질랜드에는 날지 못하는 새가 있다지. 제 이름을 스스로 부르는 새라는데, 키위 새는 날개를 쓰지 않다가 끝내 날개가 퇴화되어 손톱만큼도 날지 못하고 땅 위를 걸어 다닌다지, 그러다가 물려 죽거나, 제 몸의 4분의 1이나 되는 알을 낳다가 대부분 죽는다는데, 혹시 순산을 하게 되더라도 평생을 날개 없이 걸어 다녀야 하는 숙명을 물려주어야 한다는데, 키위 새가 사는 법은 알을 낳지 않은 것, 그리고 알을 낳지 않기 위해서는 짝짓기도 하지 않는 것,
우리처럼. ***
52-hertz whale
너희는, 오랫동안 나를 두고, 나의 언어를 두고,
독백이라고 했다. 진화가 덜된 목소리라고도 했다. 그래서,
내가 이상해?
네가 사라져야 비로소 밤은 찾아왔다. 장국영이 죽고서야 벚꽃이 떨어졌듯이. 목소리를 묻어 버리는 목소리야말로 대낮처럼 폭력적이야. 대부분의 낮을 나는 열대우림의 나무처럼 얇은 목피 속에서 침묵하지. 끈끈하고 불쾌한 습도를 참아 내며 서 있어도 평범의 바깥에는 다른 평범함이 서 있을 뿐 내가 있을 곳은 어디에도 없어. 시청률과 조회 수와 판매량의 반대편으로 향하는,
내가 이상해?
주파수가 혼선된 해적 방송 같아? 단 한 번도 밤이 푸르지 않았던 너희는 아침의 채도를 몰라. 일조량에 따라 조건반사로 벌어지는 꽃송이처럼 떨어질 날들만 기다리는 것은 아니지? 나는 파미르의 이방인, 지극히 관조적이고 낯선. 너희는 나와의 교집합을 강요했지만 나는 합집합을 떠올리지. 단 한 번도 너희를 배제하지 않아. 하지만
아무도 들을 수 없어야 나는 마음껏 말할 수 있어. 내가 이상해?
서로 다른 부력이 없었다면 우리는 모두 심해의 생물이 되었으리. 시가 없었다면 우리는 괴물이 되었으리. 수중의 두터운 물살을 헤치고 나아가는 나의 울음은 아무도 들을 수 없다고 했다.
처음부터 이해의 방식이 잘못되었던 거야. 내 신음과 웃음도 구별하지 못하던 당신들이… 내 소리만을 갖고 나를 이해하려 했던 잔인함이…
너희는 왜 알아듣기 싫은 말만 하는 걸까. 내가 이상한 거야?
일을 하다가 고개를 들면 말이야, 책상 칸막이 너머로 모조리 정수리만 보여. 그게 너무 무서워. 일종의 환공포증일까. 도대체 성실이라는 말 속에 울림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성실은 착취의 풀메이크업 버전이야. 애국은 매국자가 선점해 버리고 진실은 위선자의 무기가 되고 있어. 오히려 거짓이라고 발음의 음장 속에 진실은 숨어 있어. 숫자와 탐욕이, 행간과 절실함이 서로 같은 헤르츠를 공유한다고 믿어. 이런 내가
이상해?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