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문학적 상상력을 지닌 삽화가
귀스타브 도레(Gustave Dore, 1832 ?1883)는 나폴레옹 3세가 통치하던 제2제정 시기(1852-1870) 프랑스에서 가장 인기 많은 삽화가이자 판화작가였다. 그는 열다섯 살의 어린 나이에 직업 삽화가의 길에 들어섰지만 정규 미술 교육을 받은 적은 없다.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한 도레의 작품들은 매우 독특했다. 그가 고안해낸 이미지들은 강렬하고 새로웠기에 대중들은 그가 그린 신문 만평과 소설 속 삽화들에 매료되었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과 신비롭고 극적인 화면 구성은 그의 작품이 지닌 주된 특징이었다. 삽화, 판화, 유화 그리고 조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매체와 기법을
사용한 그의 작업은 주로 문학 작품과 동시대인들의 삶에서 영감을 받아 이루어졌다.
도레의 예술가적 삶에서 삽화는 매우 중요한 영역을 차지한다. 삽화가로서 그는 당대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신문 만평과 대중 잡지에 풍자화를 그리는 작가로 출발한 도레는 소설과 동화집의 삽화를 그리면서 명성을 얻었다. 19세기 중반 파리에서 출판된 프랑수아 라블레(Francois Rabelais, 1494 ?1553), 미겔 데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 1547 ?1616, 샤를 페로(Charles Perrault, 1628 ?1703), 장 드 라퐁텐(Jean de La Fontaine, 1621 ?1695),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 ?1616), 단테 알리기에리 (Dante Alighieri, 1265-1321), 요한 볼프강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 ?1832) 같은 유럽 대문호들의 작품집에 실린 삽화들은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도레는 문학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기질과 모습을 시각적으로 재현해내는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도레의 삽화들은 이야기의 전개 과정을 간결하면서도 생생하게 전달하는 힘을 지녔으며 독자들은 그의 그림을 통해 고전 작품들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삽화는 텍스트를 부각시키기 위한 보조 수단으로 활용되어 왔다. 삽화를 지칭하는 프랑스어 일루스트라시옹(illustration)은 텍스트에 빛을 비추어준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하지만 도레는 자신이 그린 삽화들이 문학 작품에 버금가는 위상을 지니기를 원했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주관적 느낌과 상상력을 가미하여 문학 작품의 내용을 과감하게 재해석했다. 때론 작가가 글로 표현하지 않은 장면과 인물의 특성들을 찾아내어 이를 자유롭게 형상화했
다. 그래서인지 그의 삽화는 독서를 중단시키고 명상과 사색을 이끌어낸다. 도레가 그린 삽화들은 소설 속 이야기가 눈앞에 펼쳐진 것과 같은 효과를 창출하면서도 마치 독립적인 회화 작품을 보는 듯한 느낌을 독자들에게 전해준다. 그가 작품 제작에 있어서 대형 판형을 선호했던 이유도 삽화의 회화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였다.
본래 비네트(vignette)라고 불리는 책 속에 그려진 삽화들은 글의 장을 구분하는 단순한 역할을 수행했다. 포도 잎 문양으로 책의 제목이나 각 장이 시작되는 페이지의 둘레를 장식하고 그 안에 작은 그림들을 그려 넣은 비네트들은 대체적으로 완성도가 낮은 이미지들이었다. 도레는 이러한 작고 간략하게 그려진 비네트를 대신해 예술적 가치가 있는 대형 판화들로 장식된 책을 출간하려 했다. 이를 위해 도레는 전문 판화가들을 고용해 공동으로 작업했다.
도레가 창안한 이미지들은 판화가들에 의해 목판으로 제작되어 인쇄되었다. 작업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도레는 목판 위에 직접 그림을 그렸고 이러한 방식으로 제작된 판화 작품은 1만여 점에 이른다. 이와 같은 엄청난 양의 삽화를 제작하기 위해 총 160여 명의 판화가들이 도레가 창작 작업을 하는 동안 그와 함께 일했다. 목판화로 인쇄된 도레의 삽화는 비네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고 웅장했다. 따라서 그의 삽화가 실린 책들은 일반 문고형 서적보다 수십 배 비싸게 판매되었다.
1861년 도레는 파리의 저명한 출판업자 루이 아셰트(Louis Hachette, 1800 ?1864)에게 자신의 판화 이미지들이 실린 단테의 『신곡』(La divina commedia)을 100프랑의 가격으로 출간할 것을 제안했다. 이때 아셰트는 도레의 제안을 거절하며 이 가격으로는 400권도 팔기 힘들 것이라고 단언했다고 한다. 하지만 도레가 자비로 판화 제작비를 부담하여 출판한 『신곡』은 몇 주 만에 3,000권이 팔렸다. 도레의 삽화 75점이 들어간 『신곡』은 파리에서 거둔 성공을 바탕으로 런던, 베를린, 밀라노, 바르셀로나, 스톡홀름 등 유럽 주요 도시들에서 잇달아 출간되었다. 도레의 국제적인 명성은 이 작품에서 시작되었다. 단테의 『신곡』에 대한 도레의 애착은 각별했다. 그는 이 작품을 주제로 한 많은 데생을 남겼다. 1861년 파리 살롱전에는 유화로 제작된 가로 4.5미터의 대작 「지옥의 9번째 구역에서의 단테와 베르길리우스」를 출품하기도 했다. 꿈, 환영, 광기, 상상의 세계 같은비현실적인 요소들은 도레가 선호한 작품 테마였다. 1863년에 출간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Don Quixote에서도 도레는 광기에 사로잡힌 고독한 기사의 모습을 간결하면서도 예리하게 묘사해냈다.
1860년대 그의 삽화가 실린 책들은 모두 대중적 성공을 거두었다.이 시기 그는 「신데렐라」(Cinderella), 「장화신은 고양이」(Puss in Boots),「잠자는 숲속의 미녀」(The Sleeping Beauty) 등이 수록된 샤를 페로의 동화집에서부터 라퐁텐의 『우화집』(Fables )그리고 존 밀턴(John Milton, 1608 ?1674)의 『실낙원』(Paradise Lost)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텍스트들을 소재로 삽화를 제작했다. 그중 200점이 넘는 종교 이미지로 구성된 성서의 출간은 도레의 작업에서 주요한 전환점이 된다. 도레가 제작한 228개의 삽화가 실린 성서 초판본은 1865년 프랑스 투르에서 간행되었다. 이 성서 속 이미지들은 프랑스 사회에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사실주의 소설가 에밀 졸라(Emile Zola, 1840 ?1902)는 도레의 종교 이미지가 지나치게 연극적이라고 비판했지만 필립 뷔르티(Philippe Burty, 1830 ?1890) 같은 미술 비평가들은 성서에 실린 도레의 작품들을 극찬했다.
도레는 성서 속 삽화를 그리는 작업을 1860년대 후반까지 지속했다. 여러 차례에 걸쳐 속판이 간행된 이 작업에 30여 명의 판화가가 참여했으며 도레는 매번 새로운 이미지를 고안해 첨부했다. 성서를 위해 도레가 최종적으로 제작한 판화 이미지는 총 241개로 기록되어 있다. 이 작업을 계기로 그의 작품 세계에서 종교화의 비중이 급속도로 증가했다. 도레의 삽화가 실린 성서는 여러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어 출간되었고 특히 영국과 미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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