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넨 어찌 세상을 보는 겐가?” “이 손바닥 안에 있을 것으로 봅니다만.” “그 손바닥 좀 보여주시게.” 한명회는 서슴없이 손바닥을 수양대군 앞으로 내민다. “이게 세상이라…….” “아닙니다.” “잠시 전에 그리 말하지 않았나?” “허허허. 이 손바닥은 제 세상이옵고, 나으리의 세상은 나으리의 손바닥에 있을 것으로 압니다. 거기에 모든 것이 있사옵니다. 넓고 좁은 것, 높고 낮은 것, 길고 짧은 것, 펼쳐서 떨치는 이치와 오므려서 감추는 이치, 모든 것이 고루 갖추어져 있음이라고 사료되옵니다.”---1권 p.47
중전의 재목이로세! 한명회의 뇌리를 칼날같이 헤집고 지나가는 탄성이다. 한씨가 중전이 되기 위해서는 수양대군이 왕위에 올라야 한다. 그게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이던가. 그러나 한씨부인의 변설은 탁월하다. “자고로 왕실의 어른들은 거친 비바람을 맞아본 일도, 더구나 생사를 가늠하는 일에는 연약하기 그지없다고 여기고 있었습니다만, 제 얘기가 아주 버릴 것이 못 된다면 장차 이 나라 왕실의 대들보가 되어주셔야 하지를 않겠습니까.” 한명회는 끔 하는 신음과 함께 술잔을 비운다. 그렇다고 수양저의 맏며느리 한씨 앞에서 국가대사를 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만 수양대군저에 한씨와 같은 영특한 여인이 있다는 사실, 일이 힘들어지면 의논할 상대를 찾았다는 사실이 한명회에게는 큰 득이었다.---1권 p.75
“천명이 지엄하고, 천명이 무상하다는 말이 있지를 않습니까.” 천명지엄(天命至嚴)은 모든 것을 하늘이 다 한다는 뜻이지만, 천명무상(天命無常)은 하늘의 뜻도 때로는 무상하다는 뜻이다. 아무리 천명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시대 한가운데를 헤쳐나가는 힘이 없는 자에게는 기회가 오질 않고, 시대의 한가운데로 뚜벅뚜벅 걸어나가는 용기와 지혜가 있는 자에게만 성공이 보장될 것이라는 한명회의 변설은 수양대군으로 하여금 뒤를 돌아보게 하고, 또 앞으로의 진로를 생각하게 하는 멋진 변설이 아닐 수 없다.---1권 p.126
“잃은 것은 하나이나, 얻은 것은 둘이 아닙니까.” 한명회도 싱긋싱긋 웃음을 흘리면서 태연하게 대꾸한다. “무엇이 하나이고, 무엇이 둘이라는 말인가?” 입으로는 웃으면서도 수양대군의 눈빛은 조금씩 긴장을 하는 듯 불을 뿜어내고 있다. “잃은 것은 물론 병판의 자리옵고…….” “얻은 것은?” “첫째는 사람을 하나 얻었습니다.” “사람이라? 음, 그렇겠군. 또 하나는?” “결단입지요.”
문학은 문학 자체의 현실성과 역사성은 물론 문학적인 강한 의지의 감성이 존재하지 않으면 문학의 자리에서 멀어진다. 초당 신봉승의 역사문학은 바로 그런 점을 철저하게 지킴으로써 사실감 넘치는 서사성을 긍지로 삼는다. 그의 역사소설 『왕을 만든 남자』는 단종,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의 5대에 걸친 파란만장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면서도 한 지식인 여성의 처절한 몸부림을 역사적 사실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는 픽션을 구사한다. 소설을 읽으면서 역사를 함께 배우게 되는 두 가지 재미를 쏠쏠하게 느끼게 한다. 조병무(문학평론가, 시인)
‘정사의 대중화’라는 기치를 내건 초당 신봉승의 역사소설 『왕을 만든 남자』는 국보 『조선왕조실록』을 바탕으로 하는 인물사탐구의 결실이다. 픽션(허구)이 사실을 뛰어넘질 못할 정도의 탄탄한 구성과 필력을 구사하고 있다. 한 지식인 여성의 처절한 몸부림을 그려가면서도 그 지식의 쓰임새까지도 되새겨보게 하는 것은 한 시대의 정황을 고스란히 그려내면서도 어떤 역사학자의 개입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자신감의 발로가 아닐 수 없다. 박덕규(문학평론가, 단국대 교수)
한마디로 재미있다. 등장하는 인물들의 성격이 한결같이 살아서 꿈틀거린다. 이렇게 서사성 높은 이야깃거리를 정사(正史)를 바탕으로 한 픽션으로 꾸며내는 것이 초당 신봉승 선생의 전매특허가 된 것은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그분의 인물사탐구가 바탕이 되었음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조선 제일의 지식인 여성이 보여준 제도와 관행을 뛰어넘는 파격의 몸부림을 거침없이 그려가면서도 역사문학의 품위를 지켜가는 초당 신봉승 선생의 한결같은 매진에 경의를 표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표재순(연출가, 예술경영지원센터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