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민 가족은 해마다 11월부터 4월까지 겨울잠을 잤는데, 조상들부터 대대로 그렇게 해 왔고 무민들은 전통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조상들이 했던 대로 가족 모두 전나무 잎을 잔뜩 먹었고, 침대 옆에는 이른 봄에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희망 섞인 마음으로 이것저것 모아 놓은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삽, 불을 붙일 돋보기와 필름, 풍속계 같은 물건이었다.
고요한 집 안 가득 평온한 기대감이 감돌고 있었다.
누군가 한숨을 내쉬고 잠자리에 깊이 파고들며 몸을 웅크리곤 했다.
흔들의자를 넘어든 달빛이 거실 탁자 위를 헤매다 침대 머리맡에 달린 황동 꼭지까지 넘어서는 곧장 무민의 얼굴을 비추었다.
바로 그 순간, 무민들이 처음으로 겨울잠을 자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제껏 단 한 번도 일어난 적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무민이 겨울잠에서 깨 버렸고, 다시 잠들지 못했다. --- p.10~11
‘온 세상이 겨울잠을 자고 있어. 나만 혼자 잠들지 못하고 이렇게 깨어 있고. 며칠이고 몇 주고 나 혼자 이렇게 걷고 또 걸으며 떠돌아다니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눈덩이가 되어 버리고 말겠지.’
그때 숲이 끝나고 무민의 발아래로 새로운 골짜기가 펼쳐졌다. 맞은편으로 외로운 산이 보였다. 남쪽으로 파도처럼 이어지고 있는 산줄기가 이제껏 그렇게 외로워 보인 적이 없었다.
그제야 무민은 추워서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낭떠러지 아래에서 기어 나온 저녁 어둠이 얼어붙은 산등성이를 타고 슬금슬금 올라오고 있었다. --- p.25~26
“눈 이야기를 들려줘. 눈은 이해가 잘 안 돼.”
투티키가 말했다.
“나도 잘은 몰라. 눈은 차디찬데, 눈으로 만든 집 안은 따뜻하지. 하얗지만 불그스름하게 보일 때도 있고, 파랗게 보일 때도 있어. 세상 무엇보다 부드러울 수도 있고, 돌보다 단단할 수도 있어. 뭐라 딱 잘라 설명할 수가 없어.”
허공에 둥둥 뜬 생선 수프 한 그릇이 소리 없이 조심스럽게 무민 앞의 탁자에 놓였다.
무민이 물었다.
“너랑 같이 사는 뾰족뒤쥐들은 나는 법을 어디에서 배웠을까?”
투티키가 말했다.
“글쎄. 모든 걸 꼬치꼬치 캐묻지 마. 비밀을 조용히 간직하고 싶어 할지도 모르니까. 쟤들이든 눈이든 신경 쓸 필요 없어.” --- p.33~34
무민이 깜짝 놀라 말했다.
“미이, 그러면 안 돼! 다람쥐는 꼬리랑 같이 묻혀야지. 다람쥐를 묻어 줘야 하잖아. 투티키, 그렇지?”
투티키가 말했다.
“음, 다람쥐가 죽으면 꼬리가 무슨 소용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무민이 말했다.
“자꾸 다람쥐가 죽었다고 말하지 좀 마. 너무 끔찍하니까.”
투티키가 다정하게 말했다.
“죽은 건 그냥 죽은 거야. 이 다람쥐는 끝내 흙으로 돌아가겠지. 훗날 그 땅에는 새로운 다람쥐들이 뛰어오를 나무가 자랄 테고. 그런데도 그게 그렇게 슬퍼?”
무민이 팽하고 코를 풀더니 말했다.
“아닐지도 몰라. 하지만 어쨌든 내일은 다람쥐를 꼬리까지 온전히 묻어 줘야 하고, 정말 멋지고 제대로 된 장례식도 치러야 해.” --- p.60~61
“가족들은 깨우면 안 돼요. 이쪽에는 엄마랑 아빠가 자고 있고, 저쪽에는 스노크메이든이 있어요. 앤시스터는 타일 난로에서 자요. 다른 건 다 빌려 줘서 남은 게 없으니까 카펫이라도 덮으세요.”
손님들은 잠든 가족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러고는 얌전히 카펫과 식탁보를 덮었고, 아주 작은 손님들은 모자나 실내화 속에 파고들어 잠들었다.
코감기에 걸린 손님이 많았고, 몇몇은 향수병에 시달렸다.
무민이 생각했다.
‘너무 끔찍해. 조금 있으면 잼 저장고가 텅 비어 버리겠어. 봄이 와서 가족들이 일어났을 때 그림은 위아래가 뒤집혀 거꾸로 걸려 있고, 집 안에는 낯선 이들이 가득하면 뭐라고 말하지?’ --- p.103
이제 바람이 거실로 곧장 불어들었다. 바람은 크리스털 샹들리에에 덮인 튈에서 먼지를 불어 냈고, 타일 난로의 잿더미 속에서 휭하고 한 바퀴 돌았다. 그러고는 벽에 붙은 스티커를 슬쩍 들추었다. 그 바람에 스티커 하나가 떨어져서 밖으로 날아갔다.
집 안에 밤과 침엽수림의 냄새가 들어차자, 무민은 생각했다.
‘나쁘지 않은걸. 가족들도 가끔은 바람을 쐬어야지.’
무민은 계단 쪽으로 나가 흠뻑 젖은 어둠 속을 바라보았다.
무민이 혼잣말했다.
“이제 나는 다 가졌어. 한 해를 온전히 가졌다고. 겨울까지 몽땅 다. 나는 한 해를 모두 겪어 낸 첫 번째 무민이야.”
--- p.1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