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박근혜 정권이 먼저 시작한 이 역사전쟁은 오히려 민중혁명을 움트게 만들었다. 역사전쟁은 급속한 국민적 이반을 불러일으키면서 정권붕괴를 자초했다. 정통성이 취약했던 박근혜 정권은 역사전쟁에 패배함으로써 급격히 무너졌다.
162-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후 반박근혜 투쟁노선에서 민주노총이 가장 적극적 대안세력으로 떠올랐다는 것이다. 진보정당은 해산되고 야당이 무기력한 상황에서, 보수언론이 언로를 장악하고 진보언론이 몸을 사리는 상황에서, 정권과 맞설 조직과 자금을 가진 세력은 민주노총이 거의 유일했기 때문이다.
164-2015년 9월 22일 서울 중구 정동 민주노총 대회의실에서 박석운 한국진보연대 상임대표,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 함세웅 신부, 김영호 전농 의장 등이 ‘민중총궐기투쟁본부 발족 기자회견’을 열고 “모이자 서울로! 가자 청와대호! 뒤집자 세상을!”이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183-이번 촛불혁명은 30년 전 6월 시민혁명이 키운 노동조합과 농민?통일?빈민?학생 등 이른바 민중세력이 시작한 민중혁명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227-한 위원장의 자진 출두는 또 다른 상황 반전을 낳고 있었다. 그의 행보는 종교계와 야당의 중재와 협조를 이끌어 내면서 예정된 제2차 민중총궐기 단초를 마련한 것이다. 한 위원장은 평화적 집회를 약속하고 종교계가 이를 보증하고, 경찰은 차벽이나 물대포를 사용하지 않기로 합의한 것이다. 이는 촛불혁명 국면에서 또 하나 반전의 순간이다.
237-두 번째는 제1야당 새정치민주연합이 처음으로 동조했다는 것이다. 제2차 민중총궐기에 문재인 대표를 비롯한 당직자와 국회의원 40여 명이 푸른 머플러를 하고 ‘평화’를 새긴 배지를 달고 집회에 참석했다...비록 야당의원이 ‘박근혜 퇴진’이나, ‘국정교과서 항의’를 주장하지 않고 경찰과 시민의 충돌을 막기 위한 ‘평화 지킴이’ 역할에 머물렀지만 야당이 처음으로 민중총궐기 현장에 함께 했다는 것은 적잖은 의미가 있다.
239-2015년 12월 19일 오후 제3차 민중총궐기가 열렸다...김영호 전농 의장은 “맨날 해고만 당하지 말고, 박근혜 권력을 우리가 해고시키자”면서 “박근혜 권력을 파면시키자”고 비판했다.
240-민중총궐기투쟁본부는 그러나 ‘문화제’ 형식으로 치른다며 서울시로부터 광화문광장 사용허가를 받아냈다. 경찰은 집회신고를 안 한 불법집회로 규정했지만, 민중총궐기투쟁본부는 서울시로부터 허가를 받았다며 행사를 강행했다. 박석운 한국진보연대 상임대표는 “당시 서울시의 이 결정은 촛불혁명 과정에서 의미 있는 모멘트였다”고 증언했다.
243-제3차 민중총궐기의 가장 큰 특징은 민중총궐기가 처음으로 광화문 광장을 차지했다는 점이다. 이는 민중총궐기투쟁본부와 박원순 서울시장의 탁월한 결정이었다. 또 다른 특징은 제2차 민중총궐기에 이어 시위양상이 보다 다양하게 진화했다는 점이다. 폭력과 구호만 연상시키는 정치집회가 ‘문화제’와 같이 평화적이고 다양한 방법으로 치를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
314-나중에 만들어진 ‘박근혜정권퇴진 비상국민행동’(퇴진행동)은 이 행사를(10월 29일) 제1차 범국민행동으로 규정했다. 하지만 이 촛불시위는 퇴진행동 설립(2016년 11월 9일) 이전으로 퇴진행동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촛불시위다.
퇴진행동은 10월 말 대세가 민중세력으로 옮아가고, 촛불이 자연스레 국민 전체에게 확산될 기미가 보이자, 시민사회단체가 ‘같이 하자’고 제안 하면서 결성 움직임이 시작됐다.
322-민주노총 이영주 사무총장은 저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시민단체들은 ‘민중총궐기’라는 단어를 빼라, 2015년 폭력 이미지를 연상시킨다는 거였다. 그러나 우리는 ‘한상균 위원장이 감옥에 있고, 백남기 농민이 죽었다, 우리에게 민중총궐기는 지금 진행 중인 현실인데 그 단어를 뺄 수 없다’고 버텼다. 우리는 분명히 ‘퇴진’ 자를 넣어야 한다고 입장을 밝혔는데도, 다음날 또 문제를 제기해 회의를 다시 반복했다. 시민사회단체는 10월 말까지 박근혜 퇴진이라는 단어를 쓰지 말자고 했다. 그런데 이미 광장에서는 퇴진을 외치고 있었다. 결국 웹 대자보 등에 ‘민중총궐기’라는 단어를 참여 단체들이 알아서 크기를 정해 넣기로 했다. 시민사회단체와 함께 한 3개월 동안은 그런 논쟁의 연속이었다.”
324-퇴진행동 기록기념위원회는 2017년 5월 28일 광화문광장에서 ‘촛불 1주년 대회’를 열고 “부패한 박근혜 정권을 퇴진시킨 23번의 촛불집회는 모두 시민들의 힘으로 가능했다”고 자축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2017년은 촛불 1주년이 아닌 2주년이다. 최소한 백남기 농민이 경찰의 물대포에 맞은 2015년 11월 14일은 기록으로 꼽아줘야 하지 않을까. 기록기념 위원회 관계자는 이를 “전사(前史)로 기록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것이 단순한 전사일까. 이런 시대구분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아무도 박근혜와 맞서지 않을 때 제1차 민중총궐기부터 제6차 민중총궐기까지 촛불투쟁을 이어간 세력을 퇴진행동 기록기념 위원회가 중요하게 기록하지 않는 것은 문제다. 퇴진행동이 이러니 국민 대부분도 단지 JTBC의 태블릿PC 보도 이후 촛불만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에 따라 촛불혁명은 ‘최순실의 국정농단’만 동인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것은 촛불혁명의 진정한 의미를 축소 왜곡하는 심각한 오류다.
371-그렇게 막강하게 건재했던 그를 불과 1년 만에 청와대에서 끌어내 감방에까지 넣은 것이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그 극적 반전의 신기루에 도전했던 그들은 누구였는가. 당시 박근혜와 맞서 투쟁한 사람들은 누구였는가.
해고와 비정규직에 내몰리던 노동자, 신자유주의 농업정책에 신음하던 농민, 친일?독재 미화 국정교과서로 가르쳐야 하는 교사, 자신의 신념을 세우려다 탄압받은 진보정당 당원들,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규명하려는 부모들, 분신과 구속을 겪으며 온몸으로 민주화 역사를 쓴 민주화운동가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