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는 사회발전의 중요한 자산이고 자연, 기술,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생명작용이다. 달리 말해 인구현상에는 개개인의 미시적인 삶과 개인의 실존을 충만하게 혹은 억압할 수 있는 사회구조의 특징이 배태되어 있다. 한국사회의 미래는 한국사회 발전 과정에 내재한 모순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고 적절히 대응하는 데 달려 있다. 요컨대 발전의 논리가 어떻게 모순적인 관계에서 인구 및 사회 구조의 불균형 현상을 초래했는지, 그 원인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가 절실한 시점이다. 일국 중심, 경제적 효용과 생산 중심, 위계적인 시민권에 기반한 발전 모델이 계급, 젠더, 국적의 다양한 층위에서 불균형과 불평등을 심화하고 사회의 지속가능성과 삶의 질을 위협하는 상황들을 냉철하게 판단해야 한다. 그리고 삶의 질과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대안적 발전 모델과 실천 과제를 세워야 한다. --- p.34
한국, 중국, 일본, 싱가포르 등 아시아 지역에서 경제적으로 발전된 사회의 인구불균형과 대응방식에는 공통점이 보인다. 우선 경제성장과 인적개발에 초점을 두면서 가족계획정책을 강력하게 시행했다. 그리고 경제적 효용의 관점에서 노동력을 활용하는 관점이 강하다. 인구구조의 불균형과 노동구조의 불균형에 대응하여 기존의 가치관과 사회 경제시스템이 변화되는 부분도 있지만, 다른 지역의 인구와 네트워크화되어 다른 지역의 인구를 활용하는 전략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경제발전과 재생산에 효용적인 이주자를 활용하지만 다양한 시민 권리를 차별하고 있다. 경제적 효용 관점에서 선택적이고 폐쇄적인 이민정책은 원주민과 이주민 사이의 갈등과 이주민의 하층 계급화와 사회적 배제 문제를 양산하고 있다. --- p.52
각국의 젠더화된 가족 분업구조는 자국 내 여성의 노동시장 기회를 실질적으로 제약하고 인구구조에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이주의 특정 패턴을 만들어내고 있다. 여성 이주의 대표적인 범주가 되는 돌봄노동과 결혼이주는 여러 지역에서 재생산 및 돌봄인구의 부족 현상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재생산, 돌봄인구의 부족 현상에는 아시아 지역의 발전주의, 가족 중심의 복지체계, 성불평등한 노동구조의 위기 현상이 복잡하게 작용하고 있다. 앞서 제시했듯이 만혼화, 성비불균형, 저출산과 고령화의 인구불균형 현상이 심화된 데에는 젠더 불평등한 가족관계와 문화적 요인의 영향이 크다. 인구불균형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젠더 불평등한 가족관계와 사회제도 및 사회 인식이 변화되는 부분도 있지만, 인구 네트워크를 통해 외부에서 자원을 동원하는 전략도 강화되고 있다. --- pp.63-64
서울은 아시아에서 주요 도시 중 하나지만 도쿄와 같은 아시아 전체를 조율하는 역할을 담당할 수 없고 중국이라는 커다란 생산 및 소비 시장을 등에 업은 상하이와 같은 역할을 담당할 수 없다. 네트워크 측면에서 서울에서 필요한 관점은 도쿄와 상하이라는 신구세력을 조율하는 중간자적 역할을 담당하는 한편, 네트워크 내에서 전략적인 관계들을 형성함으로써 독특한 위치를 점유하는 것이다. --- p.107
최근 동아시아 국가들의 행보를 보면, 동아시아 지역협력과 공동체의 구상이 제기되는 가운데 일국 차원에 고착된 발전전략과 민족주의적 정서가 표출되는 양상이 발견된다. 그야말로 협력의 비전과 갈등의 현실이 공존하고 있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동아시아 공동체라는 ‘21세기의 꿈’과 근대 국민국가 모델의 잔존이라는 ‘19세기적 현실’ 이 모순적으로 병존하고 있는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러한 논제를 좀 더 개념적인 시각에서 이해하기 위해서, 사회학이론과 국제정치이론에서 흔히 거론되는 삼분법, 즉 공동체 ↔ 사회 ↔ 체제의 스펙트럼을 원용해보자. 이들 개념은 사회질서(또는 세계질서)를 구성하는 행위자들 간의 관계를 조율하는 구성원리와 작동방식을 이해하는 데 유용하다. --- p.125
21세기 동아시아 질서는 지구화 시대의 초국적 네트워크의 부상, 중국이 주도하는 전통 동아시아 질서의 부상, 그리고 패권경쟁과 국가경쟁으로 대변되는 근대 국제질서의 잔존이라고 하는 세 가지 가능성이 복합된 형태로 발현되는 모습이다. 다시 말해 동아시아 네트워크 질서는 주권국가 단위의 근대 국제질서의 모습이 압도하는 가운데 지구화의 과정을 통해서 구현되는 탈(脫)국제질서가 중첩되고, 향후 중국 중심의 전통 천하질서의 구상이 가미될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네트워크의 시각에서 본 동아시아 지역질서의 현재는 주권국가 질서를 근간으로 하는 가운데 이를 침식하는 새로운 변화들이 늘어가고 있는 복합적인 네트워크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 p.129
동아시아를 향해서 한국이 네트워크 전략을 추구해나감에 있어서 네트워크의 개념을 단순히 전략적인 도구로만 받아들여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예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이해하고, 이 안에서 한국이 자리잡을 위치와 담당할 역할에 대한 프레임을 짜서, 여러 동아시아 국가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동아시아 표준을 수립하기 위해서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한국의 협소한 국가 이익을 위해서 이러한 네트워크를 전략으로 활용하는 방식으로 동아시아 주변 국가들을 대한다면 그 결과는 어떠할까? 전략으로서 네트워크 외교전략을 채택하는 실행주체의 모습을 되돌아보았을 때, 정작 한국의 국가 모델은 여전히 근대적인 의미의 노드형 행위자, 즉 근대 국민국가 모델에만 집착하고 있다면 그러한 네트워크 전략 자체가 궁극적으로 얼마나 효과를 볼 수 있을까? 동아시아 국제질서나 한국의 외교전략에 대한 논의에 네트워크 시각을 원용했던 작업이 존재론적 차원에서 한국의 국가 이익과 국가 형태에 대한 논의로 확장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특히 과거의 개도국에서 오늘날 이른바 중견국(中堅國, middle power)으로 발돋움한 한국이 효과적으로 외교전략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존재론적 고민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 p.1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