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신라 동궁의 변화와 임해전의 성격
2. 동궁의 내부구조와 성격 변화
1) 동궁의 내부구조
월지, 즉 안압지에서 ‘사정당(思正堂)’이란 명문이 새겨진 철제자물쇠가 발견되었는데,49 이에서 동궁 내에 사정당이란 당호(堂號)를 가진 건물이 존재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애장왕 5년(804)에 동궁에 만수방(萬壽房)을 지었다고 한다. 이밖에 목간을 통하여 동궁에 우궁(隅宮)이 존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정당(思正堂)은 ‘정사(政事)를 바르게 행하기를 생각하는 건물’이란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남조시대 동궁의 정전(正殿)이 숭정전(崇正殿)이며, 이것을 숭정전(崇政殿)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이에 의거하여 사정당(思正堂)을 사정당(思政堂)으로 표기하여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주지하듯이 경복궁의 편전(便殿)이 사정전(思政殿)인데, 정도전(鄭道傳)은 ‘매일 아침 이 전에서 정사를 보시고, 만기(萬機)를 거듭 모아서 전하(殿下)에게 모두 품달(稟達)하면, 조칙(詔勅)을 내려 지휘하기 때문에 더욱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에 신은 이 전을 사정전(思政殿)이라고 명명하기를 청합니다.’라고 언급하였다. 이상에서 언급한 여러 정황을 두루 감안하건대, 사정당이 동궁 내에서 가장 핵심적인 건물, 즉 태자가 정무를 처리하거나 태자가 학문을 닦거나 또는 태자와 관련된 여러 가지 의례를 거행하던 건물이었다고 보아도이론이 없을 것이다.
최근에 안압지 동편에 대한 발굴조사를 진행하여 여러 건물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가운데 1호 건물지는 정면 9칸 이상, 측면 4칸을 가진 동향 건물이고, 남·북 양 끝에 계단시설을 설치하였던 것으로 조사되었다. 현재까지 발굴된 건물지의 평면 크기는 정면 16.4m, 측면 13.2m이며, 한 칸의 규모와 형태는 정면 2.4m×측면 3.2m의 장방형 또는 2.4m×2.4m나 3.2m×3.2m의 정방형으로 구분된다고 한다. 발굴보고자는 이 건물을 7세기 후반에 조성된 전각건물로 추정하였다. 1호 건물지와 관련이 있는 남북방향으로 설치된 1호담장지와 그것과 연결된 회랑지는 현재까지 95.6m 이상의 길이인 것으로 알려졌다. 1호 건물지와 담장지는 7세기 후반 동궁을 조성할 때에 적어도 정면 9칸 이상의 전각건물과 아울러 그 동편에 담장을 둘러 동궁의 경역을 분명하게 설정하였음을 시사해주는 고고학적인 자료로서 주목된다고 하겠다.
애장왕 5년(804)에 건립한 만수방을 1호 건물지와 연관시켜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궁에 동문(東門), 서문(西門), 북문(北門), 개의문(開義門)이 존재하였다. 우궁은 사방에 문이 있는 건물이었고, 각 문마다 교대로 문을 지키는 수위(守衛)들을 두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와 같은 우궁의 성격을 감안한다면, 1호 건물지를 우궁과 연결시켜 이해하기는 힘들고, 아마도 태자와 그의 가족들이 일상생활을 영위하던 건물이었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한다. 동궁에 임해전(臨海殿)이 있었는데, 그것은 월지 서편에 위치하였다.58 이처럼 만수방과 우궁, 임해전 등을 1호 건물지와 연결시키기 어렵다고 한다면, 일단 1호 건물지와 사정당과의 연관성을 한번 상정해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아직까지 1호 건물지와 동궁 영역 전체를 발굴하지 않았기 때문에 1호 건물지를 사정당과 직접 연결시키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튼 여기서는 단지 그 가능성만을 제시해 두는 차원에서 머물고 싶으며, 차후에 발굴조사가 더 이루어진다면, 사정당과 1호 건물지와의 관계에 대한 보다 심층적인 이해가 가능해질 것으로 기대된다.
2) 동궁의 성격 변화
경덕왕 11년(752) 동궁관을 설치하기 이전까지 동궁의 여러 잡다한 업무를 처리하던 포전, 급장전 및 월지와 관련된 업무를 수행하는 월지전, 월지악전, 용왕전 등의 여러 관청을 내성에서 관할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동궁 역시 내성에서 관할하였음을 전제하는 것인데, 이에서 경덕왕 11년 이전까지 동궁 역시 내성에서 관할한 양궁, 사량궁, 본피궁, 영창궁 등과 같은 성격의 이궁(離宮)으로 인식되었음을 다시금 상기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경덕왕 11년(752) 8월에 동궁관·동궁아를 설치하면서 내성이 아니라 동궁아가 동궁의 여러 건물과 관청을 관할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동궁은 태자의 공간임을 제도적으로 보장받게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렇다면 경덕왕은 왜 하필이면 752년 무렵에 동궁의 위상을 새로 정립하기 위한 조치를 단행하였을까가 궁금하다.
경덕왕의 첫 번째 왕비는 삼모부인(三毛夫人)이었다. 그녀는 경덕왕 즉 위 이후에 아들을 낳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출궁(出宮)당하였다. 경덕왕은 743년(경덕왕 2) 4월에 서불한(舒弗邯) 김의충(金義忠)의 딸을 맞아들여 왕비(王妃)로 삼았는데, 이가 바로 만월부인(滿月夫人)이다. 만월부인은 한동안 아들을 낳지 못하다가 경덕왕 17년(758) 7월 23일에 건운(乾運)을 낳았다. 경덕왕이 애타게 아들 낳기를 바랐음은 ?삼국유사? 권제2 기이제2 경덕왕 충담사 표훈대덕조에 표훈대덕(表訓大德)으로 하여금 상제(上帝)께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청원하여 겨우 아들을 얻게 되었다는 내용의 설화가 전하는 사실을 통하여 엿볼 수 있다. 경덕왕은 소망하던 아들을 얻자, 겨우 만 2살밖에 안 된 건운을 경덕왕 19년(760) 7월에 서둘러 태자로 책봉하였다. 경덕왕이 건운의 태자 책봉을 서두른 이유와 경덕왕 11년(752) 동궁의 위상을 강화하는 조치를 취한 것은 밀접한 상관관계를 지녔을 것으로 판단된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