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초반 필자가 대학 시절부터 경험한 아르바이트는, 대체로 여성이라면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다고 간주되는 서비스직 노동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 사회에는 ‘감정노동’이라는 말이 널리 통용되지도 않았고, 서비스직 종사자의 고충이 매스컴에 보도되는 것도 드문 일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대중을 경악케 할 만한 몇몇 사건이 연이어 매스컴에 보도되며, 서비스직 종사자의 열악한 근무 실태에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감정노동’이 ‘갑질 논란’이라는 용어와 함께 급속도로 퍼져나가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이제 감정노동이라는 말은 대중에게 더 이상 낯선 용어가 아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일상의 모든 감정 관리 행위까지 감정노동이라는 용어로 부르고 싶어 할 만큼, 감정노동은 대중적 언어로 자리잡았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서비스직 종사자는 ‘감정노동자’라는 새로운 분류 체계로 구분되기에 이르렀다. 법의 사각지대에 있는 감정노동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입법안이 지속적으로 발의될 만큼 감정노동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뜨거웠고, 이 과정에서 서비스직 종사자는 보호해야 할 사회적 약자로서 그려지게 되었다.
이 책은 이러한 한국 사회 감정노동 논의의 흐름에 대한 비판의식―실제로는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고 찜찜한 마음―에서 시작된 연구의 결과물이다. ‘감정노동’이라는 용어가 그동안 필자가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다양한 서비스직 노동을 포괄할 수 있는 범주적 개념에 해당하는가에 대한 막연한 의구심은, 현재와 같은 감정노동 논의가 궁극적으로 ‘여성 노동’에 대한 인식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졌다. 필자는 이러한 물음의 해소를 위해 감정노동으로 범주화된 대표적 직군인 콜센터 상담원의 구체적 노동 과정을 살펴보았고, 이를 통해 실질적 서비스 노동과 감정노동 간의 관계를 확인할 수 있었다.
부족하나마 이러한 고민의 과정을 통해 도출한 본 연구의 결과가 여성 다수에 의해 수행되는 서비스직 노동에 대한 왜곡된 이해를 바로잡는 작업의 일환으로 이해되고 또 활용될 수 있기를 바란다.
--- 책머리에 중에서
대표적 여성 집중 직종의 하나인 콜센터 노동이 오랫동안 표준화된 단순 반복적 업무로 간주되며 사회적으로 저평가되었던 것 또한 이러한 맥락 안에서 해석될 수 있다. 특히 콜센터 상담원에게 요구되는 자질인 의사소통 능력과 공감 능력, 친절함 등이 전통적 여성의 특성과 일치한다는 통념은 해당 노동을 여성에게 적합한 일, 혹은 여성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저숙련, 저임금의 노동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실제 희망카드 콜센터의 채용 공고에는 여성 우대의 조건이 고시되어 있었다. 신입사원 면접 당시 여성 우대의 이유를 묻는 필자의 질문에 면접관은, 콜센터 노동은 “욱하지 않는 여성에게 아무래도 유리한 업무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콜센터 상담원에게 요구되는 업무상 자질 중 하나인 감정 관리의 능력이 성별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성격적 특성에 대한 성별 고정관념에서 비롯된다.
--- pp.153-154
서비스직 종사자의 감정노동 수행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됨에 따라, 최근 서비스직 종사자를 보호와 치유의 대상으로 규정하고, 이들의 치유를 기업이 제도적으로 지원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최근 서비스 산업 내에서 유행하고 있는 심리 상담 지원 프로그램과 각종 교육 프로그램, 힐링 캠프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많은 기업에서 일종의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는 이 같은 상담, 교육 프로그램이나 캠프 등은 실질적으로는 직원들에 대한 일회성 복지 혜택인 경우가 많다. 다만 감정노동 문제의 심각성과 이에 대한 해결을 촉구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를 외면한 채, 힐링이라는 키워드를 적용한 근시안적이고도 뜬금없는 대책들을 내놓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일회성 감정노동 대응책들이 서비스직 종사자들이 당면한 문제의 해결책을 포괄할 리는 만무하다.
이들이 당면한 문제가 그 각각의 정확한 이름으로 불려질 때, 비로소 우리는 그 각각의 진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고민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감정노동의 문제가 아닌, 서비스직 종사자들이 당면한 고용 형태와 열악한 근로 환경의 문제, 작업장 폭력의 문제, 평가절하된 직무 전문성의 문제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 pp.179-1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