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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2년 01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175쪽 | 254g | 126*204*20mm
ISBN13 9788927802969
ISBN10 8927802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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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라는 말-주역시편·310

(중략)
그림자들 대부분이 사라지고
지평선은 가장 먼 곳에 있다.
먼 곳은 바라보지 않으므로 더 이상 먼 곳이 아니다.
내 안의 우울이 우물이 되고
고독은 차라리 천직이 되었을 때
가끔 무릎을 꿇고‘패배’라는 말을
혼자 되뇌곤 했었지.
나는 스무 살 이후 길을 잃었다.
갈 수 없는 길들이 술 마시게 했다.
이 빠진 술잔들에 입술을 대며
더는‘패배’라는 말을 쓰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땡볕에 얼굴과 팔이 그을린 여름 소년은
무지개라도 먹고 싶었다.
어린 시절 뒤를 돌아보면
흙속에 묻힌 사금파리들이 반짝거리듯
미래가 보였지.
반쯤 뜬 눈으로 지나간 노란 꽃들을 바라보자,
‘패배’를 더는 모르는 불행을,
내일의 내일이거나
혹은 사물들의 사물들을!

--- p.26-27


언젠가-주역시편·700

저지방 우유를 마시고
너와 물 마른 강가를 거닐고
너와 헤어질 거야.
그 거리에 바람이 불면 너를 그리워할 거야.
너를 잊고.
다시 너와 만날 거야.
너와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를 거야.
어느 날 망치들이 소녀의 머리를 내려치지.
소녀의 사생활은 산산이 깨져버리지.
외할머니들은 세상을 뜨시겠지.
이태 뒤 혹은 삼 년 뒤에.
겨울이 오면 산은 밤새 북풍에
떨며 울 거야. 그다음
미친개와 뻐꾸기들과 바람난 꽃들이 깔릴 거야.
헌 옷들에서 단추가 떨어지고
쌀독은 바닥이 드러날 거야.
민들레꽃들 사이에서 너는 웃고 있을 거야.
없는 너,
없는 너,
네가 사춘기의 소녀라면 아마 나는
얼굴이 빨개질 거야.
늦여름 저녁 바람이 불고
수수밭 수수들이 큰 키를 휘며 누울 때
나는 너를 기다릴 거야.
나는 너를 기다리지 않을 거야.

--- p.94-95


거울과 계단-주역시편·203

(중략)
죽는 것은 태어나는 것보다
힘든 일이다.
영안실 계단을 내려가는 일이
익숙해질 무렵,
최경량급 우울을 상대하는 일도 버거워서
시냇물의 노래에나 귀 기울인다.
나는 지금 자주 우울하고
권태의 가장 긴 구간을 통과하는 중이다.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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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삭도로 밀어버리고 차갑게 반짝이는 빙설 속으로 걸어가는 그를 보았다 .
그는 시인이 아니라 시의 질풍노도인지도 모른다.
생이라는 거대한 추상 속을 오직 문자(文字)라는 홑겹의 옷을 걸치고 맞서고 있는 그의 구멍과 틈새에는 늘 위험하고 불길한“ 조짐”이 번쩍거릴 뿐이다.
그 눈부신 “조짐”을 생의 축복으로 받아들이는 시인, 그래서 그의 시는 철학 혹은 현실, 명상과 관조 무엇을 노래하건 그것이 곧 슬픔의 고고학이 되고, 빙설 속 벌거벗은“ 몸”이 된다.
그의 시집 『오랫동안』의 숲 속을 거니는 동안 오도도! 떨려오는 전신을 두 팔로 깊이 감싸 안았던 것은 그 때문이다.
문정희(시인)
장석주는 윤동주, 기형도와 함께 영원한 청년시인이다. 그의 주역시편이 패배를 예찬하는 까닭,“ 그 많은 실패들이 다정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패배’를 더는 모르는 불행을!”(「‘패배’라는 말」) 이것은 불행이 자유의지로 선택한 패배의 최종적인 국면이라면 받아들이겠다는 뜻이다. “너는 네 배후로 불굴의 패배를 부양하는구나 패배를 배우지 못한 것들이 거들먹거린다.”「( 잎과 열매」) 이것은 패배하겠다는 의지야말로 진정한 자유의지임을 말한다.“ 모든 실패는 어리고 순진하다.”(「서쪽」) 이것은 실패에만 순수한 최초의 자유의지가 깃들어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과 그것의 집적만이 운명을 만들어낸다. 점쟁이들은 이 운명이 시간을 복속하고 있다고 가르친다. 시간을 지배하는 운명은 가장 타락한 형태의 결정론이다. 주역의 속화된 가르침을 깨고, 주역의 안팎에서 세계의 모습을 세우기 위해서 시인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의지를, 그것도 순수한 실패에 대한 의지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권혁웅(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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