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회의 에너지 문제를 국제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장 대 정부’ 또는 ‘시장친화적 정부 대 자원민족주의적 정부’라는 흑백논리를 지양해야 한다. 대신 에너지 자원과 가치사슬 전반을 가로지르는 국가와 각종 행위자들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정부, 시민사회, 투자자의 상호작용을 이해하는 방식으로는 정치경제학적인 관점이 대단히 유용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경제성을 확보한 자원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이 장에서 적용한 상호작용, 자원의 접근·개발에 관한 제도주의, WTO 체제 밖에 존재하는 규칙의 진화를 지배하는 권력 구조, 그리고 화석연료·재생가능에너지·전력 시장에 참여하는 모든 구성원의 상호작용을 면밀히 검토해야 할 것이다. --- p.61
파국적인 기후변화의 위험을 줄이기 위해서는 에너지 서비스의 제공 과정에 소비되는 화석연료의 양을 상당히 줄여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저탄소 에너지 시스템으로의 전환이 요구될 수밖에 없다. 저탄소 에너지 시스템으로의 전환이라는 결론은 에너지 단위당 배출되는 이산화탄소의 감축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해결책은 에너지 수요가 안정적이고 저탄소 에너지 및 CCS와 관련된 정책이 존재하며 자금을 조달할 수 있을 만큼 경제력이 풍부한 OECD 회원국, 특히 유럽 에너지 정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 p.114
에너지는 산업사회의 근간이었으며, 지난 400년 동안 우리는 값싸고 풍부한 화석연료를 기반으로 해서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개발도상국의 수십억 인구가 부유한 산업국으로 진입할 무렵, 석유 생산은 한계에 이르렀고 기후변화 같은 문제도 발생했다. 이로 인해 우리는 기존의 발전 방식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하게 되었다. 물론 가격이라는 수단은 탄소와 에너지 집약도가 낮은 발전 방식을 채택하게 만드는 강력한 유인 장치다. 그렇지만 이러한 가격 유인 체계가 자원 고갈, 온실가스 배출, 생물 다양성 감소 같은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 p.136
가스 시장은 무중력의 진공 상태에서 작동하는 게 아니다. 아무리 비정치적인 시장이라고 하더라도 가스 시장은 국가에 의해 형성되고 제도에 의해 규칙이 마련될 수밖에 없다. 가스와 관련해서 경제학은 정치학을 뛰어넘을 수 없다. 결국 천연가스 시장의 미래는 미국, 벨기에, 중국, 카타르, 러시아의 전략적 결정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다. --- p.198
산유국이 상류 부문에 대해 양허계약을 체결하거나 개발도상국에서 생산분배계약을 더욱 자주 체결하는 이유는 이들 국가의 석유 정책과 법률 때문이다. 몇몇 예외적인 경우에는 대규모 산유국이 위험부담계약을 체결할 수도 있다. 한편으로는 새로운 조건이 비전통적인 석유 및 천연가스에 적용될 수도 있다. 따라서 국가의 개입은 각국의 석유 정책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며, 이는 전체 재정 패키지의 일부분일 수밖에 없다. --- p.252
국영 석유회사가 제대로 작동하면 국내적인 경제 정책과 거버넌스를 수용함으로써 석유 부문의 성과를 증진시켜 자국의 지속가능한 발전과 안정성에 상당히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결과는 국제적인 에너지 공급 및 안보에 좋은 징조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국영 석유회사와 관련해서 명백히 드러나는 제도적 위험을 예방하고 더 나은 성과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국내외의 정치적 의지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즉, 제도적 역량의 강화, 투명성의 개선, 재무적 책임성의 확대에 대해 더 높은 수준에서 정치적으로 약속해야 할 것이다. --- p.269
처칠이 석유의 정치화와 세계화를 도입한 이래 100년이 지나갔다. 이 기간 동안 석유 사업은 소수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통제되었다. 즉,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뒤에는 연합국이, 이후에는 7대 석유기업이, 마지막으로는 OPEC 회원국이 주도권을 장악했다. 오늘날에는 석유산업에서 영향을 미치는 이해관계자들이 늘어났으며, 구조는 더욱 복잡해졌다. 물론 이러한 ‘네트워크’ 구조가 전통적인 국제 석유회사를 배제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이들의 역할은 변하고 있으며, 산유국과 소비국 모두 국영 석유회사와의 협력관계를 계속해서 유지할 것으로 전망된다. --- p.324
핵확산금지조약의 모호한 조항들로 인해 회원국들이 원자력 기술의 개발에 몰두하게 되면서 핵 확산 방지의 주요 관심사인 핵무기 보유 능력이 오히려 확산되고 말았다. 물론 IAEA의 안전조치와 수출 규제는 매우 중요할 뿐 아니라 강화되어야 하지만, 이는 원자력 기술의 개발과 보급을 제한한다는 단점이 있다. 따라서 미래에는 새로운 정치적 접근과 다자간의 제도적 접근이 필요하다. 핵 확산의 망령과 원자력 에너지 공급 간의 긴밀한 관계는 지속될 텐데, 이는 국가의 에너지 선택과 복잡한 국제 안보 상황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 p.381
바이오연료는 이미 식량 안보와 농업 개발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국제적인 차원에서는 미국과 EU의 대규모 프로그램이 식량 가격의 폭등, 바닥난 식량 비축, 높아진 가격 변동성을 일으켰을 정도다. 그렇지만 개발도상국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요구를 제대로 관리하고 이 요구를 정책 목표로 설정한다면 바이오연료 생산은 부분적으로 발전적인 기회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물론 실패할 위험성도 상당히 높으며, 지금까지의 경험으로는 이를 장려하지 않는 것이 합리적인 판단일 수도 있다. --- p.472
경제 유인적인 방식과 규제, 이 둘 중 단 하나의 정책과 수단만으로는 지속가능한 에너지라는 측면에서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 어렵다. 이론상으로는 경제적 수단이 규제에 비해 탄력적이기 때문에 효율성이라는 측면에서 우위를 선점할 수 있다. 그렇지만 현실에서는 항상 그런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시장의 불완전성으로 인해 경제적 수단보다 규제가 더 바람직할 수도 있다. 가장 적합한 형태의 규제는 국가적 맥락에 따라 달라지며, 또한 특정 정책 수단이 항상 우월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예를 들면, 성과 기준 규제가 기술 기준 규제에 비해 항상 우월하다고 할 수는 없다. --- p.525
유럽이 전력 시스템과 관련된 야심찬 정책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규제 장벽과 기타 비재정적인 정책 집행의 장애 요인들을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신흥경제국 및 개발도상국은 유럽의 성공과 실패의 경험을 통해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많은 개발도상국의 발전 시설들은 전력망을 소유·운영하는 권한뿐만 아니라 전력을 공급하는 권한까지도 수직적으로 통합해서 운영해온 실정이다. 따라서 EU 규제 시스템의 진화는 전력 부문을 자유화하려는 개발도상국들에 유용한 기준이 될 수 있다. --- p.559
중국의 에너지 소비·생산 및 에너지와 관련된 정책은 국제적인 에너지·기후변화 정책뿐만 아니라 에너지 시장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실제로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큰 에너지·석탄 소비국이자 탄소 배출국이다. 동시에 에너지 효율을 개선함으로써 저탄소 에너지와 청정에너지를 개발하는 시범 국가로 전환하기 위한 정책을 적극적으로 장려하는 국가이기도 하다. 향후 10년간 중국의 노력과 성과는 자국의 에너지 및 환경 문제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서의 위상에도 중요한 영향을 끼칠 것으로 판단된다. --- p.659
보조금은 고효율 기술의 도입을 방해하는 작용도 할 것이다. 1인당 평균 소득 뒤에 숨어 있는 인도의 탄소 집약도는 부자와 중산층 때문에 불균형이 심해질 것이다.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3억 명의 도시 사람들은 탄소 배출을 억제하려는 국제사회의 노력에 상당한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저렴한 연료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탄소세에 강하게 반발할 것이다. 보조금의 덫에 갇힌 인구가 많을수록 지구온난화에 대처하는 국가적인 노력이 어려움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다. --- p.684
특이하게도 EU의 대외 전략이 가속화됨에 따라 EU의 기후변화 정책과 에너지 정책에 새로운 불확실성이 서서히 높아졌다. 일부 국가의 기후변화 목표는 더 이상 개선되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정작 유럽 기후변화 목표의 대외적 영향은 분명히 확산되는 중이다. 전략적인 자기반성과 뒤섞인 위기는 대외 목표의 타당성을 악화시키고 있으며, 그 영향은 ‘재생가능에너지 국제 파트너십’이나 기후기금과 같은 정책 영역에서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반대로 대외적 차원에서 EU가 펼친 전통적인 에너지 안보에 대한 정책 공약은 지난 20년 동안 국제적인 기후변화 정책보다 훨씬 더 발전해왔다. 비전통적인 화석연료의 출현이 이러한 경향을 더욱더 강화시키는 듯하다. --- p.709
현재 미국의 에너지 거버넌스는 복잡할 뿐만 아니라 모순적·단편적·정치적·역동적이라고 할 수 있다. 국민들에게 봉사해야 하는 공적 의무, 저렴한 가격, 크고 정교한 기술의 준수, 수요 관리, 기술에 대한 믿음, 전문가 및 기술 관료에 대한 신뢰, 사익 대비 공익의 우선처럼 과거 미국 에너지 정책의 기조를 형성했던 역사적 원칙들이 지금 다시 중요해지고 있다. 즉, 지금은 어떤 지배적인 원칙이 미국의 에너지 정책을 주도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 p.744
나이지리아는 ‘자원의 저주’라는 네덜란드 병의 대표적인 사례다. 즉, 제품의 가격 결정에 내재된 호황과 파산, 그리고 무능하고 이기적인 관료가 주도하는 중앙 집중적인 권위주의 국가라는 현상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1960년을 기점으로 영국의 과거 식민지 체제는 약탈적인 국정 운영과 무책임한 통치 체제를 후임자에게 물려주었다. 석유가 풍부한 지역에 사는 주민들의 재산을 빼앗았던 식민지 시대의 불공정한 법은, 나이지리아가 독립한 뒤에도 지배 계층 사이에서 석유를 놓고 무자비한 경쟁을 벌이는 부패한 독재자에 의해 그대로 계승되었다.
--- p.8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