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장을 한다면…… 대신 조건이 있어.” “설마…… 집 밖으로 나가서 방귀를 뀌고 들어오라는 건 아니죠?” 소은이 꽤 심각한 표정으로 묻자 진혁이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보다는 조금 더 까다로운 조건이야.” 진혁의 말에 소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뭔데요?” “아기를 가져야 해.” 진혁의 말에 그 즉시 소은의 표정이 이지러졌다. “아기요?” “응, 아기.” “정말 아기가 갖고 싶어요?” 소은이 아무래도 의심스럽다는 얼굴로 재차 물었다. “결혼한 부부가 아기를 갖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것 아닌가?” “지금까지 우리는 지극히 정상적인 부부가 아니었잖아요. 앞으로도 그럴 거고.” 소은이 정곡을 찌르자 일순간 진혁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다. “계약을 연장하면서 계속해서 아기를 갖지 않는 것은 아무래도 보기가 좋지 않으니까.” “보기에 좋지 않다고 해서 시한부 부부가 아기를 갖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어요. 계약 연장을 위해서 아기를 담보로 잡을 만큼 난 잔인하고 무모한 사람도 아니구요. 바꿔 말하면 진혁 씬 굉장히 잔인하고, 무모하고, 위험한 사람이란 뜻이에요.” 소은이 또다시 매우 중요한 부분을 거침없이 꼬집어주자 진혁은 쉽게 받아치지 못했다. 진혁이 아기 얘기를 한 것은 사실 정말 아기를 갖고 싶어서가 아니라 소은을 골려주기 위해 즉흥적으로 내뱉은 소리였다. 계약 연장 부탁이 퍽 반갑지 않기도 했거니와 소은이 계약 연장을 위해 과연 도박을 할 것인지도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진혁은 내놓아야 할 담보물이 너무 크기에 소은이 틀림없이 계약 연장을 철회할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막상 소은이 매우 논리적이면서도 공격적으로 모집자 당황스러웠다. “당신은 단 한 번도 맨 정신으로 날 안은 적이 없는데 아기를 갖고 싶다니…… 혹시 무슨 심경의 변화나…… 우울증 생겼어요?” “우울증 생기면 아기가 갖고 싶나?” 진혁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듯 소은을 노려봤다. “갑자기 사람이 변하니까 수상해서요.” “수상할 것 없어. 아까 말했다시피 아기를 갖지 않고 계약만 연장할 경우 분명히 이런저런 말들이 들려올 거라서 한 얘기야.” “궁금해서 그런데…… 아기를 갖자는 건 진혁 씨 생각이에요, 아니면 서초동 생각이에요?” 소은이 조심스레 물었지만 그 조심스러움 안에는 왠지 모를 의구심과 적대감이 깃들어 있었다. “내 생각이기도 하고 서초동 생각이기도 해.” 서초동이기도 하다는 말에 소은의 의구심은 더욱 커졌다. “정말 서초동에서 아기 가지라고 했어요?” “결혼한 지 3년이 지났는데 아기 소식이 없으니까. 당연하지 않아?” “아기 얘기…… 아버님이 하셨어요, 어머님이 하셨어요?” “왜 묻지?” “……어제 서초동에 갔을 때 제일양행 윤 사모님이 아기 언제 가지려고 하냐고 물으셨는데…… 어머니께서 나를 따로 불러서 당분간은 아기 갖지 말라고 하셨거든요.” “어머니가?” 진혁의 미간이 희미하게 일그러졌다.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웨딩드레스 가봉하던 날도 그러셨어요. 우리 결혼하고 다음 해 띠가 안 좋으니까 임신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결혼식 올리기 직전에 신부 대기실에서도 또 말씀하셨고요.” 소은의 설명에 진혁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여전히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린 채 소은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소은 역시 무언가 이상하고 수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굳은 표정으로 진혁을 쳐다보다가 씁쓸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쨌거나 어머니 뜻대로 됐죠 뭐. 하늘을 봐야 별을 따든지 조심하든지 했을 텐데 하늘을 못 봤으니.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진혁 씨가 고의적으로 날 멀리하는 바람에 난 엄청난 창피와 수모를 당했어요.” “창피와 수모를 당하다니?” “나 불감증 환자로 소문나 있어요. 맛없는 여자로 찍혀 있다구요. 몰라요?” 소은의 말에 진혁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졌다. “맛이 없어?” “과장 아니에요. 정말로 ‘맛없다’는 표현을 했으니까.” “누가? 누구야?” 진혁이 낮지만 분노가 느껴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최초로 누구의 입에서 시작됐는지 나도 알고 싶네요. 하여튼 만약에 정말로 서초동에서 아기를 가지라고 했다면…… 거참 희한하네요. 갑자기 왜 말을 바꾸셨는지.” 소은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다가 진혁을 똑바로 쳐다봤다. “한 가지 알고 싶은 게 있는데…… 날 그렇게 악착같이 멀리한 게 계약 때문에 문제를 복잡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어요, 아니면 정말 내가 맛이 없어서예요?” 소은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계약 때문이었어.” 진혁이 담백하게 대답했고 소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믿기진 않지만…… 믿고 싶네요.” “진심이야.” “그나마 다행이네요.” 소은이 착잡한 어조로 말했다. “그런데 어머닌 왜 몇 번이나 아기를 갖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띠가 좋지 않다고 하셨다면서.” “나도 처음엔 그저 단순하게 그렇게 생각했는데…… 지금 갑자기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드네요.” “다른 이유라니?” “혹시, 어머니께 우리 계약 얘기했어요?” “아니. 비밀로 하기로 했잖아.” “그렇다면…… 뭐라고 단정적으로는 말할 수 없지만…… 내가 모르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이상하지 않아요? 아기 갖지 말라고 하셨다가 하루 만에 말을 바꾸신 거…… 갑자기 몹시 복잡해지네요.” 소은은 정말 복잡해진 표정으로 진혁을 바라보다가 돌아섰다.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표정으로 침실에서 나온 소은은 곧장 주방으로 가서 냉장고 문을 열고 우유팩을 꺼냈다. 우유를 가득 채운 머그컵을 전자레인지에 넣고 데움 버튼을 누른 소은은 둥근판 위에서 돌아가는 머그컵을 심각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사실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 없었다. 계약을 연장하려면 아기를 가지거나 아기가 싫으면 예정대로 석 달 후에 갈라서면 되니까. 편하고 합리적인 편을 선택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편리하고 합리적인 편을 선택하는 것. 아주 쉬웠다. 정말 쉬웠다. 하지만 쉬운 선택권 안에 함정이 도사리고 있었다. 아기? 누구를 위해서 무엇을 위해서 아기를 갖는단 말인가. 단지 계약 연장을 위해 아기를 갖는다? 그것이야말로 골백번은 고쳐 생각해야 할 만큼 위험한 생각이었다. 고운 정은 물론이요 미운 정조차도 없는 사람과의 사이에서 아기가 태어난다면…… 3년 가까이 아내를 내팽개친 남편인데, 그래도 남편이고 부부니까 아기를 가져야 한다고? 아니, 그럴 수는 없었다. 그건 소은을 위해서도 아기를 위해서도 못할 짓이었다. 아기를 이렇게 비계획적으로 낳을 생각을 하고 부부라는 전제만을 깔아두고 아기를 원한다는 것 자체가 아기에게 그리고 소은 자신에게도 예의가 아니었다. 그리고 생각할수록 뭔가 석연치 않았다. 결혼식 전부터 시작해서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시어머니가 아기를 갖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했었는데 오늘 진혁의 입에서 아기 얘기가 나오다니.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처음 시어머니의 입에서 아기 갖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이 나왔을 때만 하더라도 원래 어른들은 저렇게 손자 띠 걱정도 하시는구나 싶어서 그냥 곱고 순하게 받아들였었다. 또 솔직히 진혁과는 따로 비밀 계약을 맺은 상황이라 아기가 없는 편이 갈라설 때 편할 것 같았다. 그래서 한 점의 의혹도 없이 단순하게 생각하고 받아들였었는데 아무래도 단순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닌 듯했다. 정말 서초동에서 아기를 가지라고 한 걸까? 어머니는 어째서 하루 만에 말씀을 번복하셨을까? 정말…… 아기를 갖지 말라고 한 것은 단순하게 띠 문제였을까? 만약 다른 이유가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의문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보기 안 좋으니까 아기를 갖자는 것도 뭔가 석연치 않아…… 계약 연장해 달라는 말에 싫어서 뚱하더니 아기를 갖자고? 남자가 생리를 하는 것도 아니니 호르몬 때문에 변덕을 부릴 리도 없고 그럼 연장하기 싫어서 강수를 둔 건가?” 후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어쨌거나 아기는 안 돼…… 그냥 갈라서고 혼자 살게 도와달라고 할까?” “성북동 아버님이 가만히 두실까?” 진혁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돌아보자 진혁이 주방 입구에 서 있었다. 귀신도 아니고 무슨 남자가 소리도 없이 나타나? “아버진…… 상태가 많이 안 좋으세요. 이젠 날 구박도 못하시고 구속도 못하시는 지경이에요.” 소은의 말에 진혁이 놀란 표정으로 소은을 쳐다봤다. “얼마나?” “……스스로 하실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하지만 내가 알기론…… 회복되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건 2년 전이고…… 더 나빠지셨어요.” “…….” “……아기는 안 되겠어요. 아기를 낳는다 하더라도 어차피 기간은 1년 연장하는 건데 아기만 낳아주고 난 나와야 하는 거잖아요. 그건 씨받이나 다름없지 않겠어요? 설령 아기를 낳는다 하더라도 당신이 나한테 아기를 줄 리도 없고.” 소은이 속이 상한 얼굴로 말하자 진혁이 굳은 표정으로 소은을 바라봤다. “내가 아무리 양쪽 집안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씨받이는 싫어요. 난 그냥 집안 어른들이 바라는 모습대로 살 수 없는 성격일 뿐이지 알고 보면 그렇게 형편없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알아.” “모르잖아요.” 소은이 불쾌하게 뇌까린 후 전자레인지에서 머그컵을 꺼내 뜨겁게 데워진 우유에 인스턴트커피 두 스푼을 넣어 풀었다. “정리 정돈을 잘 못하고 우아하고 세련된 척하는 데 소질이 없고 천재적인 학업성적을 내지 못했다 해서 쓸모없는 사람은 아니라구요.” “…….” “경영에 소질이 없으면 다른 걸 하면 되는 것 아니에요? 잘하는 거. 내가 잘하는 거.” “그러면 돼. 다만 그룹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게 문제지.” “그렇죠. 그게 문제죠.” 소은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우유 커피가 든 머그컵을 들고 다시 침실로 들어가 책상에 앉았다. “일할게요.” 소은이 노트북을 켜며 말하자 진혁은 고개를 끄덕인 후 침대에 누웠다. “볼만한 책 없을까?”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생각에 잠겨 있던 진혁이 입을 열었다. “별다른 거부감 없다면 내가 번역한 거 볼래요?” “줘.” 소은이 책꽂이에 꽂혀 있던 책을 꺼내 진혁에게 건넸다. “책 보다가 잘게.” “잘 때 말해줘요. 스탠드 켤게요.” “음.” 진혁은 소은이 번역한 프랑스 작가의 책을 읽었고 소은은 어제 새로 시작한 소설을 번역하는 데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