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10/16 조창완(chogaci@hitel.net)
96년 하이텔 리터란에 독서일기를 쓰기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아, 구효서의 성장소설 '라디오 라디오'의 감상을 올린 이후 독서일기에서 '비밀의 문', '내목련 한 그루'와 계간지에 들어있던 '아우라지'의 평을 포함해 3개의 독서평을 쓴 것 같다. 처음에는 짙은 호감이었고, 두 번째는 동의(비밀의 문), 세 번째는 조금의 실망(내 목련 한 그루), 그리고 마지막은 역시라는 감탄이었었다.
그리고 그의 나이가 하늘의 명을 안다는 마흔을 넘었고, '비로소 죽을 때까지 소설을 쓸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새록새록 생긴다'(370p, 작가 후기)는 말을 할 수 있는 시기에 나온 소설집을 읽었다. 더욱이 작가 스스로가 장편보다는 단편이 맘에 든다는 소회를 밝혔으니, 상당히 중요한 작품집임에 틀림없다.
소설집 '도라지꽃 누님'(세계사 간)은 소설의 맛이 무엇인가를 잘 알려주는 작품집이다. 농밀하기는 이순원의 소설집 '말을 찾아서' 못지 않다. 작가라는 직업이 유난히 자기 새끼(작품)에 대한 집착이 강한 이들이지만, 작품집을 내면 대부분의 작가들은 열에 세넷을 건지는 편인데, 구효서나 이순원 같은 작가는 열에 여섯 이상을 건질 수 있는 작가들이다. 물론 그의 푸념처럼 원고료에 끌려간 원고도 있지만 작가는 이번 소설집에 자신을 담는데 충실했다.
소설의 배열은 어떤 것이 기초가 됐는지 모르지만 그리 산듯하지 못하다. 연하의 남자를 사랑한 여자에 대한 쓸쓸한 회고담인 '물 속 페르시아 고양이'는 형식에서 독특한 느낌이 있지만 일반 독자들에게 쉽사리 다가가기 어려운 형식이다. 형식이 부담스럽지 않은 뒤의 소설중에서 하나가 앞으로 나오면 독자들이 더 반가우지 않을 듯 싶다.
비교적 매끄럽게 읽히는 평을 쓴 정혜경이 전반적인 느낌에서 지적하는 황량한 삶들의 모습을 가장 잘 담은 '나무 남자의 여자'는 윤대녕 등 최근소설의 가장 많은 배경이 되고 있는 변산반도를 배경으로한 소설이다. 세상의 모든 음을 흡수하는 관음보살 같은 여자와 오랜 시간을 담은 침향을 소제로한 소설은 삶의 깊이를 성찰할 수 있게 하는 글이다.
'나그네의 꽃다발'과 '오후, 마구 뒤섞인'은 작가의 특장인 이야기 만들기 보다는 한 사건을 풀어내고, 그것이 주는 느낌을 독자에게 묻는 형식의 소설이다. 앞 소설은 이룰 수 없는 없는 사랑을 한 한 남자의 죽음을 다루고 있는 '메밀꽃 필 무렵' 같은 스타일의 소설이고, 후자는 문명적인 냄새가 풍기는 소설이다. 작가가 초기에 많이 쓰던 창작 방법인데, 낯설다.
표제작 '도라지꽃' 누님은 가족사에 대한 회고 형식으로 쓰여진 소설로 가정을 벗어 던지고 자신만의 삶을 찾은 셋째 누님에 관한 글이다. 얼마전 고속승진가도를 달리던 한 은행 지점장의 죽음에서 볼 수 있듯이 현대인들은 그 첫바퀴를 벗어나면 견디지 못한다. 이 소설은 그 도발을 실증하는 소설이다. 제도속에서 어설픈 삶보다는 일탈이 아름답다는 조금 과격한 소설로 읽혔다.
이윤기의 '두물머리' 처럼 강하고, 인상깊게 읽힌 '아우라지'는 이것만을 평해 놓은 글이 따로 있으니, 관심있는 이는 웹진 문예평론(http://writer.korea.com)에 있는 독서일기 가서 읽어볼 일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깊은 거리에 대한 쓸쓸한 회한을 볼 수 있는 인상깊은 글이다.
'애수의 소야곡'은 작가들에게는 드물게 볼 수 있는 작가의 '소설 창작관'이다. 소설을 쓰기 위해 오남리에 칩거한 작가가 만난 포장마차 주인. 그는 포장마차를 나와 집으로 가다가 자신의 옆에서 술을 마시던 여인에게 강한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그는 오십 인생을 순식간에 뒤엎고, 그날부로 사라진 포장마차를 대신해 포장마차를 시작한다. 자신에게 강렬한 기억을 남겨준 그 여인을 기다린다. 헐겁게 남자의 이야기를 듣던 작가는 자신이 칩거하는 집으로 돌아와 글을 쓴다. (궁극적으로 사람들에게 강렬한 느낌을 받게할 수 있는 글을 쓰기 위해)
'라디오 라디오'를 생각나게하는 소설 '포천에는 시지프스가 산다'는 흔히 장애인으로 일반인과 고립되어 있지만 너무나 평범한 이들이 갖지 못한 지혜를 가진 두 사람을 다루고 있다. 그리 친하지 않지만 20여년간 인연이 이어지는 포천에 사는 지독한 근시증을 가진 친구와 화자의 어린 시절 마을에 살았던 농아 박용준이 그들이다. 그들의 기억을 이어주는 생리대를 사는 장애인 남자를 통해 만들어지는 이야기는 단순히 순박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삶의 가치가 무엇이며, 의의가 무엇인지를 묻는 실존적인 질문을 던진다. 자신이 쌓은 탑을 아무런 집착없이 무너뜨리고 다시 쌓을 수 있는 삶. 대부분의 현대인이 잃어버린 무엇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키는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