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라네! 이런, 다들 연인을 그렇게 표현하지 않는가? 그녀가 얼마나 완벽한 여성인지 묘사할 능력이 나에게는 없다네. 예컨대 나는 그녀에게 붙잡힌 사랑의 포로란 말일세.
지적이며 순수하고, 당당하면서 상냥하고, 활기찬데다 행동력이 있으면서도 마음은 차분한 그런 여성이라네. 지금 늘어놓은 말들은 다 그저 그렇고 수준 낮은 추상적 표현일 뿐이지, 그녀의 진정한 모습이라곤 단 하나도 보여주지 못한다네.
--- p.30
헤어지면서 로테에게 그날 중으로 한 번 더 만나기를 청했어. 로테가 승낙했기에 그녀를 다시 찾아갔지. 해와 달과 별은 여전히 자기 할 일을 하고 있겠지만 그때부터 나는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네. 내 주변의 세상이 송두리째 사라진 기분이었어.
--- p.47
아침에 잠에서 깨면 “그녀를 만나야지!” 하고 외친다네. 밝게 떠오른 아름다운 태양과 마주하며 그녀와 만나야겠다고 외치는 거지. 그것 말고는 온종일 아무것도 바라는 일이 없다네. 모든 것이 그 희망에 잠기는 걸세.
--- p.71
나는 지금까지 이토록 행복한 적이 없네. 돌멩이 하나, 풀잎 하나까지 자연에 대한 감수성이 이토록 풍부해진 적도 없다네.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내 표현력이 풍부하지 못해 모든 것이 그저 내 영혼 앞에서 스치듯 어른거리기만 할 뿐 그 윤곽조차 그릴 수가 없다네. 그러나 점토나 밀랍이 있다면 뭔가 만들어낼 자신은 있지. 지금 같은 상태가 계속된다면 점토를 주물럭거리다 고작 케이크나 만들지도 모르겠네!
--- p.72
그는 내가 상식 있고 바른 사람이라 생각하는 모양이야. 로테를 향한 나의 충성 어린 애정,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며 내가 느끼는 따스한 기쁨을 아는 알베르트는 더욱 큰 승리감을 만끽하며 그녀를 더 깊이사랑하는 걸세. 혹시나 그가 작은 질투심으로 로테를
괴롭히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은 무시하기로 했네. 내가 알베르트 입장이라면 나 또한 질투라는 악마의 포로가 되지 않을 자신이 없으니까 말이야.
이런저런 일이야 어찌되었든 로테 곁에 머물 수 있다는 나의 기쁨이 사라져버렸다네. 이것은 어리석은 짓일까, 아니면 그저 내가 눈이 멀었을 뿐일까? 뭐라 이름 붙이든 상관없네! 그 사실이 중요하니까.
--- p.76
불치병에 걸려 하루하루 죽음에 가까워지는 이에게 차라리 단도를 꽂아 고통에서 단번에 도망치라고 말할 수 있겠나? 온몸의 힘을 모조리 앗아가는 병이 거기에서 벗어날 용기마저 없애버린 것은 아닐까? 자네는 비슷한 예를 들어 반격하겠지. 겁먹고 주저하다가 목숨이 위험해지느니 곪아버린 팔을 잘라내는 편이 낫다고 말이야. 나도 모르겠네! 서로 비유를
대며 싸우는 짓은 이제 충분하니 그만 하세. 빌헬름, 내게는 가끔, 아주 잠깐이지만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 뛰쳐나갈 용기가 생긴다네. 내가 어디로 가야 할지 깨닫는다면 주저 없이 걸음을 옮기지 않겠나.
--- p.79
내가 이렇게 어리석지만 않았어도 행복하고 멋지게 살았을 텐데. 지금의 나만큼 한 인간의 영혼이 행복해지는 상황을 만나기도 어려운 일이지. 우리 마음은 스스로 행복을 만들어내는 존재임이 틀림없네.
--- p.80
인간을 가장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불행의 근원도 된다는 것은 정해진 운명이란 말인가?
생동하는 자연에 대한 따스한 감정이 내 안에 충만하여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주변을 낙원으로 만들더니 이제는 나를 박해하는 고문자이자 고뇌하는 영혼이 되어 내가 어디를 가든 따라다닌다네.
--- p.93
친구여, 매 순간의 기억만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네. 형언할 수 없는 욕망을 다시 불러일으키려는 노력 덕분에 내 영혼은 다시 힘을 얻는다네. 하지만 곧 나를 둘러싼 것들이 얼마나 불안정한지 한층 더 느낄 뿐이지.
내 영혼 앞에 드리워진 커튼을 걷어낸 기분이네.
영원한 삶의 무대는 내 앞에서 한껏 입을 벌린 무덤의 구렁텅이로 바뀌었지. 그런데도 이것을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가? 모든 것이 지나가도? 모든 것이 빠른 속도로 굴러가고 그 존재를 잠깐이나마 유지할 힘도 없이 폭풍우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바위에 부딪쳐 산산조각 나도 말인가?
--- p.96
마음이 착잡해지는 꿈에서 깬 아침이면 그녀를 향해 손을 뻗는다네. 헛된 일이지만 밤이면 내 침대에 그녀와 함께 있는 상상을 하며 행복한 꿈에 빠지지.
--- p.97
풀밭에 나란히 앉아 그녀의 손을 잡고 쉴 새 없이 키스를 퍼붓는 꿈 말이야. 여전히 몽롱한 채 그녀를 찾아 손을 더듬다 보면 퍼뜩 잠에서 깨는 걸세. 심장을 쥐어짠 듯 눈물이 폭포를 이루고 나는 절망에 빠져 깜깜한 미래를 생각하며 흐느낀다네.
--- p.98
나는 절망에 빠졌고 지금도 머리끝까지 화가 났네. 이 일로 나를 야유하고 조롱하는 광경을 목격한다면 그자를 칼로 찔러버리겠어. 피를 보면 마음이 조금 나아지겠지. 아아, 이 답답한 가슴을 뚫기 위해 벌써 몇 번이고 칼을 쥐었네. 혈통이 좋은 말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그 말은 지나치게 흥분하거나 위기에 처했다고 느끼면 본능적으로 혈관을 물어뜯어서 호흡을 가다듬는다더군. 나도 그러고 싶은 기분이야. 내 혈관을 찢어 영원한 자유를 얻고 싶네.
--- p.137
불쌍한 청년이여! 그러나 나는 당신의 우울과 당신을 좀먹는 정신착란이 부럽소! 당신은 당신의 여왕에게 꽃을 주기 위해 희망에 찬 마음으로 길을 떠나지. 겨울에 말이오. 그러면서 당신은 꽃이 없다고 슬퍼하오. 꽃이 피지 않는 이유도 이해하지 못한 채. 그리고
나는… 나는 희망도 없고 목적도 없이 길을 떠나고 똑같이 집으로 돌아오지.
--- p.1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