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한국어의 의미 현상을 탐색하기 위한 지형도이다. 나는 오랫동안 한국어의 의미 현상을 관찰, 기술, 해석하면서 의미와 의미론에 대해 제대로 된 지형도를 그려 보고 싶은 소망을 간직해 왔다. 부족하지만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그동안 보고 듣고 생각한 바를 『한국어 의미론』의 이름으로 출판하게 되었다.
『한국어 의미론』은 6부 16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부는 의미론과 의미로서 의미론과 의미의 이해를 기술한 것이다. 제2부는 의미의 무리로서 개념과 범주화, 의미를 무리 짓는 어휘 항목들의 형상화, 동일한 단어 형태의 의미 변이를 기술한 것이다. 제3부는 의미 관계로서 계열관계와 결합관계를 기술한 것이다. 제4부는 의미의 확장으로서 의미의 습득, 비유의 의미, 의미의 변화를 기술한 것이다. 제5부는 문법과 문장의 의미로서 단어를 엮어 문장을 구성하는 규칙과 원리인 문법 및 문장의 의미를 기술한 것이다. 제6부는 발화와 문화의 의미로서 언어외적 맥락에 대한 발화와 문화의 의미를 기술한 것이다.
이 책을 쓰면서 다음 세 가지 기준을 잊지 않으려고 애썼다.
첫째, 한국어 의미 현상의 풍부함과 매력을 포착해 기술하고 해석하는 일이다. 언어는 사람의 정신세계?삶?문화를 이루어 내고 반영해 주는 원동력이며, 의미는 언어의 속살로서 그 핵심적 요소이다. 의미론이 의미 탐구의 방법론인 만큼 한국어의 의미 현상과 작용을 다양하고 유의미하게 밝혀내어 마땅하다.
둘째, 의미의 탐구는 언어 내적인 질서뿐만 아니라, 언어를 부려 쓰는 주체로서 사람의 몸과 마음, 그리고 언어공동체가 뿌리박고 있는 사회 문화적 배경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언어의 의미는 사람 특유의 몸과 마음, 그리고 사회 문화적 배경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으므로 그 상관성을 밝혀내어 마땅하다.
셋째, 언어의 원리?현상?지식은 세상사의 원리?현상?지식과 상통한다. 한 가지 사례로서 건축가 루이스 설리반은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건축뿐만 아니라, 생명체나 언어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따라서 의사소통의 목적을 위해 언어의 구조가 의미를 어떻게 표현하고 이해하도록 짜여 있는지, 또한 의미가 구조에 대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밝혀내어 마땅하다.
돌아다보니 내 삶은 의미 및 의미론과 함께한 여행이었다. 1974년 암울했던 시절, 대학에 다니면서 시를 쓰다가 개종하듯이 의미의 본질을 찾아 길고 먼 여정을 시작하였다. 산을 넘고 강을 건넜다. 어둠과 추위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었다. 타는 목마름에 겨워 제자리를 맴돈 적이 많았다. 그때마다 스승님들께서 등불로 길을 밝혀 주시고 벗님들이 샘물로 목을 축여 주었다. 수많은 학생들이 이 여행에 참여하여 함께 길을 열었다. 의미와 의미론을 탐구하면서 발견의 기쁨에 전율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제 대학에서 내 여행은 마무리 시점에 와 있다. 견딜 만했던 시련, 꿈꿨던 만큼의 고뇌, 그리고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 환희! 축복받은 이 여행에 감사드린다.
--- 머리말 중에서
제3장 / 개념과 범주화
1. 들머리
이 장은 언어 및 언어적 의미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개념과 범주화를 이해하는 데 목적이 있다.
범주화 이론은 1950년대 중후반을 기점으로 고전 범주화에서 원형 범주화로 인식의 전환을 겪었다. 범주화의 개념을 바꾸는 것은 우리의 사고방식과 세계관에 대한 ‘관점의 전환(paradigm shift)’이다. 고전 범주화는 철학 및 논리학과 밀접한 관련 속에서 의미를 진리 조건과 관련시키고 한 범주를 필요 충분한 의미 자질에 의해 엄격하게 정의해 왔다. 그 반면, 원형 범주화는 심리학과 밀접한 관련을 맺어 왔다. 범주화의 틀 전환을 가져 온 원형 이론은 의미를 정신적 표시 및 신체적 경험과 연관시키고 있으며, 사람들이 범주화하는 방식의 유연함을 경험적으로 뒷받침하면서 이론화한 것이다.
이 장에서는 구체적으로 다음 세 가지 사항에 대해서 다룬다.
첫째, 개념?범주?범주화의 성격을 이해한다. 개념과 범주는 어떻게 같고 다른지, 어떤 상관성을 지니는지를 탐색하며, 개념의 기능을 살펴보기로 한다. 또한, 범주화의 정의와 그 중요성을 살펴본다.
둘째, 고전 범주화에 대해서이다. 고전 범주화의 특성을 기술하고, 세 가지 유형의 경험적 반증을 통해 그 한계를 살펴본다.
셋째, 원형 범주화에 대해서이다. 원형 범주화의 원리, 범주화의 수직 차원 및 수평 차원에 대해서 살펴본다.
2. 개념 ? 범주 ? 범주화의 이해
‘개념’ 및 ‘범주’의 성격과 상관성, 그리고 범주화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2.1. 개념 및 범주의 정의
개념과 범주는 매우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 둘은 같으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다.
먼저, 개념의 정의 (1)을 살펴보기로 한다.
(1) 개념(concept)은 실제 세계에서, 그리고 상상이나 가상 세계에서 사물들의 일관된 범주와 대응 관계를 이루는 정신적 구조물(mental construct)이다. 개념적 범주(conceptual category)는 정신적 구조물과 실체(entity)의 두 가지 양상을 포함한다. (Cruse 2011: 53)
(1)에서 ‘개념’은 ‘정신적 구조물’로 규정된다. 또한, ‘개념’과 ‘범주’가 합성된 ‘개념적 범주(conceptual category)’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정신적 구조물’로서의 ‘개념’과 ‘실체’로서의 ‘범주’를 결합해 놓은 것이다.
다음으로, 범주 및 범주화의 정의 (2), (3)을 살펴보기로 한다.
(2) ‘범주(category)’는 우리에게 유의미하고 관련되면서 유사한 경험의 집합을 ‘개념화(conceptualization)’한 것이다. 즉, 범주는 한 언어공동체에서 ‘중요한’ 사물에 대해 형성된다. 범주는 본질상 개념적이고, ‘개념적 범주(conceptual category)’의 많은 부분이 언어적 범주로 언어 안에서 규정된다. (Radden and Dirven 2007: 3)
(3) 분류의 정신적 과정을 ‘범주화(categorization)’라고 부르며, 범주화의 산물은 ‘인지적 범주(cognitive category)’로서, 색채 범주인 빨강, 노랑, 녹색, 청색 등이 그 예이다. 널리 사용되는 또 다른 용어는 ‘개념(concept)’이다. (Ungerer and Schmid 2006: 32)
(2)에서 ‘범주’는 유사한 경험의 집합을 개념화한 것으로, 본질상 개념적이며, ‘개념적 범주’의 많은 부분이 언어적 범주로 규정된다고 하였다. 여기서 개념적 범주는 대부분 언어적 범주로 구현되며, 언어적 범주는 단어를 가리킨다. 또한, (3)에서 ‘범주화’는 분류의 정신적 과정이며, 그 산물이 ‘(인지적) 범주’이며, ‘범주’에 대해 널리 쓰이는 또 다른 용어를 ‘개념’이라고 하였다. 인간 ‘개념’의 심리 문제를 1980년대에 접어들어 새로운 관점에서 포괄적이고 비판적으로 기술한 스미스 & 메딘(Smith and Medin 1981)에서는 ‘범주’와 ‘개념’을 동일시하고 있다.
이상에서 ‘개념’과 ‘범주’는 동일시되고 있다.
한편, ‘개념’과 ‘범주’를 명확히 구분한 (4)-(6)을 보기로 한다.
(4) 개념과 범주 간의 구분은 내포와 외연에 대응시킬 수 있다. 개념과 범주의 관계에서 개념은 내포적 측면, 즉 범주화에 사용되는 정보와 범주화가 제공하는 추론에 관여하며, 범주는 대상들을 참조하는 용어의 적용이라는 측면에 관여한다. 범주의 구성원들은 바로 그 범주의 외연으로서 하나하나의 사례 또는 본보기가 된다. (신현정 2000: 24)
(5) ‘개념(concept)’은 정신적으로 소유된 ‘아이디어(idea)’나 ‘관념(notion)’을 가리키는 반면, ‘범주(category)’는 함께 무리를 지은 실체의 집합을 가리킨다. 개념 ‘개’는 개들이라는 사고를 나타내는 심리적 상태이며, 범주 ‘개’는 개들로서 적합하게 범주화된 현실 세계의 모든 실체로 구성된다. (Goldstone and Kersten 2012: 608)
(6) 인지과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실체들의 집합’, 즉 ‘범주’를 식별하는 정신적 표시가 개념이라는 데 동의한다. 다시 말해서, 개념은 지시하고, 개념이 지시하는 것은 범주이다. (Rips et al. 2012: 177)
(4)에서 개념은 내포에, 범주는 외연에 대응되는 것으로 구분하고 있다. (5)에서 ‘개념’은 정신적인 측면의 ‘관념’이며, ‘범주’는 함께 무리지은 실체의 집합으로 구분하였다. 예를 들어, ‘개’의 ‘개념’은 개들의 사고를 나타내는 심리적 상태인 반면, 그 ‘범주’는 개들로서 범주화된 현실 세계의 실체이다. (6)에서 ‘개념’은 범주를 식별하는 정신적 표시로서, 개념이 지시하는 것을 ‘범주’로 규정하고 있다.
요컨대 ‘개념’은 정신적?심리적 상태의 구조물이며, ‘범주’는 함께 무리지은 현실 세계의 실체이다. 그렇지만 ‘개념’과 ‘범주’는 동전의 양면과 같이 긴밀한 상관성을 지니므로, ‘정신적 구조물’로서 ‘개념’과 현실 세계의 ‘실체’로서 ‘범주’를 합성하여 ‘개념적 범주’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이 경우 개념적 범주의 대부분은 언어적 범주인 단어로 구현된다. 개념은 단어의 의미와 중첩되거나 개념 ‘냉(冷)’이 ‘차갑다’와 ‘춥다’로 구체화되듯이 단어보다 그 폭이 다소 넓다(임지룡 1992: 31 참조).
2.2. 개념의 기능
개념은 사람이 개인적인 삶과 활동, 그리고 사회생활을 효율적으로 해 나가는 데 있어서 필수불가결하다. 그 까닭은 개념이 개념화와 범주화에 중심적인 지식의 기본 단위이기 때문이다. 개념의 세 가지 중요한 기능을 들면 다음과 같다(Cruse 2011: 53-54 참조). 스미스(Smith 1988: 19-20)에서는 개념의 기능을 ‘인지적 절약의 증진’, ‘주어진 정보 이상의 추구’, ‘조합되어 복합 개념과 사고 형성’을 들고 있다.
첫째, 경험을 체계화하는 기능이다. 개념의 본질은 객관적으로 다른 경험들을 하나의 동일한 유형의 경험으로 체계화해 준다. 우리는 색깔, 모양, 크기, 행동이 다른 여러 고양이를 만난 바 있다. 우리는 ‘고양이’의 개념을 가지고 있는데, 이 개념을 통해 문제의 동물이 지닌 다양성을 넘어 한 유형의 ‘고양이’라는 정신적 구조물을 형성하게 된다. 이와 같이 형성된 개념은 지적, 사회적 활동에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다.
둘째, 학습의 기능이다. 개념은 학습의 효율성을 높여 준다. 개념적 범주가 없다면, 학습은 단편적이며 혼동 상태에 빠질 수 있고, 수많은 개체에 관해 지식의 핵심 사항들을 획득하는 데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경험은 결코 그대로 반복되지 않는데, 개념은 현재의 경험을 과거 경험의 유사한 양상과 관련지어서 학습의 능률을 높여 준다.
셋째, 의사소통 기능이다. 개념적 범주는 언어적 의사소통에 필수적이다. 언어는 개별적인 사람, 사물, 사건 등에 의해서 작용하지는 않는다. 언어 표현은 개념적 범주에 의해서 부호화되고, 화자에 의해 의도된 개별적 지시물은 개념적 범주로부터 추론되어야 한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