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의 원인은 불행하다는 생각 그 자체이며, 불행이란 실제로는 존재할 수 없다. 스토아학파는 자연의 운행을 결정론적으로 해석했다. 자연의 결정론적 질서와 일치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성찰은 인간 삶의 덧없음, 즉 명예나 부귀를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지에 대한 성찰과 함께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주제이기도 하다. 아우렐리우스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나는 불행하다’는 판단은 본질적으로 사고의 오류라고 보고 있다. -1장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p.18
니체에 의하면 어떤 진리가 오류인가 참인가 혹은 어떤 진리가 올바른 인식을 근거로 하는가는 문제가 안 되며, 문제가 되는 것은 다만 그것이 삶을 강화시키고 촉진시키느냐에 있다. 이렇게 되어 결국 “모든 것은 진리가 아니다. 모든 것은 허용된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2장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p.35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일종의 행복론이다. 소제목만 들춰보아도 행복해지기 위한 여러 가지 조건들에 대해서 깊고 넓게 사유하고 구체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노력이 엿보인다. 그는 최고의 목적이 되는 행위인 행복, 그것을 얻는 방법으로서의 덕, 덕을 실천하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중용을 이 책에 자세하게 기술하였다. -3장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p.49
장자의 사상은 결국 일체의 사회 규범, 제도를 거부하는 극단적인 개인주의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사회 제도와 규범이란 결국 선과 악, 너와 나라는 구별을 전제하는 것이고, 또 개인의 자유를 불가피하게 제약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4장 장자 [장자를 읽어야 할 시간] p.71
물론 마키아벨리의 인간에 대한 인식이 성선설(性善說)이 아닌 ‘성악설(性惡說)’적인 입장에 있었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군주의 입장에서 정치적 적수로부터의 공격을 방어하고 이탈리아의 굳건한 토대를 형성해서 나라를 통일하여 고대 로마와 같은 ‘절대 왕정’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을 이해해야만 한다. -5장 마키아벨리 [군주론] p.86
흔히 절충적인 입장이 그러하듯이 롤즈의 『정의론』에 대해서도 양쪽으로부터의 비판이 다양하게 제기되고 있다. 우파들은 그의 『정의론』이 너무 평등주의적이라 비판하고, 좌파들은 그의 『정의론』이 지나치게 형식적 자유를 고수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6장 존 롤즈 [정의론] p.111
울리히 벡을 포함한 성찰적 근대론자들이 주목하는 것은 위험사회가 새로운 정치적 잠재력을 생산해낼 가능성이다. 새로운 정치적 잠재력은 위험에 관한 대중적 인식을 통해 비로소 구현된다. -8장 울리히 벡 [위험사회] p.146
톨스토이의 인생은 선에 대한 탐구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인생의 의의는 선에 대한 노력 속에 있다는 것이다. 즉 선이 인생의 목적이며, 사람은 모두 이 목적을 향해서 전진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목적을 달성하려면 사랑이 필요하다. 각자가 자기 속에 간직하고 있는 이성, 곧 신의 활동인 사랑을 통하여 선이라는 목적을 향하는 노력, 이것을 톨스토이는 인생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9장 톨스토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p.155
그가 벌레로 변신한 것은 사회적 직업적 기능을 포기하는 것이며 자신의 본래성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벌레적 존재는 자신에 눈뜸으로써 직업이 유일한 존재 형식이라는 현대 율법을 어긴 인간의 유형지(流刑地)라고 해석된다. “이 벌레가 된 지점에서 이 유형지의 제로지점에서 어디로 탈출을 시도하며, 어떻게 존재의 수치를 획득하는가”하는 카프카 문학의 대 주제가 도출되는 것이다. -10장 카프카 [변신] p.174
부조리가 진리라면 그것으로부터 추론되는 결론은 자살이나 도피가 아니라 반항적인 인생이다. 그래서 카뮈는 부조리한 인간의 이상으로서 ‘시지프스’를 내세운다. 허망하고 부질없는 것인 줄을 알면서도 자신이 배당받은 삶의 영역에 반항하고 자유를 누리며 열정으로써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삶을 불태우는 인간 운명의 상징이 바로 시지프스이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신화 속의 인물이 아니라 항상 깨어 있는 의식을 가지고 사는 인간의 참된 모습 바로 그것이다.- 11장 카뮈 [시지프스 신화] p.199
우리가 오웰을 높이 평가하게 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가 사회주의자이면서도 사회주의 국가 소련을 용인하고 찬양하는 시대의 주류에 몰입되지 않고 소련의 독재와 만행을 바로 인식하고 비판할 수 있는 예지와 용기를 가졌다는 것이다. -12장 조지 오웰 [동물농장] p.209
보통 우리는 생존경쟁이라 하면 같은 먹이를 두고 서로 싸우는 의미로 생각한다. 하지만 다윈은 생존경쟁이란 말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의미만 가진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가령 우리는 사막의 식물이 ‘수분에 의존해서’ 살아간다고 말한다. 하지만 다윈은 이 사막의 식물이 ‘가뭄에 대항해서’ 생존경쟁을 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처럼 다윈은 보다 넓은 의미로 생존경쟁이란 말을 사용했다. -13장 다윈 [종의 기원] p.229
쿤은 과학의 진보가 혁명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기존의 이론구조와 전혀 다른 이론 구조가 대체하는 형식으로 진보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그러한 이론구조의 대체에는 과학자 공동체의 사회학적 성격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엄밀한 논리성보다는 사회성이 이론구조의 변화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하지만 쿤은 단순히 말하면 이론구조인 것을 패러다임(paradigm)이라는 말로 표현함으로써 보다 풍부하고도 동시에 애매모호한 논의를 진행시킨다. -14장 토마스 쿤 [과학혁명의 구조] p.241-242
스노에 의하면 여기엔 크게 두 가지의 오해가 존재하는데 첫째, 과학자는 낙천적이라는 사실이다. 과학자들은 혹 무엇을 할 수 있는 길이 없을까를 몹시 찾고 싶어 하는 성미의 소유자인 동시에 그것을 해낼 방도가 없다는 것을 알 때까지는 결코 문제해결을 포기하지 않는 적극적 성격의 소유자이므로 모든 문제들에는 해결방법이 있다고 생각하는 낙천적인 성격이 있는데, 이것을 비과학자들은 천박한 낙천주의자라고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문학은 과학과는 달리 훨씬 완만하게 변화하고 과학처럼 자신의 잘못을 자동적으로 수정하는 장치도 없고 일단 방향이 잘못 잡혀지면 그 기간은 오래 지속된다는 사실이다. -17장 C. P. 스노 [두 문화] p.297
레비-스트로스에 의하면 인류는 끊임없이 두 개의 모순된 과정과 싸우고 있다. 그 과정 가운데 하나는 통일화를 지향하고 있고 반면에 다른 하나는 다양화를 유지하거나 재건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단조로움과 획일성의 위협을 받고 있는 세계에서 그는 여러 문화의 다양성 을 보존해야 함을 역설해왔다. 이 경우 그는 ‘죽은 다양성’, 다시 말해 지역적인 전통 혹은 과거 문화의 단순한 보존에 토대를 둔 다양성이 아닌 역동적인 다양성을 원한다. -18장 레비-스트로스 [슬픈 열대] p.324
우리는 어쩌면 너무 익숙해 의심할 겨를도 없이 낯익은 방식으로만 주변 현상을 대하며 앞으로 달려가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way of seeing’이 아닌 ‘ways of seeing’이다. 하나의 방식에서 벗어난 관점의 자유가 주는 낯선 사유 말이다. -19장 존 버거 [다른 방식으로 보기] p.342
마르코 폴로는 서양인으로서 동양을 매우 신비하게 바라보았다. 물론 종교적인 면에서는 자신이 기독교인이기에 그 외의 종교들에 대해서 우상숭배라고 하였지만 자신이 살아온 곳과 다르다는 것을 느낀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마르코 폴로는 책 전체를 너무도 똑같은 형식으로 몇 가지 항목 중심으로 기술하였다. 집중적으로 알아보기 위해서 몇 가지만 서술한 것이 아니라 그냥 눈에 보이고 지나가다가 들을 수 있을 정도의 내용만으로 구성을 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상업, 무역의 도시에서 살아온 영향 때문인지 지극히 상업적인 분야에 관해서만 비교적 자세하게 묘사하여 서술하였다. 어떻게 돈을 버는지, 어떻게 무역을 하는지, 세금은 얼마나 걷는지에 관해서만 매 장마다 비교적 자세하다. -20장 마르코 폴로 [동방견문록] p.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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