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알 유희의 발생과 내력을 어디까지 소급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결국 역사가의 자유라고 할 것이다. 그것은 본래 시작이라는 것을 갖고 있지 않으며 이념에 따라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유리알 유희가 이념이나 예감으로서, 또 이상의 모습으로서 이미 예부터 일찍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가령 피타고라스, 고대 문화의 후기에 있어 그리스의 그노시스파, 또 그에 못지 않게 고대의 중국인, 그리고 또 아라비아인, 무어인의 정신생활의 정점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스콜라 학파와 인문주의를 넘어 17, 18세기의 수학자 아카데미와 낭만과 철학 및 노발리스의 마술적 꿈이 담긴 신비한 문학에까지 이른다. 문예대학을 이상으로 삼는 정신운동, 플라톤의 아카데미, 정신적 정화의 교류, 정밀한 과학과 예술, 혹은 과학과 종교를 융화시키려는 시도, 그러한 모든 것의 밑바닥에는 우리들에게 유리알 유희의 형태와 같은 영원한 이념이 있다. 아벨라르나 라이프니츠나 헤겔과 같은 정신은 의심할 것도 없이 정신적 우주를 집중적으로 체계를 세워 정신과 예술의 생생한 아름다움을 정밀한 규범의 마술적 형성력과 결합하고자 하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음악과 수학이 거의 동시에 완성 수준에 도달한 그 시대에는 두 개의 규범 사이에 종종 친밀하고 유익한 교류가 있었다. 다시 500년 전에 니콜라우스 폰 쿠에스가 같은 분위기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을 쓰고 있다.
'정신은 모든 것을 가능성의 영역으로 다루기 때문에 가능성에 맞추어 자기를 형성한다. 또 정신은 모든 것을 신이 하는 것처럼 통일성과 단순성의 방법으로 다루기 때문에 절대적인 필연성에 맞추어 자기를 형성한다. 또 모든 것을 그 특성에 맞추어 자기를 형성한다. 그러나 정신은 비유에 따라 상징적으로도 측정한다. 수와 기하학적 도형을 사용하여 이것을 비유로 끌어내리듯이.' 그러나 우리의 유리알 유희를 대충 보여 주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 유리알 유희의 사상에서 나온 유희 비슷한 상상력의 방향에 상응하고, 또 거기서부터 말하고 있는 것은 크자누스의 이런 사상만이 아니다. 그것을 연상시키는 비슷한 사상은 그에게 여러번, 아니 자주 나타난다. 그가 수학을 좋아했다는 것, 유클리드 기하학의 도형이나 공리를 신학적·철학적 개념에 적용하여 비유적으로 설명하는 능력을 가졌으며, 또 그것을 좋아했다는 것은 이 유희의 정신적 특성에 매우 근접해 있다고 생각된다. 때로는 그의 라틴어 용법조차도 유희어의 자유자재한 조형적 특성을 생각나게 해 준다. 그는 라티어의 낱말을 가끔 거침없이 조합했는데, 라틴어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 점을 오해할 염려는 없다.
--- pp.12~13
..... 어떤 면에서는 그리고 생각이 깊지 않은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실존하지
않는 것이 존재하는 것보다 언어로 표현하는데 힘이 덜 들고 책임이 따르지
않을지 모르지만 경건하고 양심적인 역사가에게 있어서는 그 정반대이다.
즉 어떤 사물의 현실적 존재는 증명할 수 없고 또 존재할 법하지 않다
하더라도 경건하고 양심적인 사람들이 그것을 막연하게나마 존재하는 것으로
다룸으로써 존재와 발생의 가능성에 일보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사물이
있다.
그런 사물일수록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은 없으며, 한편 그런 사물만큰
사람들에게 직접 세시할 필요가 절실한 것도 없다.
..... 어떤 면에서는 그리고 생각이 깊지 않은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실존하지
않는 것이 존재하는 것보다 언어로 표현하는데 힘이 덜 들고 책임이 따르지
않을지 모르지만 경건하고 양심적인 역사가에게 있어서는 그 정반대이다.
즉 어떤 사물의 현실적 존재는 증명할 수 없고 또 존재할 법하지 않다
하더라도 경건하고 양심적인 사람들이 그것을 막연하게나마 존재하는 것으로
다룸으로써 존재와 발생의 가능성에 일보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사물이
있다.
그런 사물일수록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은 없으며, 한편 그런 사물만큰
사람들에게 직접 세시할 필요가 절실한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