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상한 정치의 고전적 이상이 요사이 와서는 거의 완전히 묻혀 버리고 ‘정치’ 하면 뭔가 냄새나고 더러운 것으로 여기는 것이 보통이 되어 버렸다. 이런 일은 비단 우리나라에서뿐만 아니라 온 세계에 공통된 현상이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정치는 정말 혐오스럽고 더러운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정치를 떠나서 살 수 없다고 했는데, 그 혐오스러운 정치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불쾌하고 불편하게 살아야만 하는가?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치에 고상한 면도 있는 것일까? 정치의 고상한 면은 무엇일까? 무엇을 하는 것이 진정한 정치일까?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 정치일까? 정치는 어떤 사람들이 하는 것이고, 또 어떤 사람들이 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정치와 다른 인간활동들의 관계는 어떠할까? 수많은 질문이 꼬리를 무는데, 이런 수많은 질문과 의문에 조금이라도 답해 보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책의 의도이다. - 16~17쪽 -
작은 정치가 공익 실현을 핑계로 사익을 실현하려고 하는 것이라면, 큰 정치는 국가 발전의 청사진을 가지고 공공 이익(공익)을 실현하는 것이다. 또 그것을 통해 궁극적으로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권력투쟁과 이익 다툼의 작은 정치는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는 공익과 사회정의 실현의 큰 정치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존재해야 한다. 결국 정치의 최고 목표는 공익을 정의롭게 실현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 50~51쪽-
한 사회의 다양한 갈등을 해소하고 통합을 이루는 것은 정치의 중요한 기능이다. 갈등의 조정은 이익 조정이라고도 할 수 있고, 통합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 갈등은 다양한 차원에서 일어난다. 사회 전체 차원일 수도 있고, 정치체제 차원일 수도 있고, 더 작은 차원에서의 정치제도 사이, 정치제도 안, 그리고 개인 차원의 갈등일 수도 있다.
- 61쪽 -
사회 구성원들의 이익이 반드시 서로 일치할 수는 없다. 일치하지 않는 이익들의 경쟁을 공익에 부합하도록 해결하는 것이 정치의 역할이다. 부분 이익들을 국가 이익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정치의 역할이고, 그것을 잘하는 것이 좋은 정치이고 못하는 것이 나쁜 정치이다.
- 71~72쪽 -
국가 존립과 권력 유지는 정치의 가장 ‘기본적’인 목표이다. 그것은 최상의 또는 ‘최고의’ 정치 목표는 아니다. 한국뿐만 아니라 현대 대부분 나라의 정치 목표는 국가 존립이나 군주 또는 대통령의 권력 유지가 아니다. 그것은 기본 조건이고, 그 기본 조건이 이미 충족된 나라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그다음 단계의, 더 높은 단계의 정치 목표가 우리에게는 중요하다. 그것은 바로 사회정의 실현을 통한 구성원의 복지와 행복 추구이다. - 81쪽 -
민주주의는 정치체제에 관한 것이고, 정치이념에 관한 것이고, 정치문화에 관한 것이다. 민주주의에 그것과 직접 관련 없는 너무 많은 것을 바라면, 민주주의를 불신하게 되고 민주주의의 가치 자체를 인정하지 않게 된다. 그것은 민주주의에 위기를 가져올 수 있다. 외환위기 이후에 경제가 어려워졌다고 해서 많은 사람이 박정희 시절을 동경하고 심지어 전두환 독재에 향수를 가졌던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이러한 잘못된 기대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서 추구해야 할 가치이지 다른 가치를 위한 수단이 아니다. 민주주의가 봉사해야 할 다른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정치의 근본 목표인 사회정의 실현일 것이다. - 102쪽 -
그러면 정말 좋은 정부는 어떤 정부일까? 예전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동양과 서양을 말할 것 없이, 공통적으로 가장 쉽게 대답할 수 있는 것은 국민을 또는 백성을 잘 먹고 편히 살게 해주는 정부일 것이다. 잘 먹인다는 것은 우선 경제 발전과 안정을 말한다. 기본적인 경제 안정은 좋은 정부의 최소한의 조건이다. 그러면 편히 살게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국민을 괴롭히지 않고 그들이 근심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여기에는 정치, 문화, 사회적인 여러 정책이 포함된다. 경제만 말하더라도 물질적인 풍요를 이루는 정부가 좋은 정부이지만, 그 풍요가 사회 구성원들에게, 똑같이는 물론 아니더라도 골고루 돌아갈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쉬운 일이 아니다. 물질적 풍요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흔히 독재자나 그 후예들이 주장하듯이 배불리 먹여 주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민주화와 인권 신장을 위한 투쟁에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 많은 것은 그들이 굶주려서가 아니다. 밥만이 사람이 사는 조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권과 자유와 민주주의가 중요하다. 굶주림이 해결된 사람들은 누구나 할 말을 하고 사람처럼 대접받고 사는 것을 원한다. 그것을 정부가 억압할 때 저항이 생길 수밖에 없다. 좋은 정부는 따라서 국민의 권리와 자유와 민주적 참여를 보장하는 정부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좋은 정부는 이 책에서 정의한 정치의 목적을 이루는 정부, 다시 말해 사회정의 실현을 통해 전체 구성원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정부이다. - 162~163쪽 -
민주적 정치문화는 그 반대이니, 구성원 사이의 관계가 수평적이며 권력자의 권력 행사가 자의적이지 않고 정치에 대한 구성원의 이해 수준이 높고 정치참여가 활발한 문화이다. 또 민주주의 문화는 정치 행위자들 사이의 관용과 타협을 반드시 요구한다. 관용과 타협의 문화가 민주주의 발전에 매우 중요하다는 말은 진부한 상식 같지만, 이를 실천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 196~197쪽 -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특히 정치 행위자들의 절제가 중요하다. 민주주의는 서로 다른 의견과 이익들을 조정하고 타협해서 합의를 이끌어 나가는 정치제도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 이해 당사자들이 감정이나 아집에 휩쓸리지 않고 상대방의 의견과 처지를 이해하거나 존중해야 한다. 이런 정치적 절제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랜 기간 동안의 훈련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그 훈련은 가정, 학교, 사회, 정치 집단 등 많은 곳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 정치 교육인데, 그런 훈련이 민주주의의 안정된 발달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
- 215쪽 -
요사이는 국제 정치 대신에 ‘세계 정치’ 또는 ‘지구 정치’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그전에는 ‘국제관계’라는 말도 많이 사용했다. 국제관계는 세계 정치에 비해 좁은 의미의 정치만 아니라 경제, 문화 등의 관계도 포함하는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더 포괄적인 용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국가들 사이의 관계라는 뜻이 강했다. 이에 비해 세계 정치 또는 지구 정치는 비단 국가들뿐만 아니라 비국가 행위자들을 포함하는 세계 또는 지구에서 일어나는 정치라는 뜻이기 때문에 현실을 더 정확히 표현한다. - 240쪽 -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