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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관희 교수의 중국사

조관희 교수의 중국사

: 중국 문명의 시작부터 신해혁명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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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8년 09월 10일
쪽수, 무게, 크기 504쪽 | 878g | 152*224*35mm
ISBN13 9788936811396
ISBN10 8936811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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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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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라가 천하를 통일했으나 단명 왕조로 끝나고 당나라가 그 과실을 취한 것은 여러모로 진한(秦漢) 교체기의 상황과 흡사한 면이 있다. 거칠게 한마디로 개괄하자면, 곰은 재주가 넘고 돈은 다른 사람이 버는 형국이 재연된 것이다. 우선 통일하기까지의 간난신고(艱難辛苦)로 말하자면, 진나라나 수나라가 들인 공력을 어찌 한나라나 당나라가 따라잡을 수 있겠는가? 아울러 통일 이후에 여러 가지 제도를 새로 만들고 정비한 것 역시 마찬가지다. 한은 진이 군현제 등을 통해 세운 중앙 집권 관료 체제를 그대로 계승했고, 당 역시 수가 닦아 놓은 기반 위에서 세계 제국이 될 수 있었다. 천하를 재통일한 수 문제 양졘은 내치에도 수완을 발휘해 여러 가지 새로운 제도를 창안했는데, 당 제국의 기초는 사실상 수 문제 시대에 완비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흥미로운 것은 수와 당 모두 혈통이 북방 이민족 계열로, 북조의 문벌 귀족이라는 사실이다. 북조의 문벌 귀족은 한족과 호족이 결합하여 탄생했으므로, 순수한 한족 혈통과 달리 호풍(胡風)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아울러 이들의 세력 기반이 되었던 것은 북주(北周) 정권의 중심지였던 관룽(關?, 관롱) 또는 관중(關中, 관중)으로 이곳은 오늘날의 산시성(섬서성)과 간쑤성(甘肅省, 감숙성)을 잇는 웨이허(渭河, 위하) 일대를 가리킨다. 이곳은 일찍이 진(秦)이 일어났고, 한(漢) 왕조가 터를 잡았던 곳으로, 서위나 북주, 수, 당의 영고성쇠가 모두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혹자는 수당 제국을 진한 제국과 같은 계열에 속하는 것으로 보아, 진한 제국이 위진 남북조 300여 년의 단절된 역사를 딛고 수당 제국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라 여기기도 한다.
같은 관룽 집단이었기에 북주와 수, 당은 혈연적으로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그 중심에는 두구신(獨孤信, 독고신)이라는 인물이 자리한다. 북위가 육진의 난 등으로 동위와 서위로 나뉠 때, 위원타이를 도와 서위 정권에 힘쓴 이들이 여덟 개의 주국(柱國)을 분봉받았다. 두구신은 이 중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세력이 커지자 이를 견제한 위원씨(宇文氏, 우문씨) 일족에 의해 자살한다. 하지만 그는 중요한 유산을 한 가지 남겨 놓았으니, 그것은 그의 세 딸이 이후 역사를 좌지우지하게 될 인물들과 혼인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장녀는 위원타이의 장남인 북주의 명제(明帝)에게 시집가 황후가 되었고, 4녀는 여덟 주국 가운데 하나인 당국공(唐國公) 리빙(李昞, 이병)의 왕비가 되었으며, 7녀는 북주의 대장군 양중(楊忠, 양충)의 아들로 나중에 수 문제가 되는 양졘의 황후가 되었다. 훗날 당을 건국한 리위안(李淵, 이연)이 리빙의 아들이니, 결국 당 고조와 수 문제의 아들 양제(煬帝)는 이종사촌이 된다.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던 것 역시 북조의 문벌 귀족들이 서로 혈연적으로 얽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수 문제는 즉위한 뒤 바로 이 점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자신이 관룽 집단 출신이긴 했지만, 이들의 세력을 꺾지 않고는 황제의 권위를 세울 수 없다고 생각한 문제는 귀족들의 세습 수단으로 전락한 위진 시대 이후의 구품중정제를 폐지하고 과거제(科擧制)라는 새로운 인재 등용 방식을 채용하였다. 이것은 중원의 한족 문화 전통을 이어받아 사회적으로 존경받던 북제(北齊) 계열의 산둥 출신 귀족들과 남조의 강남 출신 귀족들의 정치 참여를 유도하고, 궁극적으로는 가문 위주가 아니라 능력 위주로 인재를 선발하기 위한 것이었다. 과거 제도는 문제의 뒤를 이은 양제 대에 완성되는데, 이후 과거 제도는 청 말까지 중국의 주요한 인재 등용 제도로 자리 잡게 된다.
아울러 한족들의 여망에 부응해 이민족의 관제인 북주의 관제를 폐지하고 한(漢)과 위(魏)의 관제를 회복했다. 당대(唐代)의 ‘3성 6부’ 제도의 원형이 이때 만들어졌고 황제의 행정을 지지하는 중앙 관제가 확립되었다. 지방 행정에서는 유명무실해진 주군현(州郡縣) 제도를 간소화해 군의 구획을 폐지하고 주현(양제는 이것을 군현으로 바꿨음) 제도로 개편했다. 전란으로 망실되거나 인멸된 호구를 바로잡기 위해 북위의 삼장제를 발전시킨 인보제(隣保制)를 실시해 국가에 의한 인원 파악을 강화하고 이를 기초로 조용조(租庸調)와 부병제(府兵制)를 시행했다. 조용조는 일종의 징세 체계로 조(租)는 토지에, 용(庸)은 사람에게, 조(調)는 호(戶)에 부과하는 조세 제도이고, 부병제는 균전제를 바탕으로 한 병농 일치(兵農一致)를 추구하는 징병제의 일종이다. 또 이전에는 뚜렷하게 분화되어 있지 않던 형법을 가리키는 ‘율(律)’과 행정 관제를 규정한 ‘령(令)’을 구분하여 율령을 기본으로 하는 국가의 행정과 사법 조직을 완비하였다.
이로써 율령이라는 성문법을 바탕으로 한 중앙 집권 국가가 국가시험인 과거를 통해 채용된 유교와 문학적 교양이 몸에 밴 고급 관료에 의해 운영되는, 황제를 정점으로 한 왕조 국가의 통치 시스템이 갖추어졌다. 나아가 이러한 율령 국가의 성립은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도 영향을 주어 특유의 중앙 집권적 관료 국가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이런 여러 가지 시책으로 정치는 눈에 띄게 안정되고 경제 역시 급속도로 발전해 문제 시기는 혼란기 이후에 찾아온 중흥기로 여겨진다. 그리하여 당시 전국의 주요 창고에는 조정에서 50~60년은 충분히 쓰고도 남을 만한 양의 곡물이 비축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치세도 오래가지 못했다. 문제의 뒤를 이은 양제는 여러 가지 실정으로 문제가 이루어 놓은 것들을 한순간에 탕진해 버렸다. 그렇다고 양제에 대해 그렇게 가혹한 평을 내릴 필요는 없다. 대부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왕조의 마지막 황제는 그다음 왕조의 사관들에 의해 사소한 악행도 침소봉대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양제는 상대적으로 다른 황제에 비해 그렇게 악랄하거나 우매한 황제는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양제가 황제 자리 때문에 황태자였던 자신의 형과 아비를 죽였다고 하지만, 이 행위 하나만 놓고 보자면 마찬가지로 황태자인 자신의 형 리졘청(李建成, 이건성)을 죽이고 아비를 겁박해 황제 자리에 오른 당 태종의 행위와 크게 다를 바 없다. 다만 한 사람은 망국의 군주이고 다른 한 사람은 역사의 승자로, 자신의 기호에 맞게 역사를 기술하게 할 능력이 있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과연 양제는 대부분 문제의 치세를 계승해 적어도 고구려 원정 이전에는 특별히 지탄받을 만큼 어리석은 일을 하지는 않은 듯하다. 흔히 양제의 실정으로 대운하 개착이나 뤄양을 동도(東都)로 삼아 궁전을 지은 것 등을 예로 든다. 그러나 대운하는 남북조 시대를 거치며 중원에 편입된 남방의 조운(漕運)을 위해 문제 때 시작한 일을 계승해 완성한 것이고, 그 연장선상에서 양저우에서 시작하는 운하의 종착지인 뤄양을 개발한 것일 뿐이었다. 오히려 위진 남북조라는 오랜 혼란기를 단시간 내에 수습하느라 급속하게 펼친 중앙 집권화의 여러 폐단과 모순이 어떤 계기로 폭발한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양제 자신이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느라 국고를 탕진해 그런 모순을 심화한 점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수나라의 명운을 결정적으로 좌우했던 것은 오히려 고구려 원정 탓이었다. 크게 두 차례에 걸쳐 벌인 고구려 원정의 실패로 문제 이후 축적해 놓은 국력을 소진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에 동원된 백성들의 삶마저 피폐하게 만들어 중국은 또다시 반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수나라가 망한 결정적인 원인이 고구려였다면, ‘만약 양제가 고구려를 치지 않았다면’이라는 가정이 성립할 수 있을까? 역사에 가정이란 없다지만, 과거에 일어난 사건들은 사실상 불가피한 주변 정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난 경우가 많다. 고구려 원정만 해도 그에 대한 부담감을 양제라고 몰랐을 리 없었을 것이고, 그에 앞서 자기 앞에 늘어서 있는 국내 문제만 해도 처리하기 바빴을 터인데도 원정을 감행했던 것은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국제 정세는 중국이 바야흐로 오랜만에 중원을 통일하고 사방으로 지배력을 뻗치려 했으나 무룽씨가 중국 내지로 이주한 틈을 타 세력을 확장한 고구려가 가로막고 서 있었다. 고구려는 이에 그치지 않고 랴오시(遼西, 요서) 지역에 진출하려고 먼저 기병했으나 문제에 의해 격퇴당했다. 결국 고구려와의 일전은 양제가 아닌 다른 황제였다 해도 피할 수 없었던 게 당시 상황이었다. 그것은 수나라가 망한 뒤에도 마찬가지여서 결국 당이 들어선 뒤에도 당 태종 역시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가 처참한 패배를 맛보게 된다.
이렇게 전국이 반란에 휩싸여 극도로 혼란에 빠졌을 때, 진양(晋陽, 진양) 유수(留守) 리위안도 거병했다. 리위안은 진군하는 중에 국가의 곡물 창고를 열어 백성에게 나누어 주고 군율을 엄중히 하여 민심을 얻어 급속히 세를 불렸다. 617년 11월 창안에 들어간 뒤에는 황제 자리를 물려받으려고 양제의 손자 가운데 한 사람을 공제(恭帝)로 옹립하고 양제는 전 황제를 뜻하는 태상황(太上皇)으로 물렸다. 쟝두(江都, 강도)에 머물고 있던 양제는 이 소식을 듣고 분기탱천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다음 해인 618년, 그의 나이 50이 되던 해에 양제는 황실의 호위를 맡은 금군(禁軍) 장수 위원화지(宇文化及, 우문화급)에게 살해되었다. 죽기 직전에 “주모자가 누구냐?”라는 양제의 물음에, “온 천하가 똑같이 원망하고 있습니다. 어찌 한 사람에 그치겠습니까?”라는 대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 6장. 창안의 봄_당의 번영과 몰락 중 ‘율령 국가의 완성’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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