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은 서울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경주에도 있고, 공주에도 있고, 대구에도 있다. 우리나라의 지명을 관리하는 정부기관인 국토지리정보원이 제공하고 있는 지명 데이터베이스에 의하면, 남산은 전국적으로 모두 170개가 있다. 전 세계적으로 같은 뜻을 가진 이름까지 모두 포함한다면, 영어권의 사우스마운틴(South Mountain), 프랑스어권의 몽탠뒤쉬드(Montagne du Sud), 독일어권의 쥐트베르크(Sudberg) 등, 그 수는 훨씬 많아진다. 그러나 서울의 남산과 경주의 남산, 그리고 미국 애리조나의 사우스마운틴은 매우 다른 정체성과 느낌을 가지고 주민들 또는 그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에게 다가온다. _17쪽 “01 남산은 남쪽에 있는 산? 강남은 강의 남쪽?”
때로는 피하고 싶어 하는 의미를 가진 요소도 있다. 충남 청양군의 장평면(長坪面)은 1987년까지 적곡면(赤谷面)으로 불렸다. ‘적곡’은 고려시대 사찰로 추측되는 도림사가 있었던 적골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나오는 유서 깊은 지명이었다. 그런데 ‘붉을 적(赤)’ 자가 문제였다. 반공 이데올로기의 압력은 엉뚱한 논란의 불씨를 일으켰고, 그 지역을 일컫던 이름 장수평야에서 현 이름을 채택하게 했다. 현재 적곡은 도림사지가 있는 곳의 리(里) 이름으로 스케일 다운되어 남아 있다. ‘조선 해협’으로도 불리던 바다를 ‘대한 해협’으로 표준화한 것도 같은 이유라고 알려져 있다. _35쪽 “02 이름 짓는 인간”
자연환경의 변화는 새로운 지형물을 만들어내어 새로운 지명의 탄생을 가져오기도 하지만, 반대로 지형물을 없앰으로써 지명을 소멸시킬 가능성도 있다. 지구온난화, 폭우, 가뭄, 태풍, 지진 등의 기후변화로 인한 지형물의 변화와 해수면 상승은 그 중요한 요소다. 해수면 아래로 잠길 가능성이 예고된 남태평양의 투발루섬(Tuvalu Island)과 이곳에 속한 지명들은 소멸의 위기에 처해 있다. 중국 타클라마칸 사막의 확대는 그곳의 마을 주민을 떠나게 함으로써 그 이름도 함께 사라지게 하고 있다. 방글라데시 삼각주에 해수면이 1.5m 상승하면 2만 2000km2의 면적에 영향을 미치고 1800만 명의 거주민이 터전을 잃을 수 있다는 분석은 다양한 지명의 소멸도 예고하고 있다. _66쪽 “03 지명에도 생애가 있다”
지명의 표준화는 의사소통과 지칭의 수단으로서 갖는 지명의 고유한 기능에 주목한다. 지명은 개인 또는 집단의 장소 인식으로부터 특별한 의미를 갖고 만들어지지만, 그 지명 바깥에 있는 타인들에 의해 빈번하게 사용되며 때로는 다른 나라의 이질적인 집단에 의해 다른 언어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지명의 사용자로서 중요한 것은 객관적인 원칙과 절차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된 통일된 형태의 지명이다. 지명 연구의 선구자인 이스라엘 히브리대학교의 카드몬(Naftali Kadmon) 교수는 이렇게 표준화된 지명이 구두 대화에서뿐만 아니라 문서, 지도, 컴퓨터와 같은 각종 매체를 통한 소통에 있어 편의성과 정확성을 증진시킬 수 있다고 했다(Kadmon, 1997: 187~189). _96쪽 “05 지명에 권위 부여하기, 지명의 표준화”
외래 지명은 일반적으로 지명의 표기에 주목하고, 이를 어떻게 읽는지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갖지 않는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수도 Paris는 ‘빠리’로 읽든 ‘패리스’로 읽든, Paris로 쓰여 있는 한 외래 지명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고유한 문자체계를 갖고 있는 한국어에서는 한자어로 된 외국의 지명을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다르게 표기할 수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이는 한자어를 공유하지만 읽는 방법이 다르고 다시 이를 표현할 수 있는 별개의 쓰기 체계를 갖고 있는 한국어와 일본어에서 특수하게 외래 지명을 만들어내는 사례인 것으로 보고된다(Choo, 2014b). _139쪽 “07 나도 모르는 나의 이름이 있다”
우리나라 국민들이 관심을 갖는 대표적인 지명 분쟁은 동해 표기 문제임이 틀림없다. ‘동해/일본해’ 분쟁으로 알려진 이 문제는 엄밀히 말하자면, 한국인이 2000년 이상 사용해온 이름 ‘동해(東海)’를 존중하여 이를 각 언어에서 표기하자는 한국의 제안(영어 East Sea, 프랑스어 Mer de l’Est, 스페인어 Mar del Este, 독일어 Ostmeer, 러시아어 Восточное море 등)에 대해 국제적으로 정착된 ‘Sea of Japan’ 표기에 어떤 변화도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일본의 대응으로 요약된다.
1992년 한국 정부가 이 문제를 국제사회에 처음으로 제기했을 때 분쟁으로 인식하는 국가는 별로 없었다. 25년이 지난 지금은 반대로 이 문제가 분쟁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국가는 거의 없다. 이 문제를 국제적인 지명 분쟁으로 만드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현재 한국의 입장은 이 바다 이름에 대해 인접국 간에 합의가 필요하며, 합의에 이르기 전까지는 두 이름을 함께 쓰자는 것이다. 한국의 제안에 대해 많은 국가의 정부, 전문가, 지도제작사가 반응했고 ‘East Sea’ 또는 이에 해당하는 각 언어의 표기를 함께 쓰는 비율은 꾸준히 증가해왔다. _169쪽 “09 분쟁과 갈등의 대상, 지명”
Llanfairpwllgwyngyllgogerychwyrndrobwllllantysiliogogogoch(랜바이어푸흘귄기흘고게어어흐윈브로흘랜트실리어고고고흐). 알파벳의 나열에 불과해 보이는 이 단어는 영국 웨일즈에 있는 한 마을의 이름이다. 그 뜻은 “급한 물살 가까이 하얀색 개암나무 구덩이에 있는 성 마리아 교회와 붉은 동굴 구덩이에 있는 성 티실리오 교회”다. 원래 이름은 ‘Llanfair Pwllgwyngyll(랜바이어푸흘귄기흘: 하얀색 개암나무 구덩이에 있는 성 마리아 교회)’였는데, 1850년대에 이 마을에서 한 구두 수선공의 아이디어를 받아 긴 뒷부분을 붙였다고 한다. 당시 철도가 개설된 것을 계기로 많은 여행자와 관광객들의 방문을 유도하여 지역을 발전시키려는 시도였다. _207쪽 “11 지명을 이용한 브랜드, 지명이 된 브랜드”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