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리비아 사람들은 순수하고 낙천적이다. 나는 그 순수하고 낙천적인 사람들이 좋다. 그들과 함께, 그들을 위하여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 남미 전체가 넓은 기회의 땅이라면 그 중 볼리비아는 넓은 영토에 비해 개방이 덜 된, 가장 기회가 많은 곳임에 틀림없다.
(10쪽, 「책을 내며」 중)
라파스 시내 출퇴근 버스에는 특징이 있다. 정류장 표지판은 곳곳에 마련되어 있다. 그러나 승하차는 승객이 원하는 어느 곳이든 가능하다. “내립니다(Voy a bajar)” 하면 어디든지 친절하게 운전사는 정차를 하고, 손님이 길에서 손을 들면 어디서든지 승객을 태운다. 처음에는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이보다 더 편한 시스템이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또한 승차하는 모든 사람들은 먼저 인사를 하고, 이미 타고 있는 승객들은 인사를 받는다. 그리고 창 쪽에 앉은 사람은 타는 사람을 위하여 접힌 의자를 세워주고(옆 줄은 간이식 의자임) 출입문을 계속해서 열고 닫고 해준다. 아름다운 모습이다.
(26쪽, 「고된 출퇴근길, 독특한 대중교통」 중)
자문관들이 저자세로 구걸하면서까지 봉사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기본자세를 갖추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겸손하게 도움을 요청하는 자세 교육부터 자문을 해야 되지 않을까? 귀국 후 진로의 어려운 점들을 생각한 나머지 자칫 비겁하거나 저자세의 연장요청을 하고는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 본다. 나의 자세, 자문관들의 품위가 곧 대한민국의 품위이자 위상일 것이다. 난 마지막 대화에서 “당신들은 나의 도움이 필요해, 안 필요해? 나의 자문이 도움이 돼, 안 돼?”라고 강하게 다그쳤고, “그렇다면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지 말고 내가 하는 대로 가만히 따르라”고 충고했다.
(57쪽, 「봉사자의 품위와 자존심」 중)
나는 현재의 내 모습이 인생에서 가장 멋있다고 생각하고 싶다. NIPA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즐겁게 일하려고 노력한다. 외롭고 정신적으로 힘들 때도 많다. 업무에서 오는 보람과 주위의 인정으로 인생을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보다 더 중요하고 보람 있는 일자리를 찾을 기회가 있을까?
해외 생활에서 정답은 없다. 정해진 기간 동안 건강하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정답이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하다’라는 문구가 생각난다.
(63쪽, 「해외 파견 자문관이 일하는 법」 중)
이곳 사람들은 상대방의 나이에 무관심하다. 상대의 나이를 묻는 사람은 한 사람도 못 보았다. 내 나이가 어느 정도 되어 보이느냐고 사무실 직원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10년 이상을 젊게 말했다. 맞느냐고 묻지도 않기에 나는 그냥 넘어갔다. 동양인들의 나이를 잘 알지 못하는 것 같다. 모두가 친구(Amigo, Amiga)들이다. 나이가 많든 적든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다니는 모습을 많이 본다. 나의 젊은 파트너는 항상 나를 자기 친구라고 칭하며 어깨를 툭툭 치며 나를 대한다. 젊은 친구가 대견스럽다. 우리 한국인들은 나이에 관한 상하 질서나 위계질서 의식이 필요 이상으로 심하다는 생각을 해 본다. 사무실에서 상하간 대화하는 자세, 술자리 문화, 호칭 사용 방식, 인사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자유분방하고 무질서해 보인다. 모두가 친구이기 때문이다. 세월이 갈수록 편해지는 느낌이다.
(85쪽, 「모두가 아미고, 아미가」 중)
건강은 약하고, 능력은 부족하고, 대인관계는 조심스럽고, 어느 것 하나 자신 있게 내세울 만한 것이 없음을 갈수록 실감한다.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졌던 과거는 없어져 버렸다. 그래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안다.
문제는 실천이다. 우리 나이는 오랜 세월과 경험을 통하여 대인관계의 이론은 박사급이다. 그 중 정말 마음으로 새기며 행동으로 옮기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과거는 빨리 잊어야 한다. 이제는 주역에서 물러나 젊고 유능한 사람들의 조역을 충실히 하여야 한다. 과거의 직위나 학벌 등은 깨끗이 머리에서 지워야 한다. 경험은 먼저 꺼내 들면 안 되고, 필요로 하고 요구를 받을 때에만 꺼내 보여 주면 되는 것이다.
겸손해야만 버틸 수가 있다.
(114쪽, 「노년기 인간관계, 어떻게 할 것인가?」 중)
폭포 입구에는 간단히 요기할 수 있는 노상 포장마차 같은 공간이 있었다. 주인 부부와 두 딸이 함께 장사를 하는 듯했다. 아저씨는 음식을 만들고 아주머니는 서빙을 했다. 10살 정도 되어 보이는 큰딸은 갓난 동생을 돌보면서 뒤쪽에서 간단한 시중을 든다. 아마도 연휴라서 장사 대목을 맞은 듯이 보였다. 나는 나무그늘 아래에서 잠자고 있는 갓난애의 모습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우리나라의 과거도 이와 다르지는 않았다. 그리고 부모에 의해 결정지어지는 자식의 운명을 생각해 보았다. 이곳 폭포 아래에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139쪽, 「꼬로이꼬-폭포와 리조트」 중)
볼리비아 여행에서는 어디를 가든 비슷한 느낌을 주는 풍경이 있다. 안데스의 장엄한 위용이 그것이다. 여행 최종목적지는 고도가 높은 곳이 될 수가 없으므로 정상 부근이 아닌 최소한 2,500m 이하의 산 중턱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2,500m 이상부터 사람들은 산소 부족을 느끼기 시작해 고통이 동반된다고 한다. 그래서 산 넘어 목적지를 가려면 왕복 두 번씩 반드시 좌우 지그재그의 험난한 산길 수 킬로미터를 자동차로 오르락내리락 해야만 한다. 처음 한 번 다녀온 뒤 나는 그 위험하고 험한 길을 다시는 안 가겠다고 내심 다짐을 했는데 두 번 세 번을 계속 가게 되었다. 15인승 미니버스를 탄 사람들은 4,000m 낭떠러지 아래를 내려다보면서도 익숙해졌는지 겁내지 않고 잠까지 자면서 여행을 즐긴다.
(147쪽, 「모든 길은 산으로 통한다: 안데스 여행의 묘미」 중)
산 정상 가까이에 이르면 조그마한 집 몇 채가 있다. 그 중 한 집에는 부부가 살고 있는데 자식들이 다섯이 있었다. 남자는 택시 운전을 하고 아내는 농사를 지어서 시장에 내다 판다고 한다. 큰애는 최고의 명문인 UMSA대학을 들어갔고 둘째는 라파스로 알바를 다니고 나머지 셋은 아주 어리다. 그러나 생각과 태도는 어른스러웠다. 우리가 한 소녀에게 조금 떨어진 곳으로 함께 가서 놀자고 했더니 빨래를 해야 되므로 안 된다고 한다. 일곱 살밖에 안 된 꼬맹이는 10살짜리 오빠의 허락 없이는 어디에도 갈 수가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감자, 대파를 재배하고 소, 양, 개, 고양이, 토끼까지 키웠다. 풍족한 생활은 아니었지만 얼마나 씩씩하고 밝고 행복하게 사는지! 두 자문관은 그 전부터 매번 과자나 먹거리를 가져다 애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다고 한다. 거의 자매결연 수준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봉사활동이 아닌가 싶다.
(153쪽, 「악마의 어금니에서 만난 작은 행복」 중)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