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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파리

로맨틱,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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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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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8년 09월 10일
쪽수, 무게, 크기 472쪽 | 634g | 150*210*30mm
ISBN13 9791186732397
ISBN10 1186732393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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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5쪽) 사진판만큼이나 민감한 감성의 소유자였던 나다르의 머릿속에는 파리의 모습이 속속들이 담겨 있었다. 당시에는 고층빌딩이나 에펠탑도 없었지만 그는 로맨틱한 높이에서 내려다보는 도시의 모습을 종종 상상했다. 마치 새가 된 듯 하늘에서 굽어보며 길거리와 골목, 공원을 누볐고, 땅 아래로 내려와 파리의 하수도와 지하묘지를 탐험했다. 언젠가는 플래시 촬영기법을 발명해서 깜깜한 땅속 깊은 곳의 모습도 기록으로 남기겠다고 다짐했다. 한편 나다르는 여자들의 마음을 울리는 나쁜 남자로도 유명했다. 그는 당시 다른 프랑스 남자들보다 머리 하나 정도 더 커서 키가 180여 센티미터에 달했다. 살짝 사시가 있었던 그는 풍성한 적갈색 머리카락이 시야를 가리지 않도록 머리를 젖히는 습관이 있었다. 그에게 인생은 장난이었고 끝없는 추격전과 같았다. 그는 고딕 스타일의 유행에 맞춰서 이름을 나다르로 바꿨다. 어렴풋이 중세와 보헤미안의 분위기가 풍기고 도발적으로 들리는 이 이름은 그의 라이프스타일과도 잘 어울렸다. 그와 그의 못 말리는 친구들은 쫓겨나기 하루 전에 이 술집에서 저 술집으로 도망다니는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다. 파리의 다락방을 무대 위로 옮겨온 오페라 〈라 보엠 La Boheme 〉의 원래 이야기 속 주인공은 바로 펠릭스 나다르다..

22-23쪽) 사실 사랑을 만들어낸 것이 프랑스 사람들은 아니었다. 또한 낭만에 대한 독점권이 파리에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이러한 사실을 직접 체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내가 음미했던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보헤미안 기질이 느껴졌고 전체적으로 봤을 때 낭만적인 면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로마와 베니스 역시 지극히 낭만적인 도시였다. 내가 경험한 도시들 중 상당수는 파리 못지않게 멋졌다. 그중에는 더 볼 만하거나 흥미진진한 곳들도 있었다. 그런 도시들은 강이나 운하, 만이나 해안가, 언덕과 계곡 혹은 제대로 된 산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눈부신 건축물이 들어서 있었다. 몇몇 도시의 날씨는 기가 막힐 정도로 좋았고, 아름답고 멋지며 섹시하고 친근한 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또한 훌륭한 음식과 풍부한 와인, 역사, 미스터리 등을 간직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파리의 특별함은 과연 어디서 오는 것일까? 파리에서는 시큼한 효모 반죽 같은 일그러진 석고 회반죽 위로 낭만의 이스트라도 자라는 것일까? 끊이지 않고 내리는 비는 낭만적일까? 나는 파리에 도착한 후 처음 몇 달 동안에는 마냥 행복에 겨워 도시를 활보하고 다녔다. 그 낭만의 토대이자 뿌리가 되는 것들, 정말로 중요하지만 밖으로 드러나 있지 않은 거대하고도 어둡고 비밀스런 것들, 즉 파리와 파리지앵들에게 가장 중요한 생명선과 다름없는 것들을 그냥 지나쳐갔던 것이다..

48쪽)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었지만 파리는 대체로 큰 화는 면했다. 반면 1848년에는 단 나흘 만에 2만 명의 사망자를 내며 참혹하게 짓밟혔다. ? 이중 만 명의 시신은 센 강에 버려졌다고 한다. 1870년에서 1871년으로 넘어가는 겨울과 봄에는 프러시아 군대의 침략과 내전으로 인해 수만 명이 사망하면서 파리는 폐허가 되었다. 이 두 번의 난리가 할퀴고 간 흉터는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이 도대체 왜 중요한 것일까? 1830년 7월과 1848년 2월, 1870년, 1871년의 겨울과 봄에 일어난 정치적, 군사적 대격변은 그보다 앞서 일어난 1830년 2월의 이와는 다른 봉기, 즉 예상치 못했던 문학적, 연극적, 예술적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결코 발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바로 이러한 문화적 반란으로 인해 파리는 낭만주의의 수도가 되었으며, 사랑과 빛의 도시, 낭만의 도시가 되는 길을 떠나기 시작했다..

64-66쪽) 아름다운 것으로 유명한 쉴리 저택은 신의 없는 사랑과 열정이 꽃피었던 장소로도 유명하다.(........)1620년대에 지어진 이 저택은 파리에서 가장 세련된 바로크풍 도시 주택이며, 믿기 어려울 정도로 부유했던 쉴리 공작 가문이 살았던 곳이다. 앙리 4세 시절 재상이었던 쉴리 공작은 국왕이 마레지구 중앙광장인 보주 광장 조성 계획을 생각해내게 도왔던 인물이다. 수십 년간 열과 성을 다해 복원된 이 주택은 1980년대 후반에 소설 《위험한 관계 Liaison dangereuse 》를 영화로 만들 때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완벽하게 재현한 장소로 사용되었다. 《위험한 관계》는 쇼데를로 드 라클로의 작품으로 1700년대 후반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소설이다. 사드의 《쥐스틴 Justine 》과 함께 이 소설은 절대왕정체제 앙시앵 레짐Ancien Regime 말기의 냉소주의와 퇴폐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품으로 추앙받았다.

72-73쪽) 두 사람의 연애가 무르익는 데에는 몇 해가 걸렸다. 아델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러다가 냉정하게 효율을 따지면서 배신의 기술에 통달하는 경지에 올랐다. 생트뵈브는 가히 놀라웠다. 빅토르와의 우정은 우정대로 유지한 채 그의 아내를 유혹했고 그녀에 대한 자신의 모순적인 사랑을 공개적으로 인정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랑은 프랑스 기사도에서 남성이 여성에게 보이는 정중한 관심이라는 개념으로 인정되어 보호받았다. 이를 일컬어 열렬히 사랑할 권리 [droit a la passion] 라고 하는데, 이런 개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훗날 위고의 위대한 작품에 나오는 콰지모도의 모델이 되는 두꺼비처럼 못나고 흉측한 곱사등이였던 생트뵈브는 조금씩 아델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다. 일찍이 위고는 “추한 것이 아름답다”는 독트린을 선포하지 않았던가? 빅토르와 아델이 자녀들을 데리고 보주 광장으로 이사하자, 스토커 생트뵈브는 생 폴 거리 [rue Saint-Paul] 를 불안하게 굽어보고 있는 탑이 있는 불쑥 솟은 오래된 건물의 방을 빌렸다...

86-87쪽) 삶 안에서 이루어지는 교류는 전부 다 전쟁이거나 작은 충돌 또는 전투다. 바나나를 사는 일이건 커피를 주문하는 일이건 혼인허가서를 받는 일이건 모두가 다 그렇다. 부모가 애지중지하며 키운 프랑스 아이라 하더라도 무뚝뚝한 학교에 다녀야 하는 법이다. 억압적인 위계 안에서 살아남기 위한 투쟁은 어른의 삶에서는 침실과 가정이라는 전쟁터에서 드러난다. 전쟁을 일으키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파리라는 도시의 거리 곳곳에서는 열정적인 사랑을 과시하는 모습을 자주 목격한다. 이에 관해서는 명확한 기록이 남아 있다. 천년 전부터 존재하고 있는 비명문법에서 이러한 행위의 정당함과 열렬히 사랑할 권리ㅡ일종의 탈선 허가ㅡ를 보장하고 있는 것이다. 파리에서 사랑의 행위는 어디까지나 영예롭고, 즐겁고, 공공연하고, 과시할 만한 것이다. 보주 광장 아케이드나 파리에 있는 약 만여 개의 레스토랑과 카페의 노천에서 포도주를 곁들인 만찬을 즐기는 행위나, 사방에 있는 금연구역에서 담배를 피우는 행위나, 신호등이 빨간불인데도 태연하게 길을 건너는 행위처럼 말이다. 이렇듯 수세기 동안 파리는 영구적인 성 혁명, 치킨게임, 교통법 위반, 의례적인 저항, 키스 축제의 장이 되어 왔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낭만을 이루는 한 부분이다.

91쪽) 사람들은 위고가 그의 아내 아델을 영원히 사랑하면서도 그녀를 자연스럽게 배신했던 반면, 그의 뮤즈이자 50년간의 진정한 사랑이었던 쥘리에트에게는 충실했다고 믿었다. 쥘리에트가 사망한 그날 위고는 절필하였고, 이후로 내내 그녀를 그리워하며 지냈다고 전해진다. 현실이 어둡게 얽히고설킬 때 파리지앵들은 더 흥미진진해하고 영감을 받는 것 같다. 그래서 빅토르의 영혼의 절반은 그의 아내에게 바쳐졌고, 나머지 절반의 영혼과 심장 그리고 허리는 그의 정부에게 바쳐졌다는 말이 있다. 총천연색처럼 놀랍도록 다양했던 위고의 삶은 너무도 짜릿했기에 절대로 영화에서 볼 수 없다. 그의 삶은 영광, 아내에 대한 헌신, 연이은 간통, 명예, 배반, 경탄스러운 영웅주의, 지속적인 발기증, 우뚝 솟은 재능, 애타주의, 자기도취, 과시적 소비와 머리가 쭈뼛 설 정도의 도피 행각의 반복, 망명, 불편, 위험한 상황 등으로 점철되었다. 만약 프랑스의 낭만주의 영웅을 한 사람만 꼽으라고 한다면 온통 수염투성이인 데다 스핑크스처럼 수수께끼 같은 인물인 위고가 딱일 것이다.

100-101쪽) 그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되겠다는 야망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한번 아카데미 회원이 되면 영구적이었다. 아카데미의 내부에 들어가면 자신의 예술적, 정치적 목표를 실현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샤토브리앙처럼 되겠다. 그렇지 못하면 누구도 닮고 싶지 않다.” 청소년 시절 그가 내걸었던 모토다. 이제 프랑스 최고의 극작가, 시인, 작가가 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장관이나 국왕의 특별고문 같은 최고위 정부 관료가 되는 것이 그의 바람이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무상교육, 보통선거, 여성의 권리, 빈곤과 노예제도와 사형제의 폐지, 유럽합중국 창설 ?유럽에서 전쟁이 반복되는 것을 피하기 위한 유일한 방안으로 그가 내세운 것 ? 과 같은 일을 이루기 위해 싸울 수 있겠는가? 위고가 내걸었던 사회적 안건은 많은 사람들, 특히 왕당파와 민족주의자들을 놀라게 했다. 부르봉 왕조로부터 연금을 받는 장군의 아들이 어떻게 루이 필립 왕을 좋아할 수 있다는 말인가? 어쩌다 이런 영재가 1인 혁명가가 되었단 말인가? 하지만 위고는 당대보다 적어도 한 세기는 앞서 나간 인물이었다..
118-119쪽) 하루나 일주일 또는 평생 동안 이곳 박물관에서 4,600년 정도 되는 파리의 역사를 즐기는 일은 꽤나 구미가 당긴다. 옛 온실에 전시되어 있는 신석기시대의 카누와 고대 로마시대의 유물을 구경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몇 세기를 건너뛰어 1차 세계대전 이전의 벨에포크 시대로 간 다음, 1920~30년대에 유행한 아르데코Art Deco 전시물 앞에서도 잠시 멈춘다. 다른 박물관에서는 가까운 과거를 다룬다. 주변에는 얕은 양각으로 조각한 왕의 기마상 ? 가령 앙리 4세 기마상 ? 이 군데군데 전시되어 있다. 또한 나폴레옹 3세와 오스만 남작이 파괴한 시테 섬 [Ile de la Cite] 과 그 일대를 재현한 3D 모형도 있다. (.........)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더라도 이런 전시물들을 지나칠 수 있다면, 계단으로 2층에 올라가서 동쪽으로 가보기 바란다. 그러면 1800년대와 낭만주의시대, 파리가 세계 최고의 도시로 부상한 바로 그 시대에 발을 들여놓게 될 것이다. 파리의 거리, 건물, 상점, 다른 박물관을 둘러보아도 왜 프랑스인들에게 신기혐오증 ? 새로운 것을 두려워하는 것 ? 이 있는지, 왜 미국의 자랑인 “그리고 그는 결코 뒤돌아보지 않았다”라는 말에 경악하는지 알 수 없었다면 카르나발레 박물관이 그 해답을 줄 것이다. 이곳에 가면 앞으로 나아가기 전에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는 야누스가 되어 낭만주의의 미스터리를 처음 접할 수 있을 것이다.

124-125쪽) 그림 속 오스만은 세상의 종말이라도 온 듯한 강한 욕구를 지닌 사람치고는 놀랄 만큼 젊게 그려져 있다. 그의 볼과 턱에는 수염이나 털이 없지만 목은 바싹 자른 수염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 두 남자의 모습에서는 모두 허영심이 묻어나온다. 바로 이들이 깨끗하게 재건된 파리를 탄생시킨 두 아버지다. 우리가 보통 빛의 도시라고 할 때 떠올리는 파리의 모습으로 도시를 탈바꿈시킨 장본인들이라는 말이다. 이들은 오래되고 위험한 것들을 파괴하고, 악취 나는 중세시대의 유서 깊은 구역들을 철거했다. (........) 제2제정 기간 동안 지난 수세기에 걸쳐 지어진 건물 약 25,000채와 수십 개의 오래된 거리와 지역들이 지도상에서 사라졌고, 30만 가구 이상이 이주당했다. 그 자리에는 새로 조성된 대로와 건축물, 기차역, 교회, 로터리, 그리고 급증하던 부르주아들을 위한 무수한 건물들이 들어섰다. 이로써 파리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졌고, 표면적으로 보면 알퐁스 카의 말은 거짓이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카가 남긴 복잡한 격언을 얄팍하게 문자 그대로 해석한 것일 뿐이다. 왜냐하면 결국에는 세상이 많이 변할수록 세상은 더욱 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134-135쪽) 똑똑한 것이 섹시하고, 지식인이 하나의 직업이며, 철학자들이 장관이 되고 영화를 만들고 베스트셀러 책을 쓰는 이런 문화에서는 그렇다. 반감의 정도를 따져본다면, 프랑스에서는 오직 맹신만이 무지나 프랑스인들의 골칫거리인 낙관주의?이것은 생각 깊은 파리지앵이라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미칠 듯한 세계관이다?보다 더 못하다고 간주된다. 이제 맹목적인 신앙은 열렬히 세속적이고 회의적인 사회, 냉혹한 이성과 우울한 비관주의라는 신을 숭배하는 사회의 주변인으로 있는 소수 신자들의 전유물이다. 이러한 신은 정신적인 건축물이자 실존주의의 추상적 토대이기 때문에 영웅적이다. 또한 문명이나 도시처럼 온전히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다. 지식은 행복을 파괴하고 우수를 낳는다. 하지만 파리에서는 오래 전부터 우수를 소중하게 여긴다. 왜냐하면 우수는 지성과 사고의 흔적이며 낭만주의와 낭만의 뿌리를 이루기 때문이다..

149-150쪽) 보들레르는 1840년대 초에 생 루이 섬으로 이사한다. 스물한 살에 불과했던 그는 그때 이미 수많은 시를 창작했다고 한다. 그중에는 훗날 그의 걸작으로 남은 《악의 꽃》도 있었다. 나이는 어렸지만 그는 이미 많은 곳을 여행했고, 계부와 다투고 완전히 갈라섰고, 주소를 수십 번 바꾸면서 완벽하게 방탕한 보헤미안의 삶을 살았다. 나중에 그의 목숨을 앗아가게 되는 성병도 앓았고, 그만큼 소란스러운 펠릭스 나다르, 앙리 뮈르제, 발자크 같은 예술가들과 친하게 지냈으며, 상속받았던 상당한 액수의 유산 대부분을 다 탕진해버렸다. 결국 그는 짧지만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던 일생 동안 그의 신탁재산 관리인, 끝없는 갈등을 겪었던 어머니, 몇몇 친구들에게 돈을 구걸하며 살았다. 그리고 그는 1867년 마흔여섯의 나이에 사망한다. 형편없는 비즈니스 감각에 씀씀이가 헤펐던 보들레르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놀랄 만한 체력으로 열심히 일했다. 그는 자신이 쓴 시, 산문시, 에세이, 기고문을 계속해서 다시 고쳐 쓰는 작업을 하지 않을 때에는 에드거 앨런 포의 전작全作을 번역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176-177쪽) 너무도 많은 측면에서 헤밍웨이는 위고를 닮았기에 이와 같은 그의 행동은 특히 이상해 보인다. 아마도 그는 무의식적으로는 위고의 흔적을 따랐지만, 위고는 그냥 건너뛰고 지나간 부분에서 흔들렸던 것 같다. 두 사람은 공통적으로 돈에 집착했으며, 벽을 바라보며 일어서서 글을 썼다. 두 사람 모두 계속해서 바람을 피웠고, 생 쉴피스 성당에서 각자의 인생에서 중요한 순간을 경험했다. 이곳에서 위고는 결혼을 했고 헤밍웨이는 파이퍼와 자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두 사람 모두 우울증과 자살로 고통받던 탄탄한 중산층 가정 출신이었으며, 둘 다 바다에 매료되어 있었고 노인과 바다에 대한 소설을 썼다. 두 사람은 두려움을 몰랐고, 자신을 희생하는 성향에 영웅적이었으며 재능도 있었는데, 이런 면들이 그들의 자아도취 성향을 보상해주었다. 둘 다 턱수염이 있어서 서로 닮아 보였는데, 나이가 들면서 턱수염은 멋지고, 눈에 띄고, 매력적인 자산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이 두 사람은 생 쉴피스 성당 바로 코앞에서 살았다. 그래서 만약 이들이 같은 시기에 살아 있었더라면 서로 지척에서 살았던 셈이 된다. 만약 그랬다면 두 사람은 어떤 말을 주고받았을까?

191-192쪽) 파리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에펠탑과 루브르 박물관이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은 곳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노트르담 대성당에 들어가거나 탑에 올라가려고 수백 미터씩 줄 서 있는 사람들을 보면 놀라고 만다. 수차례 복원된 고색창연한 대성당은 지어진 지 85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가장 많은 방문객 수를 자랑한다. 연간 이곳을 찾은 사람의 수는 1,350만 명으로, 이는 에펠탑 방문자의 두 배에 육박할 뿐만 아니라 팡테옹을 찾은 사람의 수보다 스무 배 더 많은 수치다. 비올레 르 뒥의 환상적인 복원을 두고 순수주의자들이 뭐라고 하건, 얼마나 많은 주민들이 관광객들 때문에 노트르담 성당에 서 영적 명상과 기도를 하는 것이 어렵다고 불평을 하건, 이 건물은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다. 여기서는 인위성, 모르는 게 약, 자기기만. 이런 것이 바로 그 성공의 열쇠다. 노트르담 대성당에 있는 조각상들이 복제품이며, 성당 건물에 사용된 돌 대부분이 새것이고, 스테인드글라스는 대체로 다시 만들어진 것이며, 원래 고딕 양식으로 지어졌던 이 성당의 모습을 보면 복원된 것보다 현저히 덜 고딕스럽다. 그런데 과연 이런 사실을 알거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197-198쪽) 라틴지구에 있는 모든 것은 남성과 여성의 신체 치수에 따라 만들어졌다. 사람을 기준으로 한 인간적인 비율 덕분에 우리는 보는 순간 너비와 높이가 얼마인지 알아챌 수 있다. 도시의 전경, 거리와 건물 안에 있는 커브, 고르지 않은 모습들, 다양한 질감과 재료 ? 돌, 벽돌, 목재, 주석, 타일 ? 는 유기적일 뿐만 아니라 단순한 눈요기 그 이상이다. 이런 것들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마치 긴 세월 동안 성장하고 선별적으로 잘리고, 다시 자라고 자라서 곳곳에 빈터와 들판이 섞여 있는 삼림지대나 숲처럼 자연스러운 느낌을 준다. 라틴지구에는 똑바른 것, 균형이 잘 맞는 것은 없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창문이 없는 건물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 지역 곳곳마다 생기가 넘치고 바쁘게 움직인다. 창문과 문이 많아서 어디든 들어갈 수 있고, 진열장은 보고 즐기라고 유혹한다. 이것은 사옥들이 몰려 있는 업무단지, 커다란 상자처럼 생긴 상점과 쇼핑몰로 대표되는 거대한 단일사회, 고층빌딩, 근대주의적 효율성을 바탕으로 한 설비 등과는 정반대의 모습이라고 하겠다. 라틴지구의 풍경은 소박하고, 토속적이고, 독립적이고, 혼돈스럽고, 예측을 불허하며 철저하게 파리다운 모습이다.

209-210쪽) “파리 시민들에게 물과 공기, 햇빛을 피할 그늘을 달라!”는 유명한 말을 한 인물이 루이 필립 시대에 센 지역의 지사이자 랑뷔토 공작이었던 클로드 필리베르 바르틀로Claude-Philibert Barthelot다. 그런데 그는 이 말을 할 때 물, 공기, 그늘 외에도 “빛”을 추가했어야 했다. 그는 왕정복고 시대의 선조들이 이미 시작해놓은 것을 바탕으로 파리를 “빛의 도시”로 탈바꿈시켰다. 이 방면에서 그는 나폴레옹 3세나 오스만보다 더 높은 점수를 딸 만하다. 하지만 이것은 파리에 대한 신화 중 일부다. 제2제정 덕분에 어떻게든 문명과 안락함, 모더니티가 등장했고, 급진적 사회주의자들의 위협을 받고 있던 어둡고 더럽고 무지몽매한 소도시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신화 말이다. 오히려 정반대의 내용이 진실이다. 제2제정은 파리를 폐허로 만들고 파산하게 했으며 프랑스를 25년은 뒷걸음질치게 만들었다.

217-218쪽) 위고를 위시해서 팡테옹에 안장된 그 다음 급의 위인들?그중에서도 뒤마와 졸라?을 보는 것 외에도 이곳이 관광객의 발길을 모으는 이유는 더 있다. 돔에서 바라보는 전망이 넋을 잃을 정도로 아름답기 때문인데, 에펠탑과 몽파르나스타워에서 보는 것보다 친밀한 느낌이 든다는 것이 특징이다. 뿐만 아니라 돔에서 보는 전망보다 훨씬 더 매력적인 것이 바로 팡테옹 중앙에 있는 푸코의 추다. 이동이 가능한 이 유명한 추는 팡테옹 경내에 여러 차례 전시되었다. 파리에 있는 많은 것들이 그렇듯, 영구적으로 움직이는 이 추 역시 복제품이다. 하지만 복제품이라고 해서 이 추의 경이로움이 반감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수십 년간 팡테옹에서 볼 수 없었던 이 추가 1995년에 재설치되는 장면을 보았던 것을 기억한다. 나는 몇 년에 한 번씩 이곳을 찾아와 추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면서 그 안에 담겨 있는 예언적인 의미를 명상한다.

264-265쪽) 상드는 사람을 볼 때 ? 그녀의 기준에 따라 ? 마땅히 그래야 하는 모습으로 보았다. 상드는 잘생긴 베니스 출신 의사 파젤로 와의 염문은 자신에게 곤란한 부분이므로 삭제하는 등 역사를 정당화하고 수정하고 편집하고 다시 썼다. 파젤로는 병든 뮈세의 목숨을 구해준 의사였다. 그녀는 뮈세를 버리고 파젤로를 품은 다음, 자신이 미친 남자로 표현했던 뮈세를 다시 만나더니 갑자기 두 남자 모두를 버리고 노앙으로 달아났다. 그랬으면서도 상드는 소설 속에서 자신의 갑작스런 변심에 대해서는 생략했다. 물론 주색에 빠졌던 뮈세의 행실이 용서받지 못할 만하다는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상드의 위선은 그보다 더 고약했을지도 모른다.
“조르주 상드는 그녀의 나비를 잡아 우리에 가두고 꽃과 꿀을 먹이로 주면서 길들인다. ?그녀가 사랑에 빠져 있는 시기가 바로 이때다.” 그녀의 절친한 친구였던 피아니스트 프란츠 리스트는 두 사람 사이의 친분에 금이 가기 시작했을 때 이렇게 밝혔다. “그런 다음 나비가 몸부림치면 그녀는 나비에 핀을 꽂는다. ? 이렇게 이별이 이루어지는데, 이별은 늘 그녀가 주도한다. 그 후 그녀는 나비를 해부하고 박제한 다음, 나중에 소설에 쓸 주인공 컬렉션에 포함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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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1-272쪽) 아름다운 만큼 위험하고 뻔뻔스러웠던 콜레는 욕정으로 가득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 11살 연하의 노르망디 출신의 순진한 시골 청년이었던 ? 애송이 플로베르를 샹젤리제 거리에서 흔들리는 마차 안에 태우고 천천히 덜컹거리며 달렸다. 바로 그때의 두 사람 사이의 열정이 에마 보바리의 이야기에 나오는 여주인공이 루앙Rouen 주변을 드라이브하는 장면으로 변형되었다.(.........) 뿐만 아니라 콜레로부터 영감을 받아 쓴 플로베르의 연애편지는 지금껏 내가 읽어본 연애편지들 중 가장 아름답고 총명한 편지 중 하나다. 상드와 미미처럼 콜레도 신뢰할 수 없는 배신과 낙원 같은 성행위를 일삼는 여사제로 군림하면서 그에게 영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306쪽) 발자크와 뮈세, 나다르가 영원한 청춘이라고 한다면, 역설을 좋아하는 외젠 들라크루아는 영원한 고대인이었으며, 젊은 이상주의자만큼이나 늘 착실했다. 겉으로 보기에 그는 과묵하고 예의발랐으며, 때때로 다정다감했다. 다른 한편으로, 41년간 불규칙하게 쓴 그의 일기와 그의 미술 작품을 보면 내면의 고통과 열정, 갈망, 그리고 어두운 천재성이 엿보인다. 무게 잡는 것을 좋아하고 다른 사람에 대해 비판을 잘 하고, 정치적으로는 보수적이며 걸핏하면 싸우기 좋아했던 그였지만, 공감능력도 많고 매우 관대한 사람이기도 했다. 박식한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 그 역시 캔버스나 종이, 석고로 표현하는 것만큼 언어로 솜씨 있게 표현하는 데도 능했다. 뤽상부르 공원 하면 위고와 상드가 떠오르는 것이 사실이지만, 실상 이 공원은 들라크루아의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곳에는 혁명적 색채주의자 들라크루아의 초상화가 하나도 둘도 아닌 세 개나 있다..

314-315쪽) 배가 고프면 또렷하게 생각할 수 있어서 헤밍웨이는 배고픔을 좋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가 가장 또렷하게 사고했던 순간은 당시 뤽상부르 박물관에 걸려 있던 세잔의 그림을 감상할 때였다. 그의 글을 보면, 이 박물관은 그가 지독히 가난하게 살던 집에서 살을 에는 듯한 추위를 뚫고 하염없이 걸어야 닿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 그가 거처했던 각양각색의 방이나 아파트는 모두 마법처럼 뤽상부르에서 도보로 15분 거리에 있었다. 심지어 그가 살았던 금박으로 장식한 듯 화려한 보헤미안 거처는 불과 반 블록 떨어져 있는 페루 거리에 있었다. 헤밍웨이가 이렇게 자신의 그림을 주시하는 것을 세잔이 알았다면 어떻게 생각했을까? 세잔이 피카소와 브라크Braque가 창안한 미술사조인 입체파의 조상격인 원조 입체파이듯, 헤밍웨이는 아마도 원조 입체파 문인이 아니었을까? 헤밍웨이는 그의 단순한 문장을 조각하는 법을 세잔에게서 배웠다고 주장했다. 세잔은 들라크루아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물론 전문 교육을 받지 않은 일반인의 눈에는 이들 간의 연결고리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입체파라는 용어를 만든 사람이 세잔이나 피카소나 브라크 같은 미술가가 아니라 시인 아폴리네르Apollinaire였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미술과 문학이 밀접하게 연관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아폴리네르와 피카소, 두 사람 모두 들라크루아의 열성적인 숭배자였다..

354쪽) 뒤마는 예술 후견인으로서 들라크루아의 작품을 구입했고 마치 ‘모두 하나가 되어’라고 부르짖는 총사처럼 들라크루아의 작품을 옹호했다. 또한 전위적인 화가였던 들라크루아가 수명이 아주 짧으면서도 당대에 가장 위대하고 유례없는 최첨단 작품 중 하나를 그리도록 유도했다. 이 작품은 일종의 자유로운 형식의 액션 페인팅으로 단 하룻밤 동안만 전시할 의도로 그려진 것이다. 하지만 낭만주의 시대의 이 위대한 예술 행위가 일어난 장소는 볼테르 부두도 아니고 센 강 좌안 어디도 아니다. 바로 파리 낭만주의의 새로운 아지트로 부상한 곳, 즉 좌안에서 멀리 떨어진 우안에 있는 신아테네 [Na Nouvelle Athenes / The New Athens]로 알려진 곳에서, 그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뒤마의 작은 아파트에서 일어났다. 오늘날에도 낭만주의 정신이 살아 있는 성지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신아테네 지역을 찾는 이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408-409쪽) 몽마르트르라는 이름은 마르스의 산이라는 뜻을 지닌 몬스 마르티스Mons Martis에서 파생된 것이다. 이곳은 이제 20세기 후기 낭만주의적 낭만주의와 현대적 관광의 요람이자 진원지가 되었다. 하지만 2천 년 전의 이곳은 신아테네 지역의 여배우 마드무아젤 마르스가 아니라 격노한 이교도의 신 마르스에게 바쳐진 곳이었다. 그런데 몬스 마르티스라는 이름은 중세 때 잘못 알려져서 그리스도교 성인전에 적합하도록 마르스Mars가 마르티르martyr 로 바뀌었다. 성 드니 성인은 이 언덕 면에 있는 성스러운 샘물 근처에서 참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샘물 때문에 안개가 자주 끼었고, 그래서 길 건너편에 있는 “안개의 성”에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 안개의 성은 최근에 약 천만 달러 가격에 시장에 나왔다. 요즘에는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마차나 말을 타고 오지는 않는다. 원한다면 시에서 운영하는 소형버스나 몽마르트르 코끼리열차를 타고 올 수 있다. 하지만 이보다 더 낫고 훨씬 더 품위 있는 방법은 사크레 쾨르 대성당 근처 언덕 꼭대기의 테라스에 있는 손바닥만 한 작은 공원인 나다르 공원 행 케이블카를 타는 것이다. 그렇게 정상에 도착한 다음에는 힘들이지 않고 언덕을 내려가면 된다. 이때 아래로 기분 좋은 전망을 감상할 수 있다.

419쪽) 무명 화가들이 많이 모여 있는 것으로 유명한 테르트르 광장에는 라 보엠보다 더 오래되고 더 유명한 레스토랑 라 메르 카트린La Mere Catherine이 있다. 늘 빈털터리였던 모딜리아니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에 수중에 돈이 몇 푼 생기면 이곳에 와서 싼 값으로 밥을 먹고 술을 진탕 마셨다. 워낙 술을 마시고 주사가 심했던지라 그의 별명 모디Midi 는 본명 모딜리아니Modigliani를 짧게 줄인 말일 뿐만 아니라, 프랑스어로 ‘빌어먹을, 저주받을’이라는 뜻의 단어 모디Maudit 를 가지고 말장난을 한 것이기도 했다. 모딜리아니는 숫총각 시인이자 저주받은 시인 보들레르의 후계자가 되는 것이 좋았던 모양이다. 그는 피카소, 브라크와 대립했고, 종종 주먹다짐을 하기도 했다. 모딜리아니는 전면적인 낭만주의자였으며, 후기인상파에서 야수파, 특히 입체파, 그리고 다양한 초기 모더니즘까지 모든 사조를 거부한 구상 화가였다.

423-424쪽) 쇼팽이 신아테네에서 피아노를 연주했을 때 조르주 상드가 그가 연주한 “블루 노트”를 감지했다는 유명한 이야기를 아마 피카소도 들어서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피카소가 이 사실을 알고 있었건 몰랐었건, 그는 푸른색이 수세기 동안 영성과 신성한 사색, 우수를 나타내는 빛깔이었음을 알고 있었다. 1900년부터 1904년 사이에 몽마르트르에서 그린 피카소의 작품들은 구상적이었고 배색, 주제, 분위기가 푸른빛에 우울했다. 이는 그가 지속적으로 지니고 있던 그 안의 낭만주의가 반영된 결과였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비전문가들이나 전문 컬렉터들 사이에서나 지금도 가장 인기있는 작품으로 남아 있다. 이는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가령 그의 작품 〈파이프를 든 소년〉은 2004년에 1억 4백만 달러가 넘는 가격에 거래되었다. 바토 라부아르에서 작업하는 동안에도 여전히 구상적이고 낭만주의적인 작품을 그렸던 피카소는 일 년 남짓한 기간 동안 색조와 주제가 부분적으로 겹치는 시기를 겪으면서 더 낙관적인 장밋빛시대로 조금씩 접어들었다. 밝은 느낌이 지배하는 이 시기의 작품으로는 〈여인과 까마귀〉나 〈곡예사〉와〈어릿광대〉그림들을 떠올리면 된다.

443-444쪽) 아마도 고티에는 더 통찰력 있게 글을 읽었던 것 같다. 그는 발자크가 “근대적 아름다움을 독창적으로 이해한다”고 추켜세웠다. 또한 그의 글에서는 책략과 속도가 모든 것을 능가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스타일이 거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보들레르가 발자크를 금세기의 천재라고 찬양한 이유도 바로 이 근대성 때문이다. 낭만주의자의 심장을 감춘 반고전주의자였던 발자크는 패션, 거리 위의 삶, 음식, 술, 오락, 범죄, 매춘, 살인과 폭력의 매력을 자랑스러워했다. 아무리 추하고 역겹고 공격적이고 모순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살아 있고 변할 수 있는 동시대적인 모든 것을 그는 기뻐했다. 발자크의 의도가 분명히 드러나는 글쓰기 방식과 영화적 기법은 주제에 적합할 뿐만 아니라, 그의 작품 출간 계획에 따라 글을 쓸 수 있는 시간 제약이 살인적인 수준인 그의 형편에도 딱 맞는 것이다. 그의 책은 마치 영화나 TV 시리즈처럼 읽히며, 실제로도 시리즈로 나와서 발자크는 마라톤 명문장가가 되었다. 빚과 야망이 그를 계속 달리게 만들었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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