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여러 유형의 ‘꿈’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그것은 때로는 악몽이며, 때로는 잘못된 죽음이 없는, 더 나은 사회를 향한 열망인 듯하다. 망각된 타자에 대한 배려, 몰입, 소망, 결의가 전이된 결과인 것으로 보인다.”
- 문영민, 「‘민중’과 민중미술을 넘어서」, 42~43쪽.
“그는 우리에게는 아마추어로, 미적 형식적 실험을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있는 그대로의 타자의 감각이 현시되고 있는 영상을 만들어내는 낯선 ‘예술가’로, 그리고 자기 자신을 이미 사랑하고 있기에 자신이 얼마나 타자인지를 알지 못하는 이방인으로 와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한번에 선명하고 단호하게 설명하거나 호명할 수 없다.”
- 양효실, 「누구나 당신인 곳, 인민의 시적 영상화」, 78쪽.
“바로 우리의 발밑에, 아름답게 촬영된 풍경 아래, 언덕 하나하나, 숲과 건물, 집, 군부대 아래 망자들이 누워있다. 림보(limbo)에 남겨진 망자들, 인간성을 부정당한 이들, 과거·현재·미래의 망자들이 기다리고 있는 화해의 수단은 우리가 시간을 이해하는 방식을 전환함으로써만 가능한 수단이다. 중심을 달리하는 유목학적 사유와 생태적 시간의 순환적 속성을 통해 우리는 임흥순이 도입한 전략을 이해할 수 있다.”
- 조지 클라크, 「땅 아래」, 117쪽.
“우리는 이제 임흥순의 거의 모든 작품을 지배하는, 또 그 못잖게 2000년대 이후 한국의 숱한 영상 작업의 형식적인 프로토콜이라고 불러도 좋을 풍경의 이미지를 피할 수 없다. (…) 그렇다면 메시지로서의 이미지, 재현으로서의 이미지와 대립하는 정동?풍경의 이미지는 역사적인 서사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리는 표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정동?풍경 자체를 주된 이미지 텍스트로 삼고 있는 임흥순의 거의 모든 작업은 이러한 기억과 역사 사이에서 우리가 얼마나 방황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 서동진, 「역사를 잃은 세계의 기억 멜랑콜리」, 139~140쪽.
“임흥순의 영상 작업에서 이야기가 솟아나고 역사의 형상이 드러나는 것은 다름 아닌 풍경과 말의 불화를 통해서다. 그의 작품에서 역사는 정동의 풍경을 통해 전해지는 것이 아니며, 장소의 지질학을 통해 파악되는 것도 아니며, 증언의 말 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오직 말과 풍경의 어긋남을 통해서만 감지되는 무엇이다.”
- 유운성, 「무명(無名)의 역사: 영화평론가 Y와 영상작가 P의 두 번째 대화」, 229쪽.
“임흥순의 작품의 시각적 분절 스타일을 ‘긍정’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한편으로는 영화적 관습 자체에 대한 실험(그는 관습적인 영화 법칙을 따르지 않고 법칙들을 물색한다)을 통해 아름다움, 즉 등장인물이 경험한 실제 사건을 숙고하게 하는 시적인 칼날(poetic knife)로서의 아름다움을 현시하는 예술의 진정한 속성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 만수르 지크리, 「긍정 미학을 보는 시선」, 251~252쪽.
“임흥순의 전시 공간에서 이야기는 서술되는 판의 변용 형태에 따라 여러 방식으로 가용된다. 이처럼 전시장은 이야기의 서사 구조와 전시의 모양새가 연계되는 일종의 그릇으로 작동하는데, 이러한 방식이 가장 두드러진 전시가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이다.”
- 강수정, 「비는 마음」, 262쪽.
“노랑색 애도는 작가와 그의 대상에게 새로운 여명으로 가는 길을 내비친다. 불투명한 노랑을 낳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임흥순은 이를 탐색하는 가운데, 저 미학적 질문을 정치적인 질문으로 탈바꿈시킨다. 임흥순의 작업에서 빨강과 파랑은 언제나 노랑이라는 색을 만들기 위해 뒤섞여야 할 것들이다.”
- 오사카 고이치로, 「빨강, 파랑, 그리고 노랑」, 281쪽.
“여기서 임 작가의 작업에 가끔 등장하는 자료의 성격에 대해 이제 이해가 가네요. 정보적 가치를 지닌 실증 자료의 성격이 없지 않지만 그 또한 중간이에요. 때로는 오히려 가시적 현상이나 사실의 경계를 흐릿하게 하죠. 그래서 무의식이 스윽 나오게 한다고 생각했어요. 사실을 뒷받침하는 듯한데 다른 사실을 알려주는, 영상에서 자주 등장하는 광목천으로 된 막처럼, 이중 역할을 해요.”
- 김희진, 「임흥순의 작업 감상 기록」, 3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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