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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천사 루시퍼에게

나의 천사 루시퍼에게

리뷰 총점8.8 리뷰 14건 | 판매지수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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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8년 09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328쪽 | 322g | 128*188*30mm
ISBN13 9788950977511
ISBN10 8950977516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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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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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집에 난데없이 발견된 낯선 여자의 일기장. 나는 일기를 쓰지 않는다. 내 것이 아니니 그의 것이어야 하는데 이것은 여자의 글씨체다. 그의 글씨일 수도 있다는 데까지 생각이 이르자 마른침을 삼키게 된다. 일기를 쓴 날짜를 보니 그와 내가 만나던 때다. 설마……. 나는 아무 장이나 펼치고, 손에 짚이는 문장을 읽는다.
“내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가 생각난다.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던가. 우리 세 사람은 아주 많이 삐걱거리며 오늘에 이르렀다.”
‘세 사람’ 중에 그가 포함되어 있는 것일까? 서재에 한참 앉아 있으니 엉덩이의 감각이 둔해진다. 나는 읽던 것을 챙겨 들고 거실로 나와 소파에 걸터앉는다. 벽시계를 보니 그가 돌아오기 까지 네다섯 시간이 남아 있다. 나는 일말의 의심을 다독인다. 일기장을 꼼꼼히 읽어볼 시간은 충분하다. 그와 관련된 여자의 것인지는 차차 밝혀지리라. 나는 일기장의 맨 첫 장으로 돌아간다. ‘그 여자가 나타났다’라는 문장으로 낯선 여자의 일기가 시작되었다. --- p.14~15

대문 앞에는 붉은색 입간판이 서 있었다. 그곳은 장미 길에서 유일하게 장미나무가 없는 집, 악마 심리상담소였다.
“참치 캔, 그놈이 루시퍼의 그놈이었어. 진짜 그놈이었어.”
요망한 콘셉트로 사람을 홀린다는 마성의 상담사. 소문에 의하면 그의 한마디에 실어증 걸린 여자가 폭풍 수다를 떨며 나왔고, 개마냥 끌려 들어간 남자는 다음에 또 만나요, 손을 흔들며 나왔다는. 그래서 점쟁이를 찾아가듯 찾는다던 그곳, 악마 심리상담소 루시퍼. --- p.27

루시퍼는 여자를 자세히 보았다. 인간의 상처는 더러 곪아 터져 징그러운 몰골이기 일쑤였다. 누구든 작은 균열쯤 안고 살기 마련이므로 길을 걷다 보면 갖가지 추한 것이 시야에 들이닥쳤다. 때문에 루시퍼는 바깥출입을 삼갔고 나가더라도 고개를 숙이고 걷는 일이 잦았다. 그런데 한 번도 본 적 없는 부류의 인간이 나타났다. 핑크빛 유리 파편으로 짜 맞춰놓은 하트 모양의 심장은 잘 세공된 다이아몬드 같았다. 여자의 얇은 피부 밑에서 반짝이는 것은 상처 없이 순결한 심장이었다.
뒤늦게 인기척을 느꼈는지 여자가 돌아보았다. 그는 저도 모르게 여자에게 다가섰다. 하마터면 여자의 가슴에 손을 얹을 뻔했다. 물론 여체의 곡선이 아닌 심장 때문이었다. 인간, 너는 정체가 뭐지? 질문을 담은 눈으로 여자를 살폈다. --- p.30

저는 은지였다가 얼마 뒤 새로운 가족을 만나 예림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어요. 그런데 누구도 나를 그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어요. 양어머니는 ‘야’ 하고 불렀죠. 두 남자에게 화가 나면 나를 꼬집고 때리다 천 원짜리를 쥐어주었어요. 양아버지는 그나마 나를 아껴줬는데 그것도 내가 작고 예쁠 때의 이야기였어요. 그는 날 ‘년’이라 불렀어요. 같이 목욕하자거나 치마를 들어보라는 말은 내가 살이 찌며 사라졌어요. 뚝심 있는 남자의 아들답게 양오빠는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것’이라 불렀죠. 눈에 띄면 내 뒤통수를 휘갈기며 악마같이 웃었어요. 새로운 가족은 삼각형이었어요. 모두 저들의 방향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이었죠. 도대체 왜 나를 입양했을까. 그게 항상 궁금했어요. 애완견 같은 거였을까요? 그들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려던 때도 있었어요. 그들의 기준에 알맞은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말라야 해. 예뻐져야 해. 착해야 해. 착실해야 해. 해야 해, 해야 해……. 그 말에 밀려 벼랑 끝에 서면 먹을 걸 찾았어요. 공기를 마셔야 살 수 있듯이 음식이 목구멍까지 차올라야 숨이 트였어요. 나이가 들어 제게 다른 사회가 생겼지만 나는 무엇과도 맞지 않았죠. 이 세상은 각진 사람들의 세상이었으니까. 뾰족한 사람들이 서로 맞물려 또 다른 뾰족함을 찾아 헤매는 세상. 나는 어디에서도 살 수 없는 사람이었던 거예요. 살아남고자 목구멍에 오른손을 집어넣었어요. 먹은 것을 게워냈죠. 위가 올라붙고 식도가 타들어갔어요. 헛구역질에 상체가 들썩거릴 때마다 기억의 조각이 밤에 붙었다 낮에 붙었다 했어요. 그맘때 뜬금없는 장소에서 가족들의 힐난이 들리기 시작했어요. 환청에 시달려도 달라지는 건 없었어요. 나는 여전히 못생기고 뚱뚱한, 거기다 미치기까지 한 여자일 뿐이었죠. 나는 울었어요. 구석에서 혼자 울었어요. 울어도 듣는 이 없으니, 멈춰지지 않았어요. 우렁차게, 누구도 지나치지 못하도록 울었습니다. 구조되고 싶어서. 구원받고 싶어서. --- p.81~82

“여기에 서명하면 됩니다.”
“아무것도 안 적힌 종이잖아요?”
“내담자의 사연은 철저히 비밀 보장된다. 상담소에서 일어난 일은 누구든 유출하지 않는다. 내담자의 상처는 치료 후 완쾌를 장담한다. 내담자의 기억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
“여기 그렇게 쓰여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계약 내용은 구두로 설명하고 여기에는 서명만 받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약물도 사용하지 않습니다. 불법적인 것도 없습니다.”
18번이 품고 있던 상처 솜뭉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기회를 틈타 그가 밀어붙였다.
“특별한 치료를 받으시겠습니까?”
18번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녀는 자신의 치맛자락을 움켜잡았다가 놓았다. 손등 상처는 먹은 것을 토해내기 위해 목구멍에 손가락을 집어넣을 때 생긴 것이었다. 루시퍼는 그 상처에서 눈길을 거두고 만년필 한 자루를 내밀었다. 까만 만년필은 붉은 피를 담고 있었다. 18번이 떨리는 손끝으로 받았다. 종이 귀퉁이에 빨간 글씨체로 ‘임은지’라고 적어 넣었다. 그녀는 만년필을 반납하며 질문했다.
“기억이 지워지나요?”
“상처와 관련된 기억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헤어진 남자친구에게 상처를 받았다고 남자친구의 존재를 지워버리는 게 아닌 것처럼.”
“그럼요?”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18번의 귓전에 속삭였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눈을 감았다 뜨면 마음이 편안해져 있을 겁니다. 이제 당신의 상처를 삼켜드리겠습니다. 눈을 감으십시오. 절대 눈을 뜨시면 안 됩니다. 계약서 위반으로 무서운 일이 생길 수 있으니.”
겁을 주자 18번은 힘껏 눈을 감았다. 무릎 위에 올려둔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윽고 18번의 얼굴 위로 그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잠시 후, 18번은 한숨 푹 자고 일어난 사람마냥, 소파에 묻었던 나른한 몸을 일으켰다.
“자고 일어나니 기분이 좋지 않습니까?”
18번에게서 한 걸음 물러난 루시퍼가 물었다. 18번의 인상이 바뀌어 있었다.
“제가 잠이 들었나요?”
“맛있는 잠은 만병통치약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18번에게 루시퍼가 빙긋 웃어 보였다. 18번은 오랜만에 아주 깊은 잠을 잤다며 기지개를 켰다. 그녀는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상담실을 나섰다. 기억을 편집당한 채, 상처만 루시퍼에게 버리고. --- p.83~85

“18번이라는 말입니다.”
내담자에게 붙는 숫자는 무료 상담 100명 중 18번째라는 뜻이었다. 앞으로 82명이 필요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구원의 재판에서 증빙 자료로서의 가치도 있었기에 그는 악마의 계약서를 열심히 모아왔다. 루시퍼가 내담자에게 번호를 부여해가며 카운트다운하는 까닭도 거기에 있었다. 앞으로 82명의 계약서만 더 모으면 그는 그분이 주관하는 재판에 서게 될 터였다. 고려가 크게 머리를 주억거리며 대꾸했다.
“아, 아~ 십팔 번. 네, 찾아볼게요.”
“잠깐, 고객님이 아니라 내담자.”
그의 부름에 그녀가 상담실 문 사이로 머리를 내밀고 시정했다.
“내. 남. 자.”
“네 남자”
아나운서 발음을 흉내 내며 고려가 아래턱을 과하게 뺐다. 그녀는 무엇을 틀렸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루시퍼는 어쩔 도리 없이 그녀를 마주 보았다.
“올 래(來), 말씀 담(談), 놈 자(者). 말하러 오는 놈. 아니, 인간.”
“아, 래담자.”
“래 말고, 내.”
“내담자.”
발음을 교정해주자 곧잘 따라했다. 루시퍼는 그녀의 얼굴을 피해 고개를 떨어뜨렸다. 말이 다 끝난 줄 알고 돌아서는 고려를 그가 또 불러 세웠다.
“저기!”
루시퍼는 그녀를 불러놓고 우물쭈물했다. 명확히 말해야 하는데 막막했다. 그의 머릿속에서 갖은 단어가 빙글빙글 돌았다. 그는 아무렇게나 머릿속에서 단어들을 잡아 내린 후 최대한 감정을 섞지 않은 어투로 말했다.
“앞으로는 예쁘지 않게 일해주길 부탁합니다. 예. 쁘. 지. 않. 게.” --- p.87~89

“왜 웃어요?”
“당신은 정말…….”
마음 한구석이 몽글몽글해졌다. 새파란 마음에 흰 사랑이 둥글게, 둥글게 퍼지고 있었다. 웃느라 맺힌 눈물을 손가락 끝으로 훔치며 그가 우물쭈물 뭐라 말하려다 급하게 둘러댔다.
“당신은 정말 왜라는 말을 많이 쓰는 것, 아십니까?”
나는 솜사탕 같은 기분을 물리쳤다. 말려들지 말자. 나를 놀리고 있는 것이렷다. 이에 질세라 그의 화법을 따라했다.
“그쪽은 말투가 이상하다는 것, 아십니까?”
그는 생전 처음 듣는 말이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나는 그에게 몰아붙였다.
“몰랐어요?”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그 모양새 또한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박 여사는 참 무책임한 어른이로군. 나는 혀를 끌끌 찼다.
“쯧쯧, 좋아요. 앞으로는 내가 그런 말을 해드리죠.”
내 심장이 가슴을 뚫고 나오지 못해 발광을 했다. 눈을 게슴츠레 뜬 그의 머리 위에는 물음표가 떠 있었다. 나는 대수롭지 않은 척 대꾸했다.
“이에 고춧가루가 꼈을 때, 코털이 삐져나왔을 때, 티셔츠 겨드랑이 부분이 땀에 젖어 흉측할 때, 누가 그쪽 흉볼 때, 오늘처럼 그쪽 말투가 이상할 때. 절대 미워하지 않고 내가 당신 편이 되어서 일일이 말해준다고요. 콜?”
당신의 동그라미 안에 살짝 발을 걸쳐도 좋은지, 그렇게 해도 좋을 만큼 나와 가까워질 의사가 있는지 묻는 말이었다. 루시퍼라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를지도……. 모르면 말고. 상처 받기 싫은 핫한 마음이 쿨한 척을 했다. 그가 한동안 나를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손바닥에 땀이 났다. 바싹 타들어가는 입술을 침으로 축이고 그의 입술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너무도 느리게 열리는 그의 입술이 야속했다. 슬로모션이 풀리고 드디어 그의 목소리가 내게 닿았다.
“콜이 뭡니까?” --- p.111~112

“심리상담사가 치매도 고칠 수 있는지 몰랐어요.”
“치매가 아닙니다.”
그녀의 경악과 동시에 파란 불이 들어왔다. 둘은 횡단보도를 건너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자에게 치매와 닮은 증상이 있기는 했습니다. 노인 우울증 원인 중 20퍼센트가 배우자 사별입니다. 노인 우울증이 깊어지면 간혹 치매와 흡사한 증상들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큰 병원에서 정밀검사를 했다면 생물학적인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었을 겁니다.”
“생물학적인 문제?”
“뇌세포 손상이 없다, 뭐 그런 말입니다. 19번은 가성치매입니다. 가짜 치매라고하면 이해가 빠르겠습니다. 치매와 증상이 비슷해 보이지만 다릅니다. 잃어버린 최근의 기억을 어떻게든 짜 맞추려는 치매 환자들과 달리 노인 우울증 환자들은 쉽게 모른다는 대답으로 일관합니다. 또 우울증이 치료된다면 기억력뿐만 아니라 모든 인지기능이 회복됩니다.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루시퍼는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능력이 있을 뿐, 신체의 손상으로 인한 정신 질환은 손댈 수 없었다. --- p.165~166

“릴리스, 고려는 내게 유일하게 아름다운 인간이다.”
그가 엄하게 주의를 주었다. 온화한 그의 웃음에 릴리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놓았다.
“당신은 제게 단 한 번도 그렇게 웃어주신 적 없으십니다.”
한참 만에 루시퍼가 베개를 안은 채 이야기 하나를 꺼냈다.
“옛날에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가 있었다. 천사 같은 것이지. 천상에 사는 아름다운 여인은 목욕을 하러 지상에 내려오곤 했다. 그리고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나무꾼이 있었는데. 어느 날, 위험에 처한 사슴을 도와주고 선녀들이 목욕하는 곳을 알게 되지. 나무꾼은 선녀의 날개옷을 훔친다. 그것으로 선녀를 붙잡지.”
“그런 무례한 인간을 보았나! 아무리 천사의 일이라 해도 가만두지 않겠습니다.”
이를 악물고 격분하는 릴리스를 진정시키며 그는 이야기를 더했다.
“선녀는 자신이 낳은 아이들까지 데리고 날개옷을 찾아 고향으로 돌아간다.”
“스스로 지옥 같은 곳을 벗어난 것 아닙니까? 아주 장한 천사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나무꾼은 멍청했어. 아이를 낳고 살면서도 선녀의 마음을 얻지 못했으니까 말이야. 시작은 겁박이었으나 선녀와 나무꾼 사이에 사랑이 있었다면 선녀는 날개옷을 입고도 떠나지 않았을 텐데…….”
“겁박으로 시작해 사랑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 맞다. 나는 나무꾼에게 날개옷을 갖다 바치는 선녀다. 제발 나와 살아달라고, 우리의 아이를 낳게 해달라고 빌면서 말이지. 나는 절대 나무꾼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너는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했느냐.”
--- p.218~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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