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死者 숭배란 것은 고대 이집트 등에 전형적으로 나타나듯이 죽은 자의 내세에 강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며 내세 신앙의 성격이 짙다. 하지만 조상 숭배는 이것과는 거꾸로 오히려 현세에의 관심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결국 조상의 영혼이 현세의 자손을 지켜준다는 현세적 관심이 중심이 되어 있어, 조상의 영혼이 실재하는가 혹은 사후 세계가 어떠한가라는 긴요한 문제에는 극히 냉담한 것이 보통이다. 한마디로 하면 사자 숭배가 내세적인 데 반해 조상 숭배는 현세적이다. 조상 숭배는 현세의 자손을 결집시킨다는 기능을 갖는 데 반해 사자 숭배에는 그런 것이 없다. 이 때문에 사자 숭배가 성했던 이집트에서는 씨족 제도가 일찍이 해체되어버렸지만 조상 숭배가 강한 중국에서는 씨족제가 길이 유지되었다.
무릇 사랑의 범위가 확대된다는 것은 유가가 말하듯이 직선적으로 나아가는 것일까. 가족애를 그대로 확대하면 애국심이 될까. 전쟁 장면을 생각해 보자. 그 경우 애국심은 가족애의 부정 없이는 성립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애국심을 확대하면 그대로 인류애로 될 수 있을까. 여기서도 전쟁 장면을 생각해보면 좋다. 인류애는 애국심의 극복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랑의 확대는 직선적으로 진행하는 것은 아니고 늘 자기부정 위에 성립한다는, 말하자면 변증법적 전개에 의할 수밖에는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되돌아보면 제자백가 시대란 것은 중국 사상사에서 극히 특이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과연 진·한 이후 사상계에서는 전국 시대의 사상계를 넘어서는 깊이와 정밀함을 보여주는 점이 있다 해도, 전체로서는 유교 일색으로 온통 도배되어 제자백가 사상의 다채로운 취향을 나타낼 수 없었다. 겸애를 설파하는 묵가, 논리와 궤변을 종횡으로 휘두른 명가, 정면에서 대담하게 도덕을 부정하는 한비자 등의 전통은 전국 시대를 최후로 영구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만일 제자백가의 전통이 그대로 유지, 발전되었더라면 중국 사상사는 지금 보는 것보다도 훨씬 변화가 풍부한 것이 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중국의 불행은 유교라는 하나의 교리가 2천 년이란 장기간에 걸쳐 사상계를 지배했다는 사실에 있다. 물론 유교는 법가 따위와는 달리 분서갱유라는 강경 수단을 취하는 일은 드물었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왕조라는 강대한 권력이 있었다. 더욱이 지식인이 전부 관리 내지 관리 지향형의 인간이었다는 중국 특유의 사정은 이 관제 사상에 대한 저항을 극히 미약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사상은 무엇보다도 자유를 요구한다. 강력한 왕조 지배 아래에서는 진실로 생명 있는 사상은 발생하지 않는다. 전국 시대나 육조 시대는 분열의 시기이며, 정치적으로는 암흑의 시대이다. 그럼에도 풍부하고 다채로운 사상이 발생한 것은 다름 아니라 거기에 무질서에 의한 자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경서의 권위가 확립됨과 함께 경서를 연구하고 해석하는 ‘경학經學’이 발생했다. 이는 기독교의 성서학 내지 신학에 해당하는 것으로 한대 이후의 유학은 경학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할 것이다. 이를테면 송宋의 주자학朱子學이나 명明의 양명학陽明學 등은 노장과 불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유학이기는 하지만 최후의 거점은 역시 경서였으며, 다만 그 해석이 종래와 달랐다는 데 머무른다. 따라서 주자학이나 양명학은 경학 내부에서 발생한 시대적인 변천이며, 경학의 외부로 벗어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전체로서 위 왕조의 정시 시대는 노장풍의 청담가들에게는 오히려 수난과 시련의 시기였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노장 사상의 실천이라는 면에서도 적지 않게 불철저한 점을 남기고 있다. 이를 ‘정시의 풍조’로 이상화하는 것은 다음 서진西晋의 ‘원강元康의 풍조’가 방종의 극한에 이른 결과 마침내 망국을 불러왔다는 반성에서 나온 것이다.
그 때문에 황하 유역인 중원中原에 사는 중국인은 귀족·호족은 말할 나위 없고 귀천노소를 가릴 것 없이 서로 손잡고 강남江南 지역으로 피난했다. 바로 민족 대이동이다. 뭐라 해도 중원 땅은 한漢 민족의 수천 년에 걸친 고향이었고, 강남은 당시 아직 후진 지역이었으므로 사람들은 애끊는 마음을 금할 수 없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게다가 이주지의 생활 자체가 고통스러웠다. 새로운 왕조를 세운 동진 원제조차 의복과 음식이 부족해 돼지 한 마리를 얻으면 진선珍膳이라 하고, 그 목살은 금련禁?이라 부르며 여러 신하들에게는 젓가락을 대지 못하게 했다. 이 생활을 견디기 어려웠던 귀족 중에는 거기장군車騎將軍 조적祖?처럼 강도짓을 하는 자까지 나타났다.
도교는 주로 무지한 민중에 의해 신봉되었으며, 일반 지식인은 이에 강한 경멸감을 품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리고 도교와 도가, 즉 노장 사상을 구별하는 것도 상식이 되어 있었다고 해도 좋다. 다만 도교는 중국의 오랜 전통 위에 서 있는 민간신앙이나 무술巫術을 배경으로 하는 것인 만큼 그 사회적 세력은 매우 강대한 면이 있었다. 그것은 불교의 유력한 경쟁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상호 영향을 교환하게 되고, 근세 중국의 민중사회에서 볼 수 있는 도교·불교 혼합 상태를 가져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당대 전반기에는 대부분의 종파 불교가 다 나왔는데, 이들 중 정토교淨土敎와 선종禪宗에 관해서는 특기할 필요가 있다. 그 까닭은 이 두 종파 불교는 모든 중국 불교 중에서도 가장 중국적인 특색이 있고 중국인의 체질에 맞는 불교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다른 종파 불교의 다수가 당 이후 잇달아 그 자취를 감춘 데 반해 홀로 정토교와 선종만이 살아남아 송 이후 1천 년 동안 생명을 유지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사대부가 귀족적 성격을 청산하고 일대에 한정된 관리가 되었다. 더욱이 내외 모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고 그것이 국가의 흥망에 연결되는 성질의 것이었으므로, 이것이 사대부의 위기감을 자아내게 된다. 영원의 문제보다도 현실적인 문제의 해결 쪽이 한층 중요하다. 이 같은 의식이 송대 사대부를 종교적 인간으로부터 정치적 인간으로 전환시키게 되었다.
송학의 목적은 불교나 노장의 철학을 극복해 유교의 철학을 건설하는 데 있었다. 그 때문에 유교 의 경전을 근거로 해서 독자적 이론을 구성하는 데 노력했지만, 이미 노장이나 불교 사상이 지식인의 교양 속에 침투해 있었으므로 무의식적으로 이를 섭취하는 결과가 되었다. 특히 주돈이로부터 주자에 이르기까지 송학자는 당시의 풍조에 따라 선승禪僧과의 교유가 드물지 않았기 때문에 더 한층 그 영향을 받는 일이 많았다. 그 때문에 “송학의 문도는 불교를 바깥문에서 추방하면서 뒷문으로 고스란히 끌어들였다”는 비평도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불교나 노장이 출세간적인 경향을 강하게 갖는 데 반해 송학은 그 우주나 인생론을 도덕이나 정치의 세계에 연속시키려고 노력한 것이어서, 거기에 질적인 차이가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주자학 속에도 약점과 결함이 잠재하고 있었다. 그것은 주희 당시에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는데 시대가 경과함에 따라 팽창해 현저히 드러나게 되었다.
첫째는 주자학이 너무나도 훌륭하게 완결성을 갖춘 철학이기 때문에 이미 이 이상의 발전이 불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실제로 원·명·청 7백 년을 통해 주자학에는 본질적인 발전이 없었고 주자학의 신봉자는 전부 아류의 썩은 유자儒子들에 지나지 않는 참담한 지경이었다. 오히려 독창적인 사상은 오로지 주자학의 비판자 속에서 나온 게 실상이었다.
주자학을 엄하게 비판한 청조淸朝의 대진戴震은 “사람이 법法을 위반해서 죽는 경우에는 아직 이를 슬퍼하는 자가 있지만 이理에 위반해 죽는 경우에는 이를 슬퍼하는 자는 누구 한 사람도 없다”고 했다. 이理는 법보다도 냉혹, 무자비하다. 만일 인정의 자연을 존중하는 것이 근대정신의 표현이라고 하면 근대의 도래와 함께 자취를 감추는 것이 주자학의 운명이었다고 할 것이다.
주희는 50년의 관료 경력을 지녔다 해도 실무를 수반하는 관직에 오른 것은 10년을 넘지 않는다. 이와는 반대로 왕양명은 행정과 군사의 격무 중에 생애를 마쳤다. 주희가 보다 학구적이고 양명이 간이하고 즉각적인 행동의 학문을 제창한 것은 한편으로는 개인적인 환경의 다름에 기인한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양명의 반反주지주의, 무엇보다도 감정과 의지를 중시하는 입장이 명대 사회의 풍조에 근거한 것임은 이미 앞에서 서술한 대로이다.
물론 이탁오를 이 같은 노장적 자연주의로 이끈 것은 노장 사상의 ‘영향’이란 것이 아니라, 명 말기에 넘쳐흘렀던 향락주의적 풍조와 퇴폐의 현실이었다. 명 말기의 사회 자체가 이탁오라는 일개 사상가를 빌려 자기를 표현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퇴폐는 그 다다른 곳에서 파멸로 끝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이탁오의 자살은 그대로 명대 사회의 자멸을 상징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양명학의 종언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진보다도 약 백 년 전에 나타난 일본의 이토 진사이(伊藤仁齋, 1627~1705)는 겐로쿠(元祿) 전후의 시기에 『어맹자의語孟字義』 등 일련의 책을 저술했는데, 그 사상은 완전히라 해도 좋을 만큼 대진의 학설에 가깝고, 더욱이 그 논지는 대진보다도 한층 명쾌하다. 더욱 중요한 것은 대진의 설이 거의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 데 비해 진사이의 학문은 그 영향하에 있던 소라이(?徠)학과 함께 한 시대를 풍미하는 유행이 되었던 것이다.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가 “인욕도 또한 천리가 아닌가”라고 한 것도 다름 아닌 그 표현이었다. 이것은 청조와 에도 시대 양자의 근대 지향의 속도를 재는 하나의 지표로 도움이 될 것이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