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사물에도 영혼이 있다고 믿나요? 그들에게도 당신을 볼 수 있는 눈과 당신에게 미소 지을 수 있는 입이 있을까요? 저는 세상의 모든 사물이 재잘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한 남자를 안답니다. 그 남자는 북쪽 나라에서 태어난 시인이에요. 자신이 살던 나라를 넘어 수많은 곳에서 큰 명성을 얻었어요. 여행을 많이 했고, 화가나 배우와 같은 유럽의 모든 예술가를 만났어요. --- p.5
시인은 그림자의 육체, 목소리, 죄, 애무 그리고 자신이 겪은 지독한 가난을 영원히 땅 속에 묻어버렸어요. 대리석 비석과 차가운 눈 아래에요. 시인은 말했어요. “삶이 끝났을 때야 나는 잠이 들 것이다.” --- p.6
말하지 않아도 너에게 이야기가 전해질 거야. 그러면 얼음 여왕도 우리 이야기를 엿들을 수 없겠지. 내 옆에 누우렴, 그럼 이야기를 들려주마. --- p.12
아주 유명한 인물이 되겠어. 미래에 왕자, 예술가, 여행이 보여! 왕이 직접 메달을 줄 거야! 그런데 부자라…, 그건 잘 모르겠어. --- p.14
난 미치지 않았어!
난 남자야! 난 미치지 않았어! --- p.17
글이란 얼마나 아름다운지! 여기 그림자가 있어, 아주 오래전부터. 그림자는 또 다른 너야. 때로는 도망가기도 하지. 너를 춥고 외로운 채로 두고 떠났어. 그리고 아무것도 없어. 아니, 다시는 혼자가 아니야, 다시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우리는 처음에는 그냥 단어일 뿐이었어. 안데르센, 너 정말 대단하구나! 우리는 형태도, 목소리도 없이 오랫동안 기다려왔어. 그리고 네가 우리에게 의미를 부여해주었어. 너는 시인이야. 우리는 너의 그림자고 또 빛이야! 보세요, 이 초짜 작가가 어떻게 창작의 열정을 발견했는지요! 글쓰기는 월터 스콧과 위대한 셰익스피어의 세계를 한데 섞어 요리하는 것과 같았어요! 하지만 이 세계에는 철자와 문법의 요정들이 초대받지 못했어요. 안데르센은 아직 이 요정들을 알지 못했거든요. 그러니 요정들도 화를 내진 않겠죠? --- p.27
미네르바는 예술가를 수호하지. 하지만 미네르바가 과연 자네 같은 예술가를 좋아할까? 예술이란 진지하고, 교양을 갖춘 사람에게서 만들어지네. 심미안이 있는 사람을 위해 말일세. --- p.31
콜린 씨, 저들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저보다 훨씬 좋은 깃털이 있었답니다. 그 사이에 끼었다가 그들 부리에 맞을까 봐 걱정되어서요! --- p.46
시간은 계속 흘렀지만, 시인은 언제나 그대로였어요. 다른 또래들처럼 더 뚱뚱해지지도, 머리카락이 빠지지도, 더 못생겨지지도 않았지요. 하긴 그는 한 번도 잘생겼던 적이 없었잖아요! 시인은 많은 곳을 여행했지만, 언제나 집으로 돌아왔어요. 더 현명해지진 않았지만 늘 호기심을 잃지 않는 예술가였고, 자신만의 철학이 있었어요. 언제나 청년 같았지요. --- p.86
안데르센은 애원했지만 옌뉘는 단호했어요. “안 돼요.” 안데르센은 그들의 꼭 닮은 그림자를 가리켰어요. 서로 이어져 있는 그림자들을요. 하지만 옌뉘는 이 말만 반복했어요. “불쌍한 아이.” --- p.97
내가 죽으면 당신은 내 일기장을 조각조각 잘라서 출판하겠지? 절대 있는 그대로 책으로 낼 순 없을 거야. 그렇게 당신 손으로 재탄생한 나는 어떤 인물일까? 난 지금도 이미 나 자신도 알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네. --- p.121
하지만 자신의 바람과 달리 안데르센은 그렇게 간단히 정의 내릴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안데르센의 진짜 어린 시절이 어땠는지 조금이라도 안다면, 얼마나 많은 사실을 자서전에서 삭제하고 그 대신 낭만적이고 기독교적인 미덕이 가득한 이야기로 채웠는지 쉽게 간파할 수 있다(오늘날의 독자는 자서전에서 깔린 낭만주의 시대 특유의 과장된 분위기 탓에 거부감이 들 수도 있다). --- p.126
진짜 안데르센을 이해하려면 그의 동화를 봐야 한다. 그 속에서 영리하고, 현실을 날카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관찰자이자 해학을 좋아했던 한 예술가의 흔적을 찾아봐야 한다. 200편이 넘는 동화는 안데르센의 진정한 자서전이다. 그 속에는 한 예술가가 겪은 감정, 비극, 기쁨뿐만 아니라 예술, 성 정체성, 계급사회, 인생의 의미를 진지하게 성찰한 고민이 촘촘히 짜여 있다.
--- p.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