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우리 스타님께서는 핏빛으로 물들어 있어도 반짝반짝 빛나네?”
남자가 낮게 크윽크윽 웃음을 흘리자, 그 소리가 창고 여기저기 부딪쳐 음산하게 울려 퍼졌다.
“날 어쩔 생각이야?”
승후는 테이프에 칭칭 감긴 손목을 움직여 보았지만 얼마나 많이 둘렀는지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죽이겠지?”
“날 왜?”
“네가 조유하의 남자니까.”
유하의 이름이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승후는 자신이 잡혀 있는 이 현실보다 저 남자가 유하에게 품은 원한이 더 두렵게 느껴졌다.
“그러게 대단한 스타님께서 왜 조유하 같은 인간과 엮였어? 스타라는 이름값에 맞게 반짝반짝 빛나면서 해맑게 살았어야지. 조유하 같은 인간과 엮이니까 이런 일을 당하는 거잖아.”
창고를 울리며 들려오는 남자의 느릿한 음성, 어두운 공간, 코끝에 맴도는 기분 나쁜 곰팡내.
승후는 아주 간절하게 지금이 영화 촬영 중이길 바랐다.
지금 공포 영화를 찍고 있는 거다. 감독이 컷 소리를 내면 이 끔찍한 광경은 즐거운 촬영장으로 바뀔 거다. 승후의 간절한 바람에도 아랑곳없이 저벅저벅 다가오는 남자의 발소리가, 이건 현실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네가 살길을 알려줄게.”
남자가 무언가를 들고 이리저리 흔들다가 멈추자, 승후의 눈에 정확하게 총이 보였다. 저건 장난감을 개조해서 사람을 해칠 수 있게 만든 그런 총이 아니었다. 총알을 사용하는 진짜 총이었다.
“간단해. 어렵지 않아.”
승후는 있는 힘껏 다리를 버둥거려 보았지만, 역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것 하나만 하면 넌 살 수 있어.”
남자는 재미있다는 듯 낄낄낄 웃으며 총구로 승후의 머리를 톡톡 쳤다.
“조유하를 여기로 불러. 혼자 오라고 하고.”
유하를 죽이기 위한 미끼.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귀를 뽑아버리고 싶을 만큼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조유하가 혼자 오면, 넌 살려줄게.”
“너 설마 내가 그런 짓을 할 거라 생각하고 말하는 건 아니지?”
두려워하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내비치면 끝이다. 승후는 이 남자에게 휘둘리면 안 된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조유하하고 내 일이야. 넌 아무 잘못도 없잖아. 살려달라고 빌어. 살고 싶다고 말해. 그럼 유하가 너 살려줄 거야.”
악마의 속삭임이다. 승후는 남자를 올려다보며 그의 얼굴에 퉤 하고 침을 뱉었다.
“그냥 나 죽여. 내 여자 죽이고 살 생각 없으니까, 그냥 나 죽이고 끝내.”
퍽 하는 둔탁한 소리가 울리고, 승후는 외마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바닥에 나가떨어졌다. 그리고 그가 앉아 있던 의자는 넘어진 그대로 뒤로 밀려나 벽에 부딪쳤다.
“죽이고 끝내라고?”
퍽. 배를 강타한 강한 충격에 몸속에 있는 모든 장기가 뒤틀리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죽고 싶어?”
또다시 퍽. 이번 충격에는 속에 피가 거꾸로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승후를 향한 남자의 잔인한 발길질이 시작됐다.
승후에게는 끔찍한 시간이었다. 온전한 정신인지, 아니면 기절했다가 다시 깨어난 건지 알 수 없었던 시간. 살이 찢겼고, 콜록거릴 때마다 입 밖으로 피가 솟구쳤다.
“죽는 건 말이야, 이것보다 더한 고통에 시달리다가 가는 거야.”
남자는 의자를 가지고 와, 승후의 머리를 움켜잡고 일으켜 앉혔다. 그리고 승후와 시선을 맞추며 다시 낄낄낄 웃어댔다.
“네가 할 말은 하나야. 살려줘. 다른 말을 하면 넌 죽어. 알아들어?”
승후는 대답 없이 남자의 시선을 피했다.
그런 승후의 행동이 복종의 의미라고 생각한 남자는 “그래, 그래야지. 그래야 착하지.”라고 말하며 그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그러고는 주머니에서 승후의 휴대폰을 꺼내 화면이 그를 향하게 했다.
[승후 씨?]
화면에 유하의 얼굴이 보이자, 승후의 꽉 다문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말해. 어서.”
악마가 속삭이듯 남자는 낮게 속삭였다.
[승후 씨, 내가 갈게. 기다려. 내가 승후 씨 구하러 갈게.]
승후는 떨릴 정도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차마 유하를 볼 수 없어서 두 눈을 꼭 감았다.
[나랑 말해! 승후 씨는 상관없잖아! 나와 너, 우리 두 사람 일이잖아. 그러니까 나하고 말하자고!]
유하의 악에 받친 고함이 승후의 귓가에 들린다. 승후는 눈을 떠 화면 속,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른 유하를 보았다.
“조유하 경위, 네 남자를 이렇게 보니 어때? 새롭지 않아? 스타님이라서 그런가? 피로 칠갑을 하고 있는데도 섹시하다. 그렇지?”
[건드리지 마! 내가 갈 테니까, 승후 씨 건드리지 마! 이 개새끼야!]
유하의 분노가 휴대폰을 뚫고 밖으로 터져 나오는 듯했다.
“유하야, 조유하.”
승후는 빙긋 웃으며 유하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렀다.
“나 소원 한 가지 남았어. 알지? 그 소원 지금 말할게. 오지 마. 절대로 오지 마. 나 구하지 마. 네가 나 구하러 오면, 네 앞에서 혀 깨물고 죽을 거야. 그러니까 절대로 오지 마. 그게 내 마지막 소원이야.”
[기다려. 내가 갈게. 절대로 그냥 죽게 안 둬. 내가 꼭 구할 거야. 승후 씨, 나 믿고 조금만 기다려. 나 사랑한다면, 포기하지 마. 절대로!]
승후는 더 밝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기억해. 네 탓 아니야. 이놈은 미친 거야. 미친놈이 벌인 일로 자책하지 마. 미친놈은 미친놈으로 남겨두고, 넌 이런 놈 잊어.”
눈물이 차오른다. 유하를 조금 더 오래 보고 싶은데, 더 많이 보고 싶은데, 눈물 때문에 앞이 희미해졌다.
[내가 가. 내가 갈 테니까, 포기 말고 기다려. 기다릴 수 있지?]
“유하야, 너 사랑한 거 나 후회 안 해. 너 사랑해서 행복했어. 그러니까 끔찍한 건 다 잊어.”
“아이씨, 신파를 찍어라!”
남자의 발길질에 승후는 윽, 하는 신음을 흘리며 바닥으로 나가떨어졌다.
[하지 마!]
유하의 비명이 귓가에 들리자 승후는 온 힘을 다해 몸을 일으켜 앉았다.
“콜록, 하. 하. 하.”
고통이 섞인 거친 숨소리가 승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조유하, 아무래도 우리 둘 회포는 나중에 풀어야겠다. 마지막 인사나 해라. 너 때문에 죽을 네 남자와.”
[하지 마! 내가 가! 내가 간다고! 내가 갈 테니까, 그 사람은 살려줘. 내가 갈 테니까 그 사람은 제발…… 살려줘!]
애원이다. 유하가 애원하고 있다.
“죽여. 지금 죽여. 유하 손대지 말고 그냥 나 죽여! 그렇게 우리 끝내자.”
싫었다. 승후는 이런 미친놈에게 유하가 애원하는 건 싫었다.
[하지 마! 아무 말도 하지 마! 승후 씨 입 다물고 가만있어!]
울부짖는 내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늦었어. 기회를 놓친 건, 민승후, 이 새끼야!”
남자는 마지막으로 승후를 비춰주고 휴대폰을 바닥에 던졌다. 휴대폰이 부서지는 둔탁한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승후의 귀에 꽂혔다.
‘아, 이제 여기서 죽는구나.’
승후는 자기 죽음을 직감했다.
“난 여기서 이렇게 죽을 거야. 그건 확실해. 그러면 유하는 널 무슨 짓을 해서든 잡아 처넣겠지? 하지만 절대로 널 죽이지는 않아. 너 같은 미친놈은 기억할 가치도 없으니까.”
“이 새끼가…….”
“네 손에 내가 죽으면 유하는 영원히 날 기억할 거야. 고마워. 유하의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사람으로 남게 해줘서.”
“그렇게 죽는 게 소원이야? 그래. 그럼 죽여주지. 그렇게 해줄게.”
남자는 발로 승후의 가슴을 걷어찼다. 그리고 승후가 윽, 하는 신음을 흘리며 뒤로 넘어가자 가까이 다가와 그의 배를 발로 있는 힘껏 내리찍었다.
승후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고통에 몸부림쳤다.
“죽어! 그렇게 죽는 게 소원이라면 죽어!”
남자의 총구가 자신을 향하는 걸 보며 승후는 눈을 감았다.
“유하. 조유하라고 해요.”
지금 이 기억을 모두 가지고, 처음 유하를 만났던 그때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될까?
어쩌면 처음에는 피하려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시 사랑하게 될 거다. 승후는 그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건 운명이니까. 목숨을 바쳐 사랑할 운명.
‘유하야, 사랑해.’
어둠이 내려앉은 산속 버려진 창고.
탕! 날카로운 총소리에 잠들어 있던 새들이 날아올랐다.
***
1년 전.
인천국제공항.
편한 캐주얼 차림에 선글라스를 쓴 승후가 공항에 들어서자마자 여기저기서 카메라 불빛이 번쩍였다.
“어머, 민승후야.”
“얼굴 봐. 진짜 주먹만 해.”
“엄청 잘생겼다. 만들어도 저렇게까지 잘생기진 않을 거야.”
여기저기서 웅성웅성.
승후는 사람들이 자신을 두고 하는 말들을 다 듣고 있으면서도 안 들리는 사람처럼 휴대폰을 살피며 매니저의 뒤를 따라 걸었다.
“거기 서!”
매서운 고함이 들리고, 건장한 남자가 승후가 있는 쪽을 향해 무서운 기세로 달려왔다.
그 기세에 당황한 나머지 피하지도 못하고 멍하니 있었던 승후는 남자와 부딪쳐 그대로 뒤로 넘어져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쌍!”
저가 부딪쳤으면서 오히려 무섭게 노려보며 욕설을 내뱉는다. 그 기세에 당황한 승후는 앉은 그 상태에서 일어날 생각도 못하고 멍하니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너 이 새끼야! 거기 딱 서 있어!”
날카롭게 날아온 이 음성은 분명히 여자 목소리다. 그 소리에 사내는 또 욕설을 내뱉으며 다시 도망가기 시작했다.
“잡히기만 해! 너 내 손에 죽었어!”
건장한 남자를 쫓아간 여자는 사납게 소리치며 바람처럼 승후 앞을 지나가더니 얼마 안 가 그를 따라잡는 괴력을 발휘했다. 그리고 여자가 붕 날아 발길질을 몇 번 하니 건장한 남자가 바닥에 꼬꾸라졌다. 이후 남자의 날카로운 비명소리를 끝으로 곧 손목에 수갑이 채워졌다.
뭐지? 저 여자 뭐야?
반쯤 넋이 나간 상태인 승후는 일어날 생각도 못 하고 눈이 휘둥그레져서, 흔하지 않은, 아주 진귀한 장면을 관찰하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양복을 입은 남자가 승후를 보며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물어왔다.
처음엔 뭐지? 하고 고개를 갸웃하던 승후는 곧 자신의 상태를 인지하고는 서둘러 일어나 옷을 가볍게 툭툭 털어냈다.
“아! 네.”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없어요. 없습니다. 괜찮아요.”
승후가 어색하게 웃고 있으려니 뒤에서 한 남자가 “팀장!” 하고 양복 입은 남자를 불렀다.
“가.”
양복 입은 남자는 뒤돌아 짧게 외친 후 다시 승후를 보았다.
“민승후 씨가 다쳤으면 경찰청이 발칵 뒤집어졌을 텐데, 괜찮으시다니 다행입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나중에라도 아프시면 꼭 연락 주세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명함을 받아 든 승후는 확인하지도 않고 바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럼 이만.”
“아! 네.”
양복 입은 남자는 인사하고 뒤돌아서 동료들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조 형사! 지원 나와서 펄펄 날면 우리는 어쩌라는 거야?”
“원래 지원 나와서 더 잘해야 우리 팀 욕 안 먹는 거예요.”
조금 전 남자를 시원하게 제압한 여자 형사는 그렇게 말하며 킥킥 웃음을 흘렀다. 여자의 뒤통수를 가만히 보던 승후는 매니저가 부르자 시선을 돌렸다.
“저 여자 경찰, 아는 사람이에요?”
“몰라. 다만 내가 아는 여 형사도 저 사람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했지.”
“형님이 여 형사를 어떻게 알아요?”
“그냥 이름만 아는 사람이야. 얼굴도 몰라. 그런데 아까 그 경찰과 비슷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
“왜요?”
“저 정도로 멋있는 사람이면 눈 높다고 칭찬해 주려고.”
“네?”
매니저는 승후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몰라 고개만 갸웃했다. 그런 매니저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터뜨린 승후는 고개만 살짝 돌려 다시 여 형사를 힐끔 보았다. 그 여 형사는 여전히 뒤통수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웃고 있다는 건 확실히 알 것 같았다.
‘당신도 저 형사만큼 멋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