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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의 개척자 최용덕

공군의 개척자 최용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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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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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8년 10월 01일
쪽수, 무게, 크기 256쪽 | 150*210*20mm
ISBN13 9791189163013
ISBN10 1189163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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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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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덕은 중국군에 복무할 때에도 의열단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중국군 군관이라는 신분은 최용덕의 강점이었다. 조선으로 무기를 반입하려면, 우선 한만국경(韓滿國境)의 관문인 안동(安東: 현재의 단동)까지 열차로 운반해야 했다. 그런데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북경에서 안동까지 수많은 검문을 거쳐야 했다.
하지만 현역 중국군 군관인 최용덕에게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최용덕은 그 강점을 살려 의열단의 무기 운반을 담당하는 책임자로 일했다.
1923년 4월 7일에 조선총독부 경무국장(警務局長)이 외무차관(外務次官)에게 통보한 요지(要旨)에 최용덕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전략) 단장 김원봉은 1922년 6월 천진(天津)에 있던 단원 최용덕(崔用德)과 양건호(梁建浩)로 하여금, 조선 내의 교통상황과 폭탄수송방법의 연구 시찰을 겸하여 조선무산자동맹회장(朝鮮無産者同盟會長) 김한(金翰)과 면회하고 폭탄 밀수입과 투척 실행의 진의(眞意)가 있는지를 확인하여 올 것을 명하여 계획의 제일보(第一步)에 착수하였다. (후략)……

이 기록에 의하면, 최용덕이 1922년에 의열단 단원으로 활동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용덕의 이름이 거론된 위의 사건은, 1923년 3월에 의열단 단원들이 일제의 식민통치기관인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 조선은행 등 주요기관을 폭파하려던 사건이다.
비록 국내 책임자인 김한(金翰)을 필두로 김시현(金始顯)과 유석현(劉錫鉉), 남정각(南廷珏) 등 주모자들이 모두 일경에 체포되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지만, 폭탄 36점과 권총 5정을 동원한 대담하고 규모가 큰 거사였다.
이 거사는 2016년에 영화로 만들어져 세간에 널리 알려지게 된다. 국민배우 송강호와 공유가 주연한 영화 ‘밀정(2016년 개봉)’이 바로 그 영화다.

……………………………………………………

1937년 12월 13일, 마침내 중국의 수도 남경(南京: 난징)이 함락되고 말았다. 이때 일본군은 약 6주 동안에 걸쳐 역사상 악명 높은 대규모의 학살을 자행했는데, 이 ‘남경대학살’에서 30만여 명의 무고한 시민이 학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남경이 함락된 후, 일본 항공대는 무한(武漢: 우한)과 남창(南昌: 난창)을 집중적으로 폭격했다. 무한은 중국군 총사령부가 위치한 곳이었으며, 남창은 공군사령부와 비행기 제조창이 있는 중국 공군의 주요 거점이었다.
그런 주요 거점인 남창을 방어하는 공군기지의 사령관이 조선인인 최용덕이었다는 것은 파격적인 일이었다. 일본군이나 만주군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지만, 중국군 내에는 외국인에 대한 보이지 않는 차별이 존재했다. 그것은 조선인에게도 적용됐다. 따라서 외국인으로서 중국군 장성(將星)이나 부대 지휘관이 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중일전쟁 기간 중에서 1938년은 일본군이 가장 승승장구한 해였다. 5월 19일, 화북(華北) 지방과 화중(華中) 지방을 연결하는 철도 요충지인 강소성 서주(徐州: 쉬저우)를 점령했으며, 10월 27일에는 중국군 총사령부가 위치한 호북성 무한까지 손에 넣었다. 1938년 말까지 일본은 광동(廣東)에서 산서(山西)에 이르는 남북 10개 성(省)과 해안 주요 도시들을 거의 장악했다.
이 때문에 남창 방어 임무를 맡은 최용덕은 일본 항공대와 피 말리는 혈전을 벌여야 했다. 다음은 1938년 한 해 동안 남창의 하늘에서 벌어진 중국 공군과 일본 항공대의 교전 기록이다.

1938년 1월 7일
일본해군 제12항공대 전투기 9대가 일본 목경진 항공대 공격기 15대를 엄호하며 남창의 새 비행장을 공습, 중국 공군이 응전함.
1938년 2월 25일
일본해군 제2연합항공대 전투기 18대가 남창상공에서 공중전을 벌임. 일본기는 8대가 격추되고 중소연합기는 7대가 피격되었다.
1938년 6월 26일
일본해군 제12, 제13항공대 전투기 46대는 폭우 속에서 남창을 공습. 중소항공대 28대가 응전하여 일본기 6대를 격추시킴.
1938년 7월 4일
일본해군은 56대의 전투기로 남창을 공습하였고 중국공군은 18대, 소련지원항공대는 28대를 동원하여 근 백 대가 치열한 공중전을 벌였다. 일본기 7대, 중국기 2대가 각각 격추되었다.
1938년 7월 18일
일본해군 27대가 남창을 재차 공격하였다. 중소공군 25대가 응전하여 일본기 4대를 격추시켰다. 중소연합기 3대가 격추되고, 지상에 있던 중국공군 비행기 10대가 파괴되었다.
1938년 8월 4일
일본 전투기가 남창기지와 남창 시가지를 공습하여 수백 명의 민간인이 희생되고 중국공군 남창기지는 결국 고안, 상고비행장으로 후퇴함.

……………………………………………………

최용덕이 귀국하던 1946년 7월, 국내에는 조선항공기술연맹(군 출신 항공인, 1946. 3. 20.), 중앙활공연구소(1946. 3. 15.), 조선학생항공연맹(1946. 3. 20.) 등 여러 항공단체들이 있었다. 최용덕은 돌아오자마자 그들의 구심점이 되었다.
7월 26일, 국내 항공단체들의 대표와 항공인들이 최용덕 장군 환영회를 열었다. 이날, 항공인들은 공군 창설을 위해 항공단체를 통합하기로 의견을 모으고, ‘항공단체 통합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1946년 8월 10일, 국내의 모든 항공단체들이 서울 종로에 위치한 중앙기독교청년회관(YMCA)에 모여 ‘한국항공건설협회’를 창립했다. 항공단체들이 한 목소리를 내게 된 것이다. 이 자리에 모인 항공인들은 만장일치로 최용덕을 회장에 추대했다.
항공인들을 하나로 모은 이후에 최용덕은 통위부와 미군정 관계자들을 찾아가 공군 창설을 요구했다. 통위부 정보국장 대리 김영환 부위(副尉: 중위)가 다리 역할을 했다. 독립운동을 함께한 대선배 유동열 통위부장은 매우 호의적이었다. 하지만 통위부 수석고문 프라이스 대령과 미군정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이 봤을 때, 최용덕의 요구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얘기였다.
미군은 전통적으로 공군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까지도 모든 항공부대들이 육군과 해군 소속이었고, 1947년 9월 18일에 가서야 미 육군 항공군에서 공군이 독립해나갔을 정도였다. 그런데 비행기 한 대 없는 한국이, 게다가 아직 미국에서조차 공군이 창설되지 않았던 1946년에 공군 창설을 주장했으니 미군정으로서는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최용덕과 항공계 지도자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미군정 당국과 교섭을 계속한 결과 1948년 3월, 드디어 조선경비대 내에 경비행기부대를 창설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하지만 미군정은 항공계 인사들이 일본군 항공대나 중국 공군 출신이기 때문에 과거 경력을 인정할 수 없다며, 보병학교에 입교하여 훈련병들과 함께 미국식 군사훈련을 받을 것을 요구했다.
항공계 지도자들에게는 치욕적인 얘기였다. 최용덕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영무, 장덕창, 김정렬 등은 2천 시간 이상의 비행경험을 가지고 있는 베테랑 조종사들이었던 것이다. 항공계 지도자들은 불쾌한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불평을 토로했다. 이때 최용덕이 비장한 어조로 이렇게 얘기했다.
“동지들! 참으로 불쾌하기 그지없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요. 하지만 이제 해방이 되어 새로운 나라가 만들어지려 하고, 우리는 그 나라의 하늘을 지킬 공군을 창설하려 하오. 공군이 창설되어 우리가 우리 군대에서 우리의 영공을 지킬 수만 있다면 이까짓 모욕이 뭐 그리 대수겠소. 옛날에 이순신 장군도 조국을 위하여 백의종군하지 않았소. 대의(大義)를 위하여 우리가 참읍시다.”
1948년 4월 1일, 항공부대 창설요원들이 수색 소재의 육군보병학교에 입교했다. 입교자들은 최용덕, 이영무, 장덕창, 박범집, 김정렬, 이근석, 김영환이었다. 공군에서는 이들을 ‘공군 창설 7인의 간부’라고 한다.
이들은 보병학교에서 1개월 동안 일반병사와 똑같이 기초 군사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다시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의 전신)에 입교하여 2주 동안 간부후보생 교육을 받은 후 5월 14일에 육군 소위로 임관하게 된다. 그때 최용덕의 나이 50세였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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