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 카스텔리(Leo Castelli, 1907-1999)를 가리켜, 유명한 배우이자 사진가, 화가, 조각가로서도 활발히 활동한 데니스 호퍼(Dennis Hopper)는 “현대 미술계의 대부(Godfather of contemporary art world)”라고 했으며 혹자는 그를 뉴욕 현대 미술 상인의 ‘학장’이라 칭송한다. 갤러리 운영 모델이 부재하던 20세기 중반, 오늘날까지도 통용되는 갤러리의 기틀을 다진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이러한 평가를 과찬이라 말하지 못할 것이다. 카스텔리는 20세기 전반에는 파리에서, 후반에는 뉴욕에서 갤러리를 열어 당대 최고의 작가들과 일했고, 양 대륙을 오가는 문화 외교관 역할을 하며 미술사의 현장을 만들어 나갔다. 그가 함께한 작가들을 꼽아 보면 초현실주의를 시작으로 추상표현주의, 네오 다다, 팝 아트, 옵 아트, 색면 추상, 미니멀 아트, 개념 미술, 신표현주의 등 20세기 미술사에 다름 아니다. --- 1부, ‘아트 마켓의 대부, 레오 카스텔리(Castelli Gallery)’에서
유머는 카스텔리가 딜러라면 꼭 가져야 할 덕목이라고 강조한 요소이기도 하다. 가고시안의 유머 감각은 인터뷰에서도 드러난다. 인터뷰를 잘 하지 않는 가고시안을 위해 미디어 제국의 대표 피터 브랜트가 직접 나섰다. 카스텔리에게서 배운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가고시안은 “인터뷰를 많이 하지 말라는 것이죠.”라고 대답해 첫 번째 웃음을 유도했다. “하지만 그에게 상의하려고 전화를 하면 비서는 항상 ‘카스텔리 씨는 지금 인터뷰 중입니다’라고 말하더군요.” 폭소가 터졌다. (...) 밥 딜런(Bob Dylan)의 수채화 책을 보고 전시회를 제안할 때에도 가고시안의 유머가 힘을 발휘했다. 늘 담대한 그도 우상이던 밥 딜런을 만나는 날에는 몹시 긴장했고, 화가도 아닌 사람을 설득해서 전시회 제안을 하는 자리이니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그의 유머가 통했다. 밥 딜런이 웃는 순간 가고시안의 긴장이 풀렸고 그 이후의 이야기는 잘 풀려 나갔다. 노벨상 수상식에도 참석하지 않은 밥 딜런을 전시회 오프닝에 참석시키는 데 성공했으니 말이다. --- 1부 ‘글로벌 갤러리 비즈니스의 표본, 래리 가고시안(Gagosian Gallery)’에서
“만약 갤러리스트가 없다면 새로운 작가의 새로운 콘셉트는 없을 겁니다. 그들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저 경매에서 50년 전에 만들어진 작품이나 살 수 있을 테지요. 젊은 작가가 생각을 실현할 수 있도록 돕는 건 무척 기분 좋은 일입니다.”
이것은 페로탕이 생각한 갤러리스트의 역할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그는 갤러리스트가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는 질문에 작가가 꿈을 실현할 수 있도록 돕는 이라고 답했다. 여기에는 많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팔릴지 안 팔릴지 확신할 수 없는 작품을 만들기 위한 어마어마한 액수의 자금을 스스로 댈 수 있는 작가는 거의 없다. 갤러리스트로서 그는 금전적 지원을 포함해 완성된 작품을 선보일 적합한 공간과 시기 등 작품을 창작할 수 있도록 조건을 만들어 주는 데 주력한다. 그리고 그렇게 키워 낸 작가들이 알려지고 널리 활동하는 것을 볼 때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한다. 또 훌륭한 갤러리스트가 되려면 좋은 작가를 알아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달리 표현하면, 내가 알아본 작가를 좋은 작가로 키워낼 능력이 있는지가 바로 답이다. 작가의 꿈을 실현시켜 주는 것이 갤러리스트의 임무라는 페로탕의 철학은 작가를 사로잡았다. --- 1부, ‘예술가 친구들과 함께한 성공, 에마뉘엘 페로탕(Perrotin Gallery)’에서
제프리 다이치의 흥미로운 반전 인생은 그 후로도 계속되었다. 화룡점정은 그가 바로 LA 현대미술관(MOCA)의 관장이 된 것이다. 평생 영리 기관에서 일한 그가 난생 처음으로 비영리 기관인 대형 미술관의 수장이 된 데에는 그를 적극 옹호한 컬렉터 엘리 브로드의 후원이 있었다. 브로드는 성공한 사업가이자 LA의 주요 후원자로 그랜드 애비뉴, 디즈니 홀 등 다양한 문화 기관에 35억 달러(약 3조 7천억 원)를 후원한 자선가다. 그는 오랜 기간 MOCA에 도움을 준 후원자로서 2008년 미술관이 폐관 위기에 처하자 기꺼이 긴급 수혈 자금 30만 달러(약 330억 원)를 제공했다. 단 자신이 선정하는 관장을 임명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세웠는데, 바로 제프리 다이치였다. 『아트 리뷰』가 조사하는 미술계 파워 인물 리스트에서 다이치는 2010년 단박에 12위로 뛰어올랐다. 그를 선택한 엘리 브로드는 8위에 자리했다. --- 2부, ‘미술 시장의 이노베이터, 제프리 다이치(Jeffrey Deitch)’에서
갤러리 설립자가 스위스인이라고 해서 부유한 스위스 컬렉터가 투자한 것인가보다 생각했는데 의외로 상아트 갤러리는 중국어를 배우러 온 한 젊은이가 바닥에서부터 만든 곳이었다. 그의 이름은 로렌츠 헬블링(Lorenz Helbling). 로렌츠 헬블링은 스위스 취리히 근교 브루크(Brugg) 출신으로 대학에서 역사와 미술사, 그리고 중국어를 전공했다. 부모님과 다른 형제 모두 작가로, 그도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높았고 특히 중국의 역사와 영화를 좋아했다. 결국 1985년 상하이 푸단(?旦) 대학으로 유학을 왔다 취리히로 돌아가서는 중국 영화를 전공해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1992년에는 홍콩으로 건너와 플럼 블로섬스(Plum Blossoms) 갤러리에서 업무를 익힌 후 1996년 본래 그가 처음 발을 디딘 상하이로 돌아갔다. 영어가 통하는 국제 도시, 컬렉터도 더 많을 듯한 홍콩을 버리고 상하이로 돌아간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작가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는 소비자가 있는 곳이 아닌 생산자가 있는 곳을 택한 셈이다. 홍콩은 중국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 주는 하나의 창문일 뿐 정작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깊이 이해하고 만들어 내려면 본토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시 그가 처음 방문했던 도시로 돌아가 그 도시의 이름을 따 상아트 갤러리를 시작했다. 상하이에 대한 그의 애정은 정말 대단하다.
--- 2부, ‘상하이의 스위스인, 로렌츠 헬블링(ShanghART Gallery)’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