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곳에 온 까닭? 나는 나에게 물었다. 아버지가 둘인 이유일 테지. 한국과 일본에 각각 하나. 양아버지와 친아버지. 그 사이에서 헤매는 게, 나겠지. 바람나 도망친 아버지. 그로 인해 가족은 찢어지고, 고향으로부터도 왕따당했던 나. 모든 불행과 불운이 거기에서 연유한다고 여겨 뛰쳐나온 거겠지 뭐. 어쩌면 이곳 나가사키엔 온전한 아비가 있을지도 모른다며. 아닐까.
--- p.274
여자 친구가 있어본 적이 없어요, 라는 그의 말이 머릿속에서 뱅뱅 돌았다.
“외운 것들이 서로 엉기질 않아요. 엄마는 그런 게 두부처럼 엉겨야 되는데, 라고 하시죠. 화학작용을 해서 뭔가 다른 것들을 만들어내야 하는데 못 그래요. 배 속에서 소화물이 소화되지 않고 그냥 생으로 나오면 똥보다 더 끔찍할 거예요, 그쵸?”
--- pp.62~62
“저거 말이에요. 방석…… 방석 맞아요?” 쓰쓰이가 도리질을 했다. “뭐예요, 그럼?” “몰라요.” “몰라?” …… “몰라요, 정말. 이름 없는 것들이니까.” “모두?” …… “이름 없는 것들만 모아둔 거니까.”
--- pp.117~118
여기에 있는 것 거의 모두는 소속을 몰라요.
“소속?”
“용도 같은 거요. 누가 무엇에 필요해 만들었던 물건인지 모른다는 거예요. 긴 시간이 흐르면서 사용자와 물건과의 관계가 없어지는 거죠. 관계가 없어져, 그래서 혼자가 된 것들. 혼자가 되면 이름도 없어지죠.”
“존재만 남고?”
“외롭지만, 존재까지 없어지는 건 아니니까.”
--- pp.124~125
니 아빠를 개인적으로 처음 만났을 때 내 나이 스물하나였단다. 아, 꽃 같은 나이였지. 오이로 말하면 아직 꽃도 채 떨어지지 않은 오이였단 말이야. 그런 오이를 따면 어른들게 혼나는데 니 아빠는 풋오이 같은 나를 꼬셨지 뭐냐.
--- p.72
의미 없어요. 한국과 일본, 양아버지와 친아버지, 그런 것. 나, 한유나의 삶은 이제 그런 풍향과는 상관없이 가요.
--- p.291
아버지로 불리는 순간, 아버지가 되기도 하는 거니까요. 아버지란 게 원래부터 있는 게 아닐지도 모르잖아요. 그런 아버지 따윈 다 버렸어요.
--- p.2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