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주명이 학생시절인 1920년대 송도고보는 전교생이 300여 명 정도인 5년제 지정학교로, 한옥 기숙사와 최신식 보일러 난방시설을 갖춘 석조 본관에다 전천후 체조장, 박물표본실 및 강의실, 물리화학실험실 및 강의실 등이 갖춰져 있었다. 송도고보는 창립 초기부터 실습을 강조하면서 석조실습장을 갖추고 있었고, 1924년이 되면 박물교실과 이화학교실을 만들어서 과학수업에 필요한 각종 기기, 실험기구, 각종 표본 등을 갖추고 있었다.
그가 송도고보로 전학할 당시 교장은 설립자인 윤치호였고, 생물교사로는 조류학자인 원홍구(1888~1970)가 있었다. 원홍구는 평안북도 삭주 출신으로 수원농림학교를 마친 다음 제1회 한일유학생으로 선발되어 1911년 일본 가고시마고등농림학교로 유학하였다. 그는 1919년 9월부터 10여 년간 송도고보 생물교사로 근무하면서 석주명, 김준민 등 특출한 생물학자들을 배출하였다. --- p.24~25
석주명은 1933년부터 개성지방을 넘어서 나비채집을 위해 전국 각지를 여행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러려면 열정만 있어서는 안 되고, 시간과 여행경비가 필요했다. 중등교사 봉급만으로는 도저히 여행경비와 연구비를 충당할 수 없어 집에서 부쳐오는 돈까지 나비연구에 충당했지만, 자신과 조수들의 채집여행 경비를 비롯해서 엄청난 표본관리 비용과 연구비를 조달하는 데는 부족하였다. 게다가 그는 중등교사였기에 시간적 제한이 많아서 주로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체계적인 채집여행 계획을 세워야 했다.
그는 1933년 여름 미국 하버드대학교 비교동물학교실로부터 경비를 지원받아 조복성과 함께 우종인, 장재순 등의 조수를 데리고 두 조를 이뤄 21일 동안 백두산 채집여행을 하였는데 대성공이었다. 석주명은 백두산 채집여행에서 호랑나비과 6종, 흰나비과 14종, 뱀눈나비과 13종, 네발나비과 50종, 부전나비과 31종, 팔랑나비과 16종 등 총 6과 130종 5,000여 마리를 채집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해마다 여름방학이면 나비채집여행을 하였다. --- p.50
석주명이 해방 직전 2년여 동안 제주도에 체류한 것은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 당시는 제주도의 자연과 문화에서 제주적인 것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고, 석주명 자신으로서는 학문의 수준이 거의 절정에 달해 제주도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기에 최적기였다. 그의 학문 전체를 놓고 볼 때, 제주도 연구 이전과 이후는 확연히 다르다. 석주명 선생이 제주에 오기 전까지는 에스페란토 관련 글들을 빼고는 대부분은 나비와 관련된 것이다. 그러나 그가 제주도 연구를 하면서 그의 관심 분야는 인문학과 사회과학까지 확장된다. 그가 수집했던 제주도 관련 자료들은 나중에 분석 정리되어 여섯 권의 제주도 총서로 발간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제주도 박사, 제주학의 선구자라 부른다. --- p.81
석주명이 살았던 시기는 학문적 상황으로 볼 때, 지식분화 이전의 모습과 이후의 모습이 겹치는 전통학문의 끝자락과 근대학문의 첫머리에 해당한다. 그의 최종 학력은 오늘날 전문대학에 해당하는 가고시마고등농림학교 졸업이다. 그런데도 그는 나비에 관한 한 자타가 공인하는 당대의 수준급 전문가였다. 그는 좁게는 나비학자 내지는 곤충학자요, 넓게는 생물학자 내지는 자연과학자이다. 그리고 그는 제주도의 곤충뿐만 아니라 언어, 민속, 역사, 지리, 사회, 문화 등을 연구하였다. 그런 점에서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통합학자요, 학문 융복합의 선구자라 할 수 있다.
석주명은 ‘조선의 생물학’, 즉 ‘우리 생물학’을 주창하면서 국학운동을 펼쳤던 민족주의자이면서, 학문적 성과물은 세계의 학자들로부터 객관적으로 평가받아야 한다는 것을 인정한 국제주의자였다. 그리고 그는 제주지역연구의 필요성을 깨닫고 『제주도 방언』, 『제주도의 생명조사서』, 『제주도 문헌집』 등 제주도 총서를 발간하여 제주학의 초석을 놓은 지역주의자이면서, 세계와 소통하고 세계평화를 위해 세계어인 에스페란토 보급운동을 펼치면서 『에스페란토 교과서』를 편찬한 세계주의자였다. --- p.113
가고시마고농에서 에스페란토를 공부한 석주명은 귀국 후에 신문과 잡지를 통해 그 필요성을 널리 알렸고, 연구논문들을 직접 에스페란토로 발표하거나 요약문을 쓰기도 하였다. 그는 에스페란토로 세계 학자들과 학술교류를 하려 하였고, 자신의 국제적 명성과 학자라는 신분을 등에 업고 일본어를 강요하면서 우리말 말살정책을 펴는 일제에 저항하였다.(홍성조·길경자, 2005) 일제의 식민통치를 받고 있는 조선의 지식인으로서 평화의 언어인 에스페란토를 통해 조국과 세계의 평화를 꿈꾸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었고,(이영구, 2012) 합리적인 민족운동의 일환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 에스페란토 효과를 체험한 그는 해방 직후부터는 일반대중에게 에스페란토 강습회를 열고, 경성대학(서울대학교), 국학대학, 홍익대학 등 여러 대학에서 에스페란토 강좌를 개설하였으며, 에스페란토 교과서와 소사전을 보급하면서 에스페란토운동을 주도하였다.
--- p.148~149